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 내 삶에 가져다준 것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지 벌써 8년이 되었다. 학부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이후 브랜드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러다 4년 차에 브랜드, 마케팅과 같은 사회과학 학문에 많은 관심이 생겼고 그 길로 홍익대학교 광고홍보학과에서 브랜드 매니지먼트 세부 전공을 하게 되었다. 총 5학기였고 2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공부라는 게 때가 있고 배움이 있을 때 집중해서 공부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기에 휴학 없이 논문까지 한 번에 모든 과정을 마쳤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체력적으로 쉽진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배움에 따라 내가 알던 세상이 점차 확장되는 것을 느낄 때 순간순간 참 기뻤다. 특히 브랜드 마케팅에 대해 심도 깊게 연구했던 것이 의미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정신적으로는 즐거웠던 대학원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학기인 논문 학기가 되었을 땐 상황이 달라졌다. 괴로움이 종종 찾아온 것이다. 논문을 쓰는 것은 절대적으로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9-6로 본업을 하면서 어떻게든 논문을 쓰는 시간을 확보해야만 했다. 퇴근 후 3-4시간을 논문에 할애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때 야근도 정말 많았고 회사에서 정말 많은 이벤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잠드는 날도 정말 많았고 주말엔 거의 논문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논문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만은 되진 않았다. 연구모형과 가설을 세우고 인구 통계학적인 특성에 대해 분석하고 척도에 대한 타당성, 신뢰성, 가설 검증을 모두 해야만 했다. 내 논문의 경우는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가설검증을 해야 하는 것이라 더욱 골치가 아팠다. 더욱이 지도교수님의 스타일이 통계학적 부분에 특화되신 분이셨기에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은 전혀 없었다. 시간 날 때마다 교수님 연구소를 찾아가서 연구모형을 수차례 바꿨다. 논문 주제를 바꿀까? 일본인 가설검증 사례를 없앨까? 등등의 끊임없는 고민을 했지만 결국은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논문을 완성했다. 논문 발표 날을 하루 앞두고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발표준비를 한창 마무리하고 있었을 때 할머니 부고 소식을 들었다. 너무 슬펐다. 하지만 그땐 졸업 논문 발표도 중요했기에 바로 병원으로 갈 수 없었다. 대신 논문 발표날에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발표 순서를 앞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정신없이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할머니가 계신 장례식장으로 뛰어갔다. 할머니 부고 소식을 들은 대학원 동기들도 발표를 마치고 모두 병원으로 찾아왔다. 이때 대학원 동기, 언니 오빠들과 정말 친하게 지냈었고 여전히 연락을 하고 지낼 정도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고맙다.
그렇게 병원에서 할머니의 빈소를 3일 동안 지켰다. 발표를 하며 들었던 교수님들의 코멘트에 따라 논문을 수정해서 제출해야 했다. 주어진 수정일 마감일이 빠듯했기에 장례식장에서 시간이 될 때마다 상복을 입고 비닐이 씌워진 기다란 테이블 구석자리에서 논문을 수정했다. 계속해서 슬픔이 몰려왔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그게 맞았다.
결국 논문 심사는 다행히도 한 번에 통과가 되었다. 인쇄를 마치고 논문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정말 기뻤다. 논문 책을 들고 할머니 산소에 가서 보여드렸다. 할머니도 기뻐하셨겠지?
돌이켜 보면 이땐 논문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논문을 써서 네이처에 게재할 것도 아니었고. 졸업할 때 교수님께서 박사 과정을 권유하셨지만 나는 실무에서 더욱더 경험을 쌓고 싶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거절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모른다. 또다시 어느 날 갑자기 공부에 불이 붙는 날이 오고 박사과정을 공부하게 될 수도 있다.
논문이 내 삶에 가져다준 것은 엉덩이를 붙이고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튼튼한 엉덩이 근력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때 글쓰기의 근력이 생겼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무엇이든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다. 나의 소중한 엉덩이에게 노고를 바치며...
아무도 보지 않지만 영원히 남는 논문
‘모바일 메신저 이모티콘의 특성이 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한·일 비교연구’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8583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