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헛소리만 하고, 나한테 여지 주는 말만 하더라고."
연애 예능 ‘나는 SOLO’ 속 한 여성 출연자의 대사다. 같이 데이트한 남성 출연자가 자신이 다른 여성 출연자에게 더 호감이 있다는 솔직한 마음을 숨기고, 플러팅하는 모습에 실망해 분노하며 하는 말이다.
도대체 ‘여지’가 뭐길래 이 여성을 분노하게 만든 걸까.
남녀 관계에서 ‘여지’란 애매한 가능성을 남기는 말과 태도를 의미한다.
“이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걸까?”, “왜 이렇게 애매하게 행동하지?”
와 같이 확신을 주지 않는 상대의 태도는 불안을 만들고, 상대의 말과 행동 속 빈틈을 스스로 해석하려다 불필요한 오해와 감정 소모를 낳는다.
그런데 ‘여지’가 꼭 나쁜 걸까?
인간관계, 특히 남녀 관계에서 애매함은 혼란을 만들지만, 예술의 영역에서는 창조성을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작가가 모든 걸 설명하지 않고 일부러 남겨둔 여백은 관객이 스스로의 경험과 감정으로 채우며 작품을 완성하게 한다.
김정운은 책 <창조적 시선>에서 같은 쇼팽의 피아노 곡도 듣는 이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건반악기인 피아노는 본래 음과 음이 완벽하게 이어질 수 없기에, 그 사이의 빈틈이 청중의 해석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주자가 남긴 빈틈을 청중이 채우며, 피아노 연주는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완성하는 음악이 된다.
이 원리는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정운은 사진처럼 실물을 완벽하게 재현한 그림이 아닌 뭔가 부족하고 어색해 보이지만, 관객들이 직접 해석하게 만드는 인상주의 그림이 사람들을 더욱 몰입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폴 세잔의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예로 드는데, 이 그림 속에서 식탁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바구니는 정면에서 본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이 기법은 관객이 그림을 한 가지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불완전한 구도를 남겨둠으로써, 관객은 그 어색함과 불편함을 스스로 보완하며 작품을 해석한다. 이때, 그림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관객들과 상호작용하는 경험이 된다.
최근 KBS <추적 60분>에서는 영유아기부터 시작되는 과도한 사교육 열풍을 조명했다. 단순한 놀이조차 ‘학습’으로 포장되고, 부모들은 아이에게 ‘공부의 여백’이 생기지 않도록 계획표를 짠다. 이제 고작 4살, 7살이 된 아이의 하루는 완벽한 커리큘럼 속에서 ‘배워야 할 것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지금의 교육은 마치 빈틈없이 짜인 건축의 도면처럼 채우기에만 급급하다. 아이 스스로 해석하고 완성해 갈 수 있도록 남겨두어야 할 여지는 점점 사라진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도 전에 먼저 틀리지 않는 법을 익힌다. 질문을 던질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생각하는 힘보다 정답을 외우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의미를 찾을 여지는 점점 사라져 간다.
이 모든 현상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불안해 아이를 더욱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리라.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불안한 부모가 쌓아 올린 촘촘한 교육 커리큘럼 속에서 불안할 틈조차 허락받지 않는 아이는 결국 불안을 감당하는 힘을 기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답이 사라진 순간,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스스로 불안을 감당해 본 적 없는 이들이다.
아이의 인생이 더 풍성하게 채워지길 바랄수록 완벽하게 짜여진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채워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전 세계는 AI 혁명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고, 한국은 의대 열풍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변화 속에서 부모로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 깊이 생각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