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방학 시작 룰루
대학원 인생에서 맞는 첫 봄 방학이 시작됐다. 마침 <더 글로리> 파트 2가 공개되어 새벽 5시 반까지 보고 대충 자고 일어나 나머지를 다 보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챙겨 먹고 자리에 앉아 유튜브에 들어가서 무엇을 봐볼까 하던 와중에 보게 된 "이대남 이대녀". 지난해 대선을 겪고 한국을 떠나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한국에서의 젠더 이슈가 향수처럼 다가오면서도 깊은 공감을 하고 있는 세대로서 진지하게 시청을 완료했다.
가벼운 얘기부터 꺼내자면 또 '이대는 동네 북인가' 싶었다. 한 인터뷰이에게 '이대녀'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같은 것을 물었는데 처음에 "'이화여대'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이대에 페미니스트가 많으니 그런 여성들을 칭하는 말인 줄 알았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여기서 이화여대가 왜 나와~!" 하면서도 자료 영상에 귀퉁이만 나온 ECC를 볼 때 반가움이란.
이 프로그램에는 총 여섯 명의 20대 여자, 20대 남자가 나온다. 3대 3으로 2박 3일 동안 펜션에서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인 인터뷰와 토론을 벌이게 된다. 처음에는 요새 유행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KBS에서 벤치 마킹한 건가 하면서 잉? 하면서 봤다. 하지만 첫날에 카톡 오픈 채팅방에 익명으로 넣는 기획을 보자마자 "프로그램 신박하기 기획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어색하기도 하면서도 연합 동아리 MT 가는 것처럼 버스에 앉아서 하하 호호 떠들다가 익명의 채팅방에 넣자마자 커뮤니티에서만 보던 상황이 연출된다. 근거 있는 짤이냐부터 시작해서 군무새, 남성 혐오, 여성 혐오 등등 핫한 주제를 던지자마자 열기가 달아오르는 상황이 시작되고 30분 만에 급하게 마무리하고 PD님이 여성방, 남성방에 들어오셔서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짧게나마 인터뷰를 진행한다. 다음 날, 이제는 익명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실제로 여섯 명이서 그 주제에 대해 얘기해보기도 하고 여성, 남성을 모아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한다. 뭔가 48분 밖에 되지 않는 시간에 후루룩 담아버려서 급하게 끝내버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좀 더 길게 제작되었어도 재밌었을 것 같다. 하지만 출연자 보호를 위해서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또 다른 한편에서 들기도 한다.
여성으로서 저기 나오는 세 명 중에 나와 누가 가장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보았던 것 같다. 20대 후반을 향해가는 지금, 나의 20대는 젠더 갈등과 젠더 이슈가 정말 핫한 주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20대 초반에 갓 서울에 올라와 세상을 깨치기 시작하는 시기에 강남역 살인사건과 박근혜 탄핵과 같은 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하지 못하는 이슈를 직접 맞닥뜨리면서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회사에 입사해서 눈에 보이는 차별과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직접 겪고 화도 내고 억울해하기도 하면서 20대 중반을 보냈다. 여전히 이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여성에게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로서도 회사에서 마주한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면서 이 대한민국의 가부장제와 사회 제도가 왜 계속 이렇게 갈등만을 부추기는 것인지 더 여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왜 이렇게 차별하느냐에 분노하고 화를 냈다면 회사 생활을 하면서 왜 사회는 이런 방향으로밖에 흘러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커졌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퍼져있는 편견과 회사 생활에서 굳어져버린 인간상이 오히려 두 성별 모두가 고통을 겪는 그런 현상 낳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 하나만 화낸다고 바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짜증 나고 화난다고 스트레스를 받아봤자 근본적으로 시스템이 바뀌지 않고 정책이 변하지 않으면 나는 그저 한낱 푸념만 늘어놓는 사람이 될 뿐임을 몇 년 만에 깨달았고 그 무력감이 나를 한국을 떠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 중반에 보면 한 분이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분에게 정말 깊이 공감했던 것 같다. 방송 장면을 보면 여성 두 분이 프레임을 반반씩 나뉘어서 둘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20대 초반의 분노하는 나에게 20대 후반의 내가 그렇게 너무 몰아서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봐보자고, 그러다 너무 무너져버릴까 봐, 아예 희망을 잃을까 봐 걱정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왜냐면 진짜 그러다가 무력감에 빠져서 아예 희망을 잃어버리면 이 사회의 변화의 희망은 아예 사라져 버리니까 말이다.
대선 즈음을 생각해 보면 정말 젠더 갈등은 정점을 찍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댓글 창을 닫아놓고 뉴스를 보기도 했고 인터넷이 너무 심각해서 친구들이랑 정치 얘기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 한국 정치 얘기가 나오면 그 짧은 영어로 나의 의견을 설명하고 최대한 한쪽에 치우쳐지지 않은 채로 설명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정치성향만을 드러냈다가는 한국에 대한 인식을 오히려 왜곡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양쪽 입장을 최대한 같은 양으로 다루려고 하고 나의 의견은 최대한 배제한 채 정보를 전달해 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나의 노력이 오히려 나의 생각을 공고하게 다지게 만드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미국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풀어서 설명해 주고 나의 의견을 물어볼 때면 내가 가진 생각을 차근차근 설명해주기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갖고 미래에 생각하는 모습은 어떤 양상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나씩 쌓아 올라갈 수 있었다.
다큐를 보면서도, 한국에 살면서도 20대들이 이렇게까지 싸우는 것에는 억울함이 큰 이유인 것 같다. 당연히 존중받고 존중해야 하는 서로를 얼마 쥐어지지도 않은 밥그릇을 서로 못 뺐어서 안달 난 철없는 취급받는 것을 말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청춘을 갈아 넣었음에도 조롱받는 것이 당연히 억울할 것이며, 여태껏 남자들이 일하던 사회에서 고위 관리직 비율을 한 자리에서 두 자리로 늘려 나가고 몇 십 년 만에 첫 리더 탄생을 아직까지도 기념하는 이 사회도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 확실하다. 한 인터뷰이의 말처럼 담론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서로 날이 선다는 말처럼 아직 우리 사회는 젠더 이슈에 대한 접근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오래간만에 정말 재밌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나에게 생각할 거리도 많이 쥐어주었고 약간의 희망을 남겨주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라 뜻깊었다. 여전히 나의 시각은 지협적이고 주관적이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서로 이 잘못된 사회 좀 제대로 바꿔보자고 한 뜻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이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 같이 행복하자고 뜻을 함께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싶다.
참, 글을 쓰면서도 느끼지만 이 모든 생각은 내가 미국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남얘기처럼 할 수 있는 것임을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