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끄적거림

Time, the good place

백수로서 주어진 풍족한 시간에서 행복의 의미 찾기

by 모라키무

The Good Place, 나의 최애 미드

회사를 그만둔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그 간 많은 곳도 다니고 이벤트도 많았다. 그리고 정신없던 가족 행사를 거쳐서 엄빠 집에서 늘어지게 자고 아무것도 안 하는 빈둥거리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세 달만 있으면 더 이상 한국에 남아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일말의 양심이 작동해 넷플릭스를 자막 없이 보거나 영어 공부법 영상들을 찾아보곤 한다. 요 며칠 동안 본 영어 공부법 영상에서는 '미드 쉐도잉'을 하도 추천하길래 유우-명한 'Friends'를 틀었으나 정 붙이기에 실패했다. 나의 짧은 영어 실력으론 그들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배경으로 깔리는 관객들이 웃음소리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기분이 별로였다. 자막을 켜면 웃고 자막 없인 도저히 같이 웃을 수가 없어서 다른 드라마를 찾아 나섰다. 친구가 'Parks and Recreation'을 추천해줘서 Wavve에서 봤는데 그건 자막 지우기 기능이 안 되었다. 내용이 겁나 웃겨서 애써 자막을 외면하며 웃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눈이 자막에 쏠려서 완벽히 알아들을 때까지 아껴두기로 했다.


https://www.denofgeek.com/tv/the-good-place-season-4-news/

역시나 종착점은 'The Good Place'. 내 n년 간의 넷플릭스 시청 사상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다. 시즌도 네 개 밖에 없어서 다시 돌려보기 좋고 싫은 캐릭터 하나 없는 모두가 사랑스럽게 그려져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단순히 재밌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이유부터 선과 악에 대한 상대성과 절대성, 삶에서의 진정한 행복의 의미까지 철학적인 고민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에 나의 최애 시리즈를 다시 돌려보면서 쉐도잉 하기로 했다.


시즌 1,2,3는 두 번 정도 봤는데 시즌 4는 처음으로 돌려봤다. 쉐도잉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틀었지만 또 너무 재밌어서 밤새 보다가 마지막화까지 봐버렸다. 자막을 없애고 보긴 했지만 쉐도잉은 하다 말았고 특히 Jason의 말은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다. 미국 가서 Jason처럼 말했다간 왕따 당할지도 모르겠다. 시즌4를 끝내고 자막으로만 느꼈던 나의 벅찬 감정을 영어로만 들으니 배우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색달랐다. 한국어 자막으로 볼 땐 '우와 드라마 잘 만들었다'라고 생각했다면, 영어로 듣고 나니 나의 삶에 접목시켜서 생각이 많아지게 만들었다.


Time, the good place we have been looking for

https://uproxx.com/tv/good-place-finale-take-it-sleazy/
This is what we have been looking for since the day we met, 'time'. This, what the good place is, not even a place, really just, having enough time with people we love.

'영원'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침대에 누워서 석양을 바라보는 순간, 진정한 이곳이 The Good Place라는 깨달음을 주었던 순간, 결국에 우리가 찾아 헤맸던 것은 '이 시간'이라는 점을 Chidi와 Eleanor는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단순히 '영원'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이미 앞선 회차에서 말해주었다.


