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관한 생각

밟아, 지혜의 숲으로!

처음에 관하여 - 운전

by 무서이

처음이란 건 꼭 20대 초반,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새로울 게 한창 많은 때가 아니더라도

다행히 서른세 살이 되어서도 계속 튀어나온다. 따라오는 설렘과 걱정도 마찬가지.


나의 경우 유독 일에서 처음들을 겪는다.

1년쯤 지속하고 있는 인스펙션(검정)이라는 일은 마치 세상 모든 유형한 것들에 대해 검사를 해내버리고 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팀에 와 처음 배웠던 검정의 대상은 과일과 농약, 이후 석탄과 곡물로 확장되더니, 최근엔 경험치가 전무한 온갖 유형물에 대한 검사문의가 늘고 있다. 선박에 중량물을 싣는 트레일러 장비와 기름 저장 탱크에 대한 검사를 준비하고 있고, 맙소사- 돼지 농장에 모돈과 자돈이 몇 마리씩 있는지 세는 일을 유튜브 보면서 공부하고 있다. 약 9,800 마리가 있을 거란다. 처음 하는 검정이라도 일단 가능합니다, 내뱉고 나서 공부를 시작하는 식인데, 참으로 대단한 우리 인스펙션팀이다.(긍정적인 표현 아님. 그렇지만 심한 부정은 또 아님.) 세상에는 별 일이 다 있고, 내가 뭘 하고 사는 건가 싶다.


일에서는 늘 머리 아픈 처음을 마주한다면, 오늘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행복한 처음을 만났다.

해보기 전에도 좋을 줄이야 알았지만 혼자 하는 드라이브가 이런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동반한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익숙해질 것이고 금방 지겹다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굳이 나눈다면 나는 앞으로도 운전을 좋아하는 편에 속할 것만 같다. 올해까지 운전을 가능하게 해 두어라, 하는 회사대표의 지시로 7년 묶은 면허증을 들고 운전연수를 받았었다. 역시 나를 움직이는 것은 강제성인가. 연수 후에는 나름대로 법인차량으로 저 멀리 삼척도, 근처 과천도 다녀온 화려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드디어 오늘 나 홀로 운전을 떠나본 것이다. 9시간 무료렌트 쿠폰의 유효기간 마지막 날에.


내 목적지는 오래전부터 파주출판단지였다. 루트는 지혜의 숲에 도착해 글을 써보다가, 아르디움카페에 가서 다이어리 구경을 하고, 가본 적 없는 북카페를 찾아서 그놈의 트레일러 장비 도면을 공부하는 것. 그리고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 긴장했는지 간밤에 잠을 설쳤고 늦잠을 잤다. 아침 8시 차 없을 때 출발하자는 계획은 무너졌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출퇴근시간마다 연수해 본 경험으로 브레이크 위에만 발 올리고 둠칫둠칫 기어가는 건 익숙했으니까.

첫 30분은 음악 들을 생각도 없이, 내장된 네비 화면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음성에만 의지해 움직였다. '잠시 후라니 어디야, 여기야?', '그다음은? 빨리 말해봐 어디야!' 네비를 잔뜩 다그치면서 어찌어찌 서울을 벗어났다. 그리곤 드디어 노래를 틀었다. 요즘 다시 듣는 오지은 노래 중 빠른 박자 위주로, 그리고 선우정아, 박찬영, 새소년.


이거구나!

혼자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드라이브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지혜의 숲 앞에 야무지게 주차를 한 후 시동을 끄고 나니 비실비실 계속 웃음이 났다.

내부는 난방을 거의 안 하는지 좀 추웠고, 이전에 썼던 눅눅한 글들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다시 차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또 피식피식 웃었다. 자유를 느꼈다.

자, 연스럽고 유, 유한 강물처럼 쭉쭉 뻗어있는 것 같은 그 자유! (이진아-awake의 가사)

어디든 훨훨 날아갈 것 같고, 멀리 여행 온 것만 같은 기분.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도 아주 멋진 기분이 든다는 것, 괜히 민망해져 누리지 못하면 금방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알아서 마음껏 들뜨고 행복해했다. 그리고 다행히 까먹지 않고 되네인다, 안전운전, 안전거리.


사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동네 근처에 다 와서 몇 번이나 길을 헤매야 했다. 강변북로에서 빠지는 갈림길이란 도대체가... 저 길이 곧 내 길이다, 알면서도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차선변경은 아직 최대 2번밖에 안된다고. 초보운전이 좀 돌아가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겨우겨우 차 반납시간을 맞춰 출발지로 돌아왔다. 102km 운전에 진이 다 빠졌고, 행복감은 예상대로 금방 휘발되었다. 그러므로 남겨둔다, 행복한 오후였고, 멋진 첫 혼자 드라이브였다. 이제 또 언제 어디로 가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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