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끄적거림

올해의 영화 <헤어질 결심>

<알쓸인잡> 정서경 작가님 편을 보고서

by 모라키무

둥이가 <헤어질 결심>을 3회 차 관람한다길래 도대체 얼마나 멋진 영화이길래 그렇게까지 영화관에서 보나 싶어 따라갔다. 그리고 며칠 전, 미국 영화관에서 <헤어질 결심> 3회 차를 달렸다.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따라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알쓸인잡>에 정서경 작가님이 나온 편이 알고리즘으로 떴다. 이전에도 <알쓸 XX>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정서경 작가님까지 나온다니 안 누를 수가 없었다. 순서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정서경 작가님이 <알쓸인잡>에 나오셔서 했던 말 중에 '헤어질 결심은 자연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였다'라는 말과 '서래가 엄마를 죽였던 그 순간 이후에 누군가와도 헤어질 수가 없었던 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헤어질 결심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럴 수가 없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한 서래. 어쩜 이 영화는 작가님의 말씀 한 마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동영상 클립에도 모든 영화를 되새기게 하고 감상에 젖게 만든다.


작가님은 <헤어질 결심>을 자신이 쓴 시나리오 중에서 자연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하셨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는 말, 마음이 가는 대로 한다는 말일까. 나는 늘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어 했고 최대한 나의 충동(?)에 충실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무엇인가에 꽂혀서 해야겠다 싶으면 어떻게든 이뤄냈던 것 같다.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가끔은 너무나도 솔직해서 그게 내 단점이 되기도 하고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특히나 미국에 와서 영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바람에 친구들을 웃기게도 했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No filter. 하루는 친구들이 술을 마시다가 내가 했던 얘기를 복기하면서 하하 호호 떠들면서 나를 표현해준 단어다. 영어가 짧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친구의 말을 통해 듣고 보니 그냥 내 성격인 것 같다. 결함이 곧 성격이고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말이 또 <알쓸인잡>에 나왔는데 필터가 없는 것이 나의 결함이자 성격이 아닐까.


오히려 나는 그 덕분에 친구들을 잘 사귀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기숙사 초반에 나의 외향성을 최대치로 끌어 써서 친구들과 대화를 했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매일 같이 밥을 해 먹다가 Bestie도 만들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나를 너무나도 닮은 친구와 찐친이 된 덕분에 영어도 많이 늘고 미국 생활에서의 외로움을 많이 덜었다. You are so funny라는 말을 친구가 할 때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더라?' 생각해보면 대부분 거침없이 내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냈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직은 그래도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영어로 다 표현되진 않지만 계속 이렇게 솔직하게 떠들고 표현하다 보면 계속해서 나의 사전에 나와 어울리는 단어를 담을 수 있겠지.


Imposter Syndrome이라는 단어가 있다.

Impostor syndrome, also known as impostor phenomenon or impostorism, is a psychological occurrence in which an individual doubts their skills, talents, or accomplishments and has a persistent internalized fear of being exposed as a fraud.

우리말로는 '가면 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진행하는 워크숍 같은 데서 Q&A로 빠지지 않는 것이 imposter syndrome을 겪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묻는 질문이다. 그 질문과 답변을 들을 때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를 많이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떠올려 보면 아마 입사 초반에 일할 때 항상 웃으면서 듣기 싫은 말에도 받아치지 못했던 그때가 나도 가면 증후군을 겪었던 때가 아닐까 싶다. 불행히라면 그 가면 증후군 때문에 건강을 잃었지만 다행히라면 그 이후로 다시는 가면 증후군을 겪지 않을 것 같다. 뭐든지 잘하고 싶었고 누구에게나 잘 보이고 싶었던 시절, 나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만 곁에 있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나의 첫 사회생활에서 이해가 안 가는 것 투성이었다. '합리적'이라는 단어가 '전통'이라는 단어로 뭉개지는 곳.


그리고 정작 내가 극도로 싫어했던 이유는 그런 짜증 나는 상황이 매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달 말일에 한 번, 약 2주 간격으로 돌아오는 충동적인 번개 그리고 약 분기별로 발생하는 내일이 없을 것 같은 회식. 매일 나를 괴롭히는 일이 발생하면 역치라도 높아지지만 무탈히 보내던 일상을 잠깐씩 깨뜨리는 이 순간이 매일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갖가지 이유로 빠지려는 시도를 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엇이 그렇게 스트레스였냐'라고 물으면 에피소드가 한 두 개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그때의 힘듦을 축소화시키는 것 같아서 어이가 없다. '아니 회식을 이렇게 갑자기 하는 게 어딨어요~ 앞으로 저희 회식은 일주일 전에 공지하는 것으로 룰을 만드시죠'라든지 '저는 앞으로 당일 잡히는 번개는 참석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운동과 개인 스케줄이 있어서 이틀 전이나 하루 전에 때리면 고민해 볼게요'라든지 식의 대처법을 이제는 떠올릴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괜히 동기방에 욕 한 바가지 하면서 갑자기 만들어진 메신저에는 '저는 운동이 있습니다....'라며 죄책감에 젖은 채로 찝찝하게 퇴근하는 것이 아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헤어질 결심>으로 돌아와서, 내가 이토록 이 영화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자연을 잘 표현한 영화'에서 imposter syndrome까지 생각을 뻗치게 하는 영화라니. 3회 차를 볼 때는 갑자기 헤어진 옛 연애가 생각나서 다시금 봐야겠다 생각이 들었고, 2회 차를 달릴 때는 서래의 관점에서 다시 영화가 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은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나의 성격과 결함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라니 참 신기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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