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여름은 가만히 있어도 덥지만, 특히 장마철이 시작되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그날은 아르바이트가 있던 날. 물기를 가득 머금은 여름 공기 속으로 한 발을 내딛자마자 난 지치고 말았다. 아마 그날이 특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날씨처럼 반갑지 않았던 그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던졌던 농담 때문일 것이다.
호텔 레스토랑의 정직원인 그는 친절한 듯 까탈스럽고 조금은 무례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가 유학생이라 쉬워(?) 보여서 그랬던 걸까. 실수하지 않으려고 긴장하며 일하던 내가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너 이건 알아?' 하는 표정이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그 사람이 나에게 사적인 대화를 걸어오다니.
"그런데 말이야, 일본에 살면서 매일 한국 음식 해 먹어?"
"아, 가끔요. 일본 음식이 입에 맞아서 꼭 그렇진 않아요."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 그래? 뭘 할 줄 아는데?"
"肉じゃが(고기감자조림) 정도."
"대단한데! 남편한테 사랑받겠는걸? 일본에서는 그거 만들 줄 알면 결혼해도 되거든."
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웃음만 지었다.
'뭐지, 이건?'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이 들었지만 농담으로 넘기기로 했다. 껄끄러운 사람이 한 말이라는 것만 빼면, 한국에서도 어른들에게 들을 수 있는 '칭찬의 말' 이기도 했으니까. 예를 들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나 뭐 그런 것들을 할 줄 안다고 하면 '시집가도 되겠네~' 하는 느낌?
肉じゃが(고기감자조림)는 일본 가정식을 찾아보면 정말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다. 불고기용 정도 두께의 소고기와 뚜걱뚜걱 썰어 낸 감자가 주인공인 국물 자작한 조림요리. 색감을 예쁘게 내어주는 당근과 양파, 줄기콩은 빛나는 조연이다. 마치 불고기 같지만 감자의 존재감이 세고, 장조림 같지만 너무 반찬스럽지 않은 메뉴다.
달큰한 간장 국물에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는 뜨거울 때 바로 먹어도 맛이 좋지만, 시간을 두고 먹어도 매력적이다. 메인 요리로도 좋지만 반찬으로도 그만인 데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두고는 안주로 먹기에도 딱! 이 정도면 팔방미인 아닐까.
어찌 보면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진 건 진심일 수도 있겠다. 자취하는 유학생이 제 나라의 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요리를 해 먹는다니. 그것도 일본의 엄마 손 맛 스테디셀러인 메뉴를... 난 말 한마디로 내가 한 고기감자조림 맛도 보여주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이다. (맛을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그 이후로 장마철 날씨는 나의 게으름을 부추겼고, 아쉽지만 얼마 가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이젠 그의 얼굴도 이름도 희미하지만, 고기감자조림을 할 때면 여전히 그 어색한 농담은 참 선명해진다. 그 때의 껄끄러웠던 감정은 자작한 국물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감자처럼 사라져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