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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tree Mar 31. 2023

[ 여행과 여행사이 ] 비에이 가는 길

비에이, 삿포로, 일본

비에이로 가는 투어를 예약했다. 틀에 짜 맞춰진 여행에 질색팔색하는 성향에 투어 여행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날 무엇에 홀렸는지 삿포로 역에서 비에이 투어를 신청했다.

사실 삿포로에 온 것은 비에이를 가기 위해서였다. 일본 여행을 할 때 주로 독립영화의 나오는 배경에 이끌려 온다. 아마 그전 주에 러브레터를 n번 째 봤던 것 같다. 그러고는 아무런 계획 없이 왔을 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비에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삿포로 중앙역으로 갔다. 약속시간에 잘 늦지 않는 편인데 10분 정도 늦어버렸다. 정확히는 7분. 버스는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오히려 잘 됐어! 내가 찾아가 보지 뭐‘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 5명이 버스 시간에 늦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투어 회사에 연락을 했고 버스는 이미 정각에 출발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무슨 용기였는지 이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비에이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두 얼마나 비에이를 가보고 싶었을까.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우선 기차를 타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에이에 가서 돌아올 땐 투어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여정을 계획했다. 서둘러 기차를 타고 가면 투어 일행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일정에 5명이 모두 동의를 했다. 그리고 앞장을 서서 기차를 타러 향했다.


일본의 크고 작은 도시로 여행을 자주 했던 터라 모든 길이 꽤 익숙하다. 처음 본 다섯 명의 사람들이 전력질주를 하여 플랫폼에 들어온 기차를 간신히 탔다. 모두 웃었다. 일본 기차에선 전화도 받을 수 없는 정적이 흐른다. 그 공기를 뚫고 모두가 동시에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오장육부가 다 시원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내 모두 진정을 하고 간단한 통성명을 했다. 그러고는 모두 비에이로 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봤다.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나 이 순간에 빠져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약 한 시간을 지난 후 드디어 비에이역에 도착을 했다. 그곳에 가니 우리가 타고 왔어야 할 빨간 버스가 하얀 눈 위에 서있었다. 그 버스를 발견하고 모두 다 같이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투어를 같이 온 삼 십 명쯤 되어 보이는 일행에 자연스레 들어가 가이드를 따라다녔다. 온통 하얀 세상. 아무도 밟지 않은 포근한 눈 밭에 뒹굴었다. 눈에 폭 안겨보니 참 보드랍고 따뜻했다. 기차로 같이 왔던 친구들과는 어느새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가까워졌다. 투어 일행 중 우리들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비에이 설원을 맘껏 누볐다. 서로 약속을 했던 것처럼 사진을 찍어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8년이 지난 사진이었지만 가끔씩 봐도 정말 기가 막힌 사진들이 많았다. 혼자 왔으면 이런 사진을 남기지 못했을 텐데. 오히려 너무 잘 됐어!


그렇게 추운 설원 위에서 세 시간가량을 뛰어놀다 보니 해가 뉘엿 지고 있었다. 하얀 눈 언덕, 석양을 등진 나무 그림자. 영화에서 보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순간을 영원히 멈추고 싶을 만큼 너무나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따뜻했다. 눈과 장난치며 보낸 언 손과 발이 흐물 해지는 느낌이었다. 노곤해질 무렵 차창 밖은 다시 도시의 불빛들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시내에 도착할 때 즈음 함께 기차 여행을 갔던 일행 중 한 명이 근처에서 맥주를 한 잔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오늘 겪은 일이 너무 재밌고 좋아서 그 순간을 고대로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맥주에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로 추억을 가져가고 싶었다.

호텔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와 과자를 사들고 왔다. 그러고는 티브이에 나오는 개그쇼를 보았다. 개그쇼보다 오늘의 일들이 더 재밌었다. 사진첩을 보다 보니 다시 또 웃음이 나왔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동안 나를 억누르고 있던 보이지 않던 쇠사슬이 모두 풀어지는 그런 순간. 함께 웃던 그 순간. 비에이에 가는 기차 여행이 내 인생의 그 첫 번째 쇠사슬을 끊은 곳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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