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고 믿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메뉴판에서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아니면 라테. 내 선택에는 거의 변화가 없지만 오늘은 혹시나 다른 게 당길까 싶어 항상 메뉴판 앞에 어느 정도 머물게 된다.
“이제 도장은 테이크아웃만 찍어드려요.”
“아, 그래요? 그러면 안 찍어주셔도 괜찮아요.”
“이 카드까지만 찍어드릴게요.”
적립 카드를 다시 집어넣으려는 찰나 도장 하나가 더 찍힌 카드가 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뭐지 방금? 뭐였지? 나 지금 적립해 달라고 구걸한 것 같았는데.
나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기필코 쿠폰 도장을 다 모으려는 진상 손님이 된 것 같았다. '맛있게 드세요.'나 '감사합니다.'같은 말 없이 계산대 옆에 놓인 커피 한 잔으로 내 의심은 더 확고해졌다.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사장님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소란스러운 마음이 요동친다.
어느 날은 다른 카페에서 내 것을 다 주문하고 아이가 마실 것을 추가로 주문하려는데 황당한 대답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말했어야 직원에게 이런 대답을 듣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다.
“우유 한잔 주세요. 스팀 안 해주셔도 되고 얼음도 안 주셔도 돼요.”
“얼음 뺀다고 우유 더 드리지 않아요.”
“네? 우유를 더 달라고 한 게 아니라 너무 차가울까 봐 빼달라고 한 거예요.”
“아, 네.”
별스럽지 않게 대답하는 직원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봤다. 화가 난다거나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잠시 회로가 끊긴 것처럼 고장 나서 굳어버린 것이다. 메뉴판에는 우유가 있었지만 뜨겁게 나오는지, 차갑게 주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뜨겁게 나오는 우유는 먹지 않고, 주스처럼 얼음을 담아서 나온다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덧붙였던 건데, 대체 내가 얘기한 어느 부분이 얼음을 뺀 만큼 우유를 더 넣어주길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이 사람도 별의별 사람들 다 상대했으니 그런 거겠지, 얼음을 뺀 만큼 더 채워달라는 사람이 있었겠지.' 자리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얼음을 빼달라는 모든 사람이 상식적이지 않을 거라 가정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내가 만난 불친절한 누군가가 앞으로 만날 모두가 되어버린다면 일하는 날들이 가시밭길 일 것이다. 여기서 주문하는 사람은 모두 비정상이고 합리적이지 않을 거라 가정하고 일하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지옥일까. 우리는 여기서 아주 잠깐 처음 만난 거지만 서로가 좋은 사람일 거라 믿으며 예의를 갖추고 친절할 수 없을까. 너무 당연한 것을 이제는 나만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인가 혼란스럽다.
녹기 전에 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는 녹싸 님이 쓴 <좋은 기분> 에는 접객은 ‘예고된 기쁨’을 전하는 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제품 제공자’가 아니라 제품과 사람을 엮는 ‘기분 전달자’라는 것이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고 믿는 사람의 가까이에 서서 나는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고 외친다. 다정함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신념이나 가치관에 가깝다. 다정하겠다는 결정적 선택은 내 삶의 뱡향을 계획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영향을 준다.
나는 카페에서 언제나 좋은 손님이고 싶다.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카페의 무드를 해지지 않고 녹아있다가, 깔끔하게 뒷정리를 하고 나오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나의 하루도, 카페 사장님의 하루도 모난 곳 없이 흘러가길 바란다.
창가자리에 앉아 있으면 눈이 부시지 않은지 브라인드를 내려드릴까요 묻는 곳, 아이와 함께 카페에 가면 아이가 마실 메뉴를 확인 하고 깨지지 않는 컵게 짧게 다른 빨대를 넣어주는 곳. 그런 곳에는 각자의 삶에서 다정으로 세상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조용히 쿠폰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테이크 아웃을 하더라도 이제 여기 쿠폰을 챙겨 다닐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보다 나은 삶이란 아이스크림 혹은 공간 하나에 의지할 만한 규모가 아닙니다. (중략) 스스로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삶에 더해지는 크고 작은 변주를 통해 자아존재감과 자기효능감을 느끼는 삶입니다. 삶에 자기 고민을 투영한 결과물로서 일상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좋은 기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