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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Apr 23. 2023

추억의 조각


솜바지와 공짜 떡국


뉴욕에 처음 와본 건 2001년 12월 31일이다. 대학교 학점 인정 프로그램(네 달 일하면 급여와 3학점을 준다)으로 미국 버몬트 주 스키장일하러 온 지 두 달 된 무렵이었다. 비행기도, 스키장도 처음이었다. 출국 일주일 전, 120V 전기장판을 사러 서문시장에 다녀온 엄마는 "이거 스키바지 맞겠재?" 하며 솜이 든 방수바지를 장바구니에서 꺼냈다.


디지털카메라가 있으면 얼리어답터였던 라떼 시절, 특별하다면 특별한 20대의 첫 뉴욕 여행을 추억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실마리가 되어줄 인증샷 하나 남아 있질 않으니. 다만 몇 가지 번쩍하는 장면들이 다.


춥고, 외롭고, 영어도 힘들어 움츠러들었던 겨울이었다. 같이 일하던 한국 애들이 타임 스퀘어의 신년 전야제를 보러 뉴욕에 가자고 했다. 차가 있는 몇 없는 한국인 중 설득된 한 명의 차를 얻어 타고 네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휘황찬란한 전광판들이 내려다보는 타임 스퀘어는 이미 사람들로 빼곡했고 스피커가 쾅쾅 울려 혼이 빠질 것 같았지만, 송구영신 특유의 분위기에 나도 오랜만에 들떴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몇 시간쯤 서있었던가, 드디어 11시 59분, 사회자의 선창을 따라 나도 크게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Three, Two, One... Happy New Year!!!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탑에서 공이 떨어지고 불꽃은 밤하늘로 솟아 올라 터지며, 포옹과 키스와 점프와 박수와 환호 거리를 가득 채웠다. 고개를 젖히니 흩날리던 색종이가 코끝에 눈처럼 내려앉았다.


행사가 끝나자 삽시간에 사람들은 흩어졌다. 우리는 숙소가 없어서 현장을 치우는 청소차들 사이를 배회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날이 밝은 후 발길이 멈춘 곳은 코리아타운의 어느 곰탕집 앞. 입구에 <설날 무료 떡국>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몇 달 만에 먹는 국물과 김치에 감격하며 허겁지겁 그릇을 비웠다.


그 중 유일하게 아직 연락하는 친구와 얼마 전 카톡을 하다 동의를 구하듯 이 얘기를 꺼냈다. "그때 식당 사장님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한게 아직도 마음이 쓰이네. 진짜 감동이었는데" 친구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공짜 앞에 장사 없네. 벌써 그 얘기 열 번째다?" 소~름. 처음 얘기한 거 아니었어? 나이가 들면 자꾸 자기가 기억하는 얘기만 계속하게 된다던데...


2023년 타임 스퀘어 전야제에서는 BTS의 제이홉이 축하공연을 했다. 난 TV로 봤다.



시티 뷰와 화재 경보


2023년 4월 6일. 아이들과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내렸다. 우영우 아빠를 닮은 한인 택시 기사(김밥 대신 쉑쉑 버거를 추천했다) 우리를 타임 스퀘어 숙소에 내려줬다. 프런트 직원은 내게 31층 카드키를 건넸다. 록펠러 전망대 입장료를 아끼고자 미리 고층 방을 요구한 결과다. 방에 들어서니 나 같은 숙박객의 보챔을 달래려는 듯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담은 시티 뷰가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에 기대어 6번가에 차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걸 <내려다보니> 가슴에 약간의 자부심이 펄럭이는 듯했다. 길바닥에서 벌벌 떨며 밤을 새웠던 내가 이 비싼 동네에 체크인하다니! 그것도 애를 둘이나 데리고... 성공이 별거냐!


동시에 불편하고 불안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불편 = 이렇게 누려도 되는 건가? 불안 = 괜히 애들한테 더 큰 세상을 보여준다는 둥 설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미국은 매일 총기사건이 일어난다!)


갑자기 화재 경보가 울렸다. 헉, 뭐지? 지금 나가야 되나, 여기 엘리베이터 최악이던데...괜히 고층을 달라고 했나 힝. "엄마! 우리 탈출해?!" 집중해서 빨리 결단해야 하는데 애들이 호들갑을 떠니 더 당혹스럽고 짜증이 났다. 복도로 나가보니 옆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자연스러운 공포와 일말의 안전불감증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데 안내방송이 나왔다. "잘못된 화재 경보입니다. 비상 상황이 아닙니다". 예의 없는 , 간 떨어뜨려놓고 사과도 안 하네.


딸내미는 금세 폰을 들고 아빠에게 페이스톡으로 숙소 투어를 시작한다. "여기는 침대가 있고~ 이 쪽은 화장실이고~ 창 밖으로는~" 나도 영상통화를 하는 애들의 모습과 창 밖 사진을 찍었다.


어느덧 나도 슬로어답터에서 <호모 Photo쿠스>로 진화했다. 앞으로 며칠간 사진을 수백 장 찍겠지. 집에 돌아가면 여행기도 몇 편 써보겠지. 사진도 글도 대부분 엄마의 시선이겠지만 그 속에서, 먼훗날 너희들도 세월이 몰아낼 기대와 감격과 흥미진진(때로는 실망과 당황과 기진맥진)의 기억들을 몇 개라도 건지길 바란다. 너희의 첫 뉴욕 방문에 엄마가 함께 하게 되어 기뻐. 우리 안전하게 다니자.


Marriott Residence Inn  31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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