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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Jul 21. 2024

계피 입양 10주년에 부쳐

7살 추정의 나이에 나를 만나 10년을 함께 산 계피는 열일곱의 희끗한 노견이 되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여전히 잘 뛰어논다.



계피를 데리고 운동장에 잘 가지 않는 편이었다. 계피가 짖는 소리가 날 종종 곤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계피는 3번의 파양을 거쳐 7살 추정 나이에 나를 만났다. 그중 한 가족은 두 번 파양했다. 계피가 너무 시끄럽게 짖어서 짖는 소리가 안 나도록 성대 수술을 한 것도 4년이나 같이 살았다는 그 가족일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계피를 입양했던 보호소에 다시 데려다주었다. 이러나저러나 무책임하기는 매한가지지만, 길바닥에 유기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계피의 목소리는 노인처럼 쇳소리가 난다. 성대 수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저 개는 성대 수술을 했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헛짖음 많은 특성을 지닌 견종의 피가 흐르고 있어 운동장에서 별것 아닌 것에 짖고 다닌다. 쇳소리가 울려 퍼지면 시선은 점점 내게 쏠린다.


“어머, 넌 목소리가 왜 그러니?”

“아이구, 너 (성대) 수술했구나.”


의심과 확신이 오가는 묘한 상황. 처음엔 그 숙덕임과 눈초리가 싫어 누가 제발 이유를 묻기를 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구구절절 해명하는 건 구차한 것 같아서.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인데 잠깐 나쁜 인간으로 비치는 게 싫다고 해명하지 말자, 내 잘못 아니지만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보자 싶었다. 언제 적 파양인데 멀쩡히 잘 사는 계피 면전에서 옛날 얘기 꺼내기 미안해 “감기 걸렸어요” 거짓말도 했다.


넉살 맞게 오지랖이 부쩍 넓어진 지금은 누가 묻지 않아도 궁금해하는 기색이 보이면 붙잡고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다. 계피는 세 번이나 파양을 당했다고. 사지 않고 보호소에서 입양했다고. 전 보호자가 성대 수술을 했다고. 그 사람은 참 못되고 이기적이라고. 그럴 거면 키우지를 말아야 한다고. 원래 개는 짖는 거라고.


그제는 펫파크에서 눈앞을 지나는 모든 것에 날카롭게 짖는 푸들 친구를 만났다. 보호자 부부는 짖는 소리가 미안했는지 개가 뛰놀도록 내려놓지도 않았다. 짖을 때마다 눈을 가리거나, 끌어안고 도망을 다녔다. 도시에서도 저러고 살 텐데 운동장까지 와서 저러나. 짖음 교육이라고 하기엔 짖지 말라고 개에게 으름장을 놓을 뿐. 보호자가 우리 개들에게 관심을 보인 기회를 틈타 말을 걸었다.


“짖어서 그러세요? 괜찮은데. 개가 원래 짖는 거죠. 여기 펫파크인데 짖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요. 저희 개는 파양을 세 번 당했는데 전 보호자가 성대 수술을…”


짖는다는 이유로 성대 수술 당한 계피를 보고 부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반려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관련 산업도 발달했다. 개•고양이에 관련해서 없는 물건, 없는 서비스가 없다. 그런데 문화는 역행하여 기괴하게 변하고 있다. 동물이 인간과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 동물이 인간 사회에 피해 주지 않고 잘 편입되도록 ‘개조’하고 제한하는 모양새다.


이 자격 미달 문화에 자본주의가 겹치자 이런 일들이 생긴다. 번식장에서는 연예인이 데리고 나와 인기를 끈 견종을 ‘뽑아내기’ 위해 부모견을 착취한다. 아파트 거주자가 대부분인 한국인의 선호에 맞춰 개를 더 작고 작게 개조한다. 외모와 위생이라는 뭣 같은 이유로 개의 꼬리와 귀를 자른다. ‘순수 혈통’이라는 개•고양이를 수천만 원에 판매한다.


이상하다. 우리 인간은 완벽한가? 단 한 번이라도 완벽한 적이 있나? 나는 36년을 살면서 순수 혈통의, 짖지도 않고, 털도 안 빠지고, 오줌도 안 싸고, 냄새도 안 나는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런 주제에, 인간은 작고 말도 통하지 않는 존재들에게 유독 완벽을 강요한다. 그마저도 인간이 정한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개는 짖는다. 인간이 할 말 하고 사는 것처럼. 개는 털이 빠진다. 하루에도 한 움큼씩 머리카락을 뿜어대는 나처럼. 개들은 거리에 오줌을 싼다. 그러나 그들에게 악의는 없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도 않고 빗물받이를 막을 것을 잘 알면서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려대는 인간들에 비하면 개들의 오줌은 훌륭할 정도다.


종종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드는 ‘미완의 개’와 10년을 살고서야 깨달았다. 너도 나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러니 서로에게 완벽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는 네가 완벽하길 바랐음을. 계피 짖는 소리를 곤란해했던 지난 날이 부끄럽다. 그러니 계피야, 여생은 할말 다 하면서 엉망진창으로 살아주라.


미완의 집사가, 미완의 개 계피 입양 10주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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