결국에 그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서, 절대 선과 절대 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던 시간들은 결국에 이 하나를 깨닫기 위해 달려왔을지도 모르겠다는 Chidi의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굿 플레이스에서 사람들은 어디엔가 얼이 빠져있고 Chidi의 여러 윤리 롤모델 중 Ὑπατία(히파티아, 헤파티아, 흐파티아 중에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었지만 결국 패티라고 부른...)를 만났음에도 너무 오랜 시간 이곳에 있어서 brain 이 foggy 하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새롭게 Good Place의 architect이 된 Michael과 Eleanor를 비롯한 인물들은 고민 끝에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문을 하나 만들어준다. 즉, 무엇이든 가능한 파라다이스에 '유한함'을 부여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파라다이스에서 얻은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시간은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 끝이 있기에 지금이 소중하고 함께 있을 수 있기에 더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마지막 회차를 보면서 왜 나의 백수로서의 제주도 여행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입사 후에 주야장천 떠났던 해외여행이 어느 순간 '여행 중 하나'로 묶여버렸는지에 대한 해답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인생 두 번째 한라산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차를 탁송 보내서 내려갔던 제주도.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안의 침대에 누운 순간, '왜 나는 여행을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퇴사를 하면 다들 여행을 간다더라'의 명제에 딱히 반기를 들기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 갈 수 있는 여행지 중에서 가장 만만했던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꼽기 힘들지만 그냥 갔다. 잘 곳도 있었고 타고 다닐 내 차도 있었고 아직 휴가 중이라 돈도 벌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때와 별다를 것 없는 여행의 조건이었지만 딱 한 가지, '끝맺음'이 없었다. 그땐 아직 나의 미래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마음대로 있고 싶으면 있어도 되었다. 그 무한함이 결국에 소중한 하루하루를 소중하지 않게 만들었다.


'하루에 최소한 한 군데라도 가자'라는 생각으로 오전 11시쯤 느지막하게 일어나 집에서 밥을 차려먹고 나갔다. 제주도의 물가는 생각보다 비싸서 매 끼니를 사 먹기엔 부담되었기 때문에 간단한 된장국이나 전 날에 먹다 남은 음식을 데워서 먹는 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집이 중문 근처였기 때문에 걸어서 색달 해수욕장을 가거나 오름을 걸으면서 생각정리를 했다.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을 느낄 때면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이러한 광경을 이 시간에 볼 수 있음에 감사해하며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결국 나의 거취가 결정 나지 않은 상황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4년 4개월을 쳇바퀴 같은 삶에 질렸다 생각한 나였지만 생각보다 내일이 결정되지 않은 순간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느낌은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아우 출근하기 싫어'를 밥 먹듯이 외치며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놀았지만 '내일은 뭘 하지?'라는 생각은 주변에서 딱히 반겨주는 발언은 아니었으므로 속으로 되뇌면서 혼자 불안해했다. 유학이냐 이직이냐의 갈래에서 이직의 선택지가 자연스레 사라졌을 때도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해했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것도 나에 대한 불확실성이 준 우울감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3주 간의 제주도 여행이 나에게 준 선물은, 나를 다시 한번 믿고 나가보자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어찌 보면 간절함 없던 여행이 이제는 한 번 새로운 세상을 나가보라고,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소중한 여행의 시간마저 간절하지 않게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살아보라는 설렘을 주었다. 휴가가 주는 소중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긴 휴가를 다녀와도 결국 이렇게 빨리 질려버릴 성향이라면 아예 환경을 바꿔 버려서 새로운 세상에 나를 던져 넣어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https://thesciencesurvey.com/arts-entertainment/2019/11/24/the-good-place-too-good-to-stay/


그렇게 방황하던 5월은 어느덧 마무리가 되어가고 6월 달은 비자 준비와 기숙사 준비로 바쁠 것 같다. 매일매일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노력(?)은 해보겠으나 계속해서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길을 새는 바람에 잘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많은 시간 속에서 엄빠와 함께할 시간의 유한성에 대해 좀 더 간절해져 보기로 했다. 8월 중순이면 샌프란시스코로 떠나 버릴 딸내미와 맛있는 밥 한 끼라도 먹고 싶어 하는 엄빠와 더 맛있게 밥을 먹어보려 한다. 더 많이 기록하고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끝은 아니지만 지금 주어진 시간이 언젠가는 미래의 나를 지탱해줄 시간임이 분명하기에 더 소중하고 감사히 여기는 자세를 갖기 위해 오늘도 기록한다.


배경 이미지 출처: https://thegoodplace.fandom.com/wiki/Chapter_1:_Everything_Is_Fine?file=101.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올해의 영화 <헤어질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