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첫째 아이의 생일이 다가왔다.
우리 집으로 친구들을 부를 순 없고 마음 같아선 점핑룸 같은 실내놀이터를 예약해 반 아이들 전체를 초대하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가장 문제였고 시설 예약부터 음식 주문에 파티 내내 호스트 역할까지 할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다.
'고학년도 부모들이 생일파티에 같이 올까? 부모도 부모지만 애들이 하는 말을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을까?'
'혹시라도 애들이 트램펄린에서 뛰어놀다가 다치면 어떻게 하지?'
'몇 명이나 올까? 설마 초대했다고 반 애들이 다 오면 어떻게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반 아이들 전체를 초대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친한 친구 몇 명과 함께 게임룸 같은데라도 가는 게 어떻겠냐고 슬쩍 아이의 의향을 물어봤다.
하지만 그것도 평일은 다들 시간이 안될 것 같고 주말엔 우리가 여행을 갈 계획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아이는 막상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려니 자기도 아직 편치만은 않은지 이번 생일은 그냥 가족들과 보내고 싶다고 했다.
뭔가 나의 커다란 숙제를 덜어준 것 같아 고맙기도 했지만, 어쩌면 다시없을 기회를 그냥 넘어가는 게 아쉽기도 했다.
게다가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냐고 물어보니 원래 이번 생일에 개통하기로 한 핸드폰은 미국에 오게 되는 바람에 어차피 못 받고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어서 이번 선물은 안 받고 내년에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킵해두겠다고 했다.
친구들과 생일파티도 안 하고 생일 선물도 안 받겠다니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생일이 되었다.
평소에는 아침식사로 간단히 토스트나 과일정도만 먹고 가지만 생일 아침엔 미역국이 국룰인지라 갓 지은 쌀밥과 미역국을 준비했다.
얼마 전에 갈비탕을 끓이면서 육수를 잔뜩 내어두었더니 미역국의 맛이 한층 깊고 진했다.
"엄마, 진짜 맛있어요. 이렇게 낳아주시고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예쁜데 말도 예쁘게 하는 녀석 같으니라고.
꼬꼬마였던 아가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그래, 아무리 조용히 지나가는 생일이라도 파티 기분은 내야지!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집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 생일장식을 시작했다.
HAPPY는 지난 핼러윈에 벽에 붙여뒀던 해피 핼러윈을 재활용하고 크리스마스 때나 쓸까 해서 세일코너에서 샀던 금박 장식들을 붙였다.
마침 둘째 아이가 친구 생일파티에서 받아 온 스마일 풍선도 아직 바람이 빠지지 않고 건재했다.
톤 앤 매너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총망라됐지만 오늘 저녁 생일파티에 기분낼 정도로는 충분했다.
아이에게 먹고 싶은 음식이 뭔지 물어보니 엄청 커다란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한국 방송에서 본 돈스파이크의 거대한 스테이크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바비큐가 아니라 그 맛을 따라갈 순 없겠지만...... 그래, 크기만큼은 따라가 주마.'
마트를 돌며 더 큰 거, 더 큰 거를 찾아 우리 네 식구가 먹고도 남을 크기의 거대한 스테이크 덩어리를 찾아냈다.
간단히 마리네이드 한 후 프라이팬에 바싹 굽고 오븐에 넣어 천천히 속을 익혔다.
아무래도 처음 도전해 보는 크기에 시간 조절을 잘 못해서 미디엄 레어를 좋아하는 우리의 입맛엔 살짝 오버쿡 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비주얼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우와, 이거 다 제 거예요?"
"어디 다 먹을 수 있으면 다 먹어봐."
"당연히 먹을 수 있어요! 엄마, 정말 돈스파이크 스테이크랑 똑같아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 줘서 고맙네.
다 못 먹어도 행복하다며 처음 보는 비주얼에 잔뜩 신이 난 아이와 함께 즐거운 우리만의 생일파티가 시작되었다.
MS언니네 놀러 갔다가 너무 맛있어서 얻어온 멕시칸 소스까지 곁들이니 미슐랭 최고 맛집이 부럽지 않았다.
미국의 베이커리에서 파는 생일케이크들은 정말 맛이 없어 보였다.
7~80년대에나 먹었을 법한 버터크림으로 잔뜩 장식된 퍽퍽한 케이크는 색상이나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H마트에 안에 있는 뚜레쥬르에는 한국과 똑같은 케이크들이 판매되고 있었는데, 아이는 그것도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가 초코브라우니 만들어주시면 안 돼요?"
안될게 뭐 있니, 네가 먹고 싶다는데.
게다가 여긴 베이킹 천국 미국이란다.
그저 시판 가루를 사다 우유랑 슥슥 섞어서 오븐에 굽기만 하면 되는걸.
마트에서 판매되는 브라우니 파우더의 종류만 해도 열개가 넘었다.
그동안 열심히 만들어 먹어본 결과 어떤 흑인 아주머니가 그려져 있는 제품과 기라델리의 제품이 가장 찐득하고 우리 입맛에 맞았다.
지금까지는 미니미니한 컵 케이크 사이즈로 만들었지만 이번엔 생일 케이크이니까 집에 있는 가장 큰 그릇에 믹스 두 개를 쏟아붓고 큼지막하게 구웠다.
디저트 타임에 딱 맞춰 오븐에 구웠더니 저녁 식사 내내 온 집안에 퍼지는 달콤한 냄새가 식욕을 더욱 돋웠다.
그동안 생일초는 케이크를 사면 응당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거라 특별히 숫자초를 살 때 빼곤 생일 초를 사 본 적이 없던 것 같은데...
어찌 됐든 거금(?)을 들인 생일초까지 사서 꽂고 나니 근사한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브라우니는 따뜻할 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는 게 최고지만 아쉬운 대로 휘핑크림과 함께 디저트까지 완벽한 생일 저녁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스테이크도 케이크도 최고로 맛있었다는 아이를 보며 고마우면서도 왠지 짠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친구들 초대 못해서 아쉽지 않아?"
"여행 갔다 와서 같이 놀면 돼요. 그리고 다음 달엔 크리스가 생일파티 한데요. 점핑장에서요."
"네 생일파티가 아니잖아."
"어차피 점핑장에서 노는 건 똑같은데요? 누구 생일이 무슨 상관이에요. 게다가 공짜잖아요. 헤헷."
그래. 네가 진정한 승리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