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개강을 일주일 앞둔 심정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엄마와 패키지로 미국 여행을 일주일 정도 하고 혼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막상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오니 진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차분하게 공항을 걸어 나왔다. 걷는 걸음걸이마다 물가에 깜짝깜짝 놀라지만 그래도 지금, 미국에 살러 왔다는 나 자신을 응원하며 기숙사로 향했다.
내가 가져온 캐리어는 총 4개였다. 이민 가방, 30인치, 24인치 그리고 기내용 캐리어까지. 수하물로 부쳤던 짐들은 모두 23kg 정도였고 기내용은 대략 잡아도 10kg는 됐었다. 이 캐리어들을 우선 2층인 내 방에 넣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다음에는 4시간 정도 짐 정리를 했던 것 같다. 사실 짐은 엄마가 다 싸줬기 때문에 이렇게 엄마가 꼼꼼하게 싸놓은지 몰랐다. 캐리어를 열 때마다 엄마의 정리 능력에 감탄하면서 짐 정리를 했다. 이 물건들 다시 갖고 나갈 때는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3년 동안은 그럴 일이 없기 때문에 잠시 그 생각은 넣어뒀다.
2022년 8월 12일 금요일에 기숙사에 도착했고, 오늘은 8월 17일이니까 약 이 기숙사에서 5일 정도를 보냈다. 문득 오늘 학교에 걸어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성격이 많이 유해진 것 같다!
사실 아직은 정말 우당탕탕 미국 정착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뻘 짓을 많이 하고 있다. 교통수단도 안 익숙해서 하루에 3만보씩 걷거나, 물건을 사놓고 슈퍼마켓에 그대로 두고 와서 다시 찾으러 간다거나, 카페테리아에서 주문도 제대로 못해서 맛없는 풀때기만 먹는다든가 그런 소소한 뻘짓을 많이 저지르고 있다.
회사에 다닐 때만 해도 정말 사소한 흠집 하나가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한다거나 누군가가 말 한마디 잘못한 것 때문에 며칠씩 기분이 꿀꿀할 때도 있었다.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도 잠시 화장실에 가서 화를 식히고 온다거나 메신저로 동기들과 욕을 퍼부을 때도 있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을 비교한다면 굉장히 스스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누군가가 건드리면 날이 선 것처럼 반응했던 것이 과거였다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의 연속이라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신기해서 화낼 일이 없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교환 학생 길에 오를 때는 일기를 몇 장 씩이나 썼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스위스행 비행기에 앉아있는 게 믿기지 않아서, 해외 생활을 스스로 해내 보는 나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걱정이 돼서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프랑스어로 살아가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 외국에서 밥은 어떻게 해 먹지, 친구 못 사귀어서 방 안에만 있다가 오면 어떡하지 등등. 그때는 심지어 남자 친구도 있는 상태였어서 이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았었다.
그렇게 향수병도 세게 맞고 마치 외줄 타기 하던 심정으로 해외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니 그곳에서 내가 정말 정신줄을 놓고 살았구나 깨달았다. 같이 갔던 언니에게 미안해서 진심으로 사과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아직까지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1년 뒤 떠났던 스웨덴 해외 인턴십에서도 22살의 나와 23살의 나는 딱히 변한 게 없었던 것 같다. 늘 무엇인가 불안하고 안 익숙하고 낯설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굉장히 차분하게 흘러가는 내 인생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그때의 교환 학생 생활도 해외 인턴십도 내가 선택한 것이었지만 석사 유학과의 차이점은, 그때의 경험은 '꼭 해야 하는 일'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불어불문학과니까 꼭 교환 환생으로 해외에 나가서 프랑스어를 늘릴 것, 취업을 위해서는 꼭 인턴십을 할 것. 꼭 해야 하는 것이라는 틀 안에서 내린 결정이었기에 그곳에서의 인생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한국에서의 나는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었고 경제적이 로든 사회적으로든 나의 인생에는 딱히 모자람이 없었던 것 같다. 가끔은 풍요로움 덕분에 재미없어진 인생에 이벤트를 만들고자 유학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란 생각도 해본다. 새로움이 없어진 인생이 재미가 없어서 환경을 확 바꿔버린 그런 결정이랄까!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고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리고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인생이 이렇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4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신입 사원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너무 외로워서 혼자 방 안에서 펑펑 울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넋 놓고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깨달은 것은, 결국에 인생은 외로울 수밖에 없고 그 누구도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고 연인이든 친구든 나에게 즐거움과 행복감을 주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과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것이고 외로운 나를 잘 달래 가며 혼자 잘 살아내면 그만인 것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아직은 피상적인 인간관계로 점철된 이곳에 딱히 불만은 없다. 영어도 막 잘 안나오고 대화에 막 끼지도 못하지만 한 3일 연속 마주치고 나니 얼굴과 이름도 매칭이 된다. 딱히 그들에게 잘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지 않고 이 기숙사에 폐 끼치지 않는 선에서 요리해먹고 할 수 있는 만큼 받아치고 새로운 학기를 시작해 낼 준비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침착하고 평안함이 나이가 든 것은 아닐까란 생각도 했다. 오늘 문득 공원을 걷다가 2015년 제네바 대학교 교환 학생 때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던 Juan이 생각나서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최근에 대화를 나눈 게 2019년인 것을 보니 3년 동안 서로 소식도 모르고 바쁘게 살았다. 이 나이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니 우리가 함께 보냈던 기숙사 생활이 생각난다며 안부차 연락을 보냈다. 시차 때문에 아직 대화가 마무리되지 못했지만 Juan이 거기에도 crazy spanish guy(=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가 있냐고 물어봤다. 그래, 그때는 진짜 재밌게 잘 지냈는데, 이제는 그렇게 놀라고 해도 못 놀 것 같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얼마나 내 석사 생활이 힘이 들지, 아니면 행복할지. 보통 공부하는 것은 외롭고 힘들고 당장이라도 집어치우고 싶은 거라고 하지만 어찌 됐든 아직은 시작 전이고 지금의 느낌을 남기고자 글을 쓴다. 웬만한 가전과 생필품이 갖춰지고 나니 풍족한 마음이 들고 뿌듯함 마음이 들어서 오늘은 잠을 꽤 잘 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