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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J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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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디 Sep 09. 2024

더 많은 게이가 필요해


애인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어. 친구한테 재밌는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았다며 애인이 같이 보자고 하더라고. 우리는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댔어.


영상은 불륜 남녀의 대화로 시작돼. 남자는 셔츠를 열어젖힌 채 소파에 누워 있고, 여자는 란제리만 입고 서 있어. 섹스를 하고 난 직후인 듯해. 남자가 여자에게 물어. “자기야, 우리 또 언제 봐?” 여자가 답하지. “왜 이래, 나 며칠 뒤에 결혼하는 거 몰라? 자기 쿨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봐?” “재밌네? 나 Y야.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3류 막장 드라마 같은 대사들에 살짝 어지러워질 쯤, 여자가 휴대폰을 보더니 호들갑을 떨어. 다음 날 오기로 한 약혼자가 집에 거의 다 왔다는 거야. 잔머리를 굴리던 여자는 대뜸 남자에게 말해. “너… 너 지금부터 게이야. 알겠지? 너 게이야, 게이.” “뭐?!”


약혼자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남자 구두를 발견하고 윽박을 질러. 그러고는 거실에서 남자와 여자를 대면하지. 여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말해. “어, 오빠 왔어? 어… 그… 나 호주 유학 할 때 게이 친구 Y. 전에 말했었지? 게이야 게이. 아 맞다, 오빠 게이 처음 보지? 이렇게 생겼다? 우리 게이. 으흐흐흐… Y게이야, 인사해. 내 약혼자야.” 약혼남은 분노를 터뜨려. “게이?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 내가 지금 그 말을 믿을 거 같애?!” 그때 Y게이가 약혼남에게 다가가 볼에 뽀뽀를 해. 굳어 버린 약혼남에게 요염한 손짓을 하고 앙칼진 목소리로 말하지. “화내지 마요~ (약혼남 어깨 찰싹 치며) 나 무서워. (여자를 향해) 자기야, 연락할게. 어머 근데, (약혼남 어깨 세게 치며) 남자친구 너무 괜찮다. (다시 여자를 향해) 기집애 남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구…” Y게이가 약혼남의 오른쪽 가슴을 터치하자 약혼남은 황급히 급소를 가려. “귀여워.” “아쉬워라.” “다음에 남자친구도 같이 봐요.” “같이 보자구…” 음흉한 눈빛으로 연달아 쏟아내는 Y게이의 폭격에 약혼남은 맥을 못 추리지. Y게이가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구슬픈 기타 선율이 흘러.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며 영상은 끝나. 내가 말했어. “재미없다.” 애인이 말했어. “그치. 나도.” 


그날 이후 영영 잊힐 줄 알았는데, 자꾸 영상이 머릿속에 맴돌더라. 곱씹을수록 기분이 나쁘더라고. 그래, 나를 비롯한 많은 게이가 Y게이 같은 손짓과 말투와 목소리를 가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처음 본 남자 볼에 뽀뽀를 할 만큼 몰상식하진 않잖아. 아무렴 맘에 드는 남자를 보았대도 함부로 가슴을 만지거나 음흉한 눈빛을 보내지도 않지. 모든 게이가 Y게이처럼 생기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게이’ 하면 떠올리는 편견들의 집합체인 Y게이가 나는 대체 뭐가 재밌는지 이해를 못 하겠더라고.


영상은 두 달 전에 업로드돼 조회수가 380만을 넘었고, 댓글은 4300개 이상 달렸어. 전부 호평 일색이더라. “정말 유명한 Y게이의 탄생” “전설의 Y게이의 시작” “2탄 빨리 준비해 줘요 Y게이” “완벽한 게이 연기가 커뮤에 퍼져서 구독하고 갑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미 Y게이에게 매료돼 있었지.


Y게이가 등장하는 영상은 세 편 더 있었어. 그 안에 게이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가 대체 얼마나 많던지! 다 쓰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 같으니 화룡점정인 4화 내용만 간략히 추릴게. 3화에서 Y게이는 헬스장에서 동생에게 운동을 가르쳐 주다가 약혼남과 불륜녀를 우연히 만나. 아니나 다를까 다시 게이 연기를 펼치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 동생은 “두 분도 알 건 알아야지.”라며 기어코 부모님에게 오빠를 아웃팅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엄마는 Y게이에게 잠깐 앉아 보라며 말해. “괜찮아. 네가 어떤 성향이건. 그냥 솔직하게 말해. 엄만 괜찮아.” 그러나 아들이 입을 떼려고만 하면 엄마는 감당이 안 되는지 펄쩍펄쩍 뛰어. 답답했던 아빠가 안방에서 나와 아들을 향해 소리쳐. “니 게이가!” “네?” “니 게이가! 니가 Y게이가!” 불륜을 숨기기 위해 게이인 척했다고는 차마 못 하겠는지 Y게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해. “아, 아버지!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게 Y게이… 아니, 게이예요. 제가 부랄 달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다들 4화는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했는지 댓글 창은 온갖 혹평으로 도배됐어. 다만 나처럼 Y게이를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어. “Y게이 이미지만 소비한 느낌” “Y게이 제발 아껴 쓰세요” “Y게이의 실감나는 게이 연기가 웃긴 건데 그런 연기는 1도 없고 그냥 광고를 위해 대충 찍은 느낌” 하나같이 Y게이를 소중히 여기는 의견들뿐이었지. 


나는 진심으로 걱정돼. Y게이의 “실감나는 게이 연기” 때문에 사람들이 게이는 다 Y게이 같다고 생각할까 봐. 내가 너무 과민한가? 하지만 약혼남처럼 게이를 본 적 없는 사람들, 나아가 게이는 자기 세상에 없을 거라 여기는 이들에겐 가능할 일일지도 몰라. Y게이로 게이를 배운 그들의 머릿속에 우린 이렇게 새겨지겠지. 남자만 보면 야릇한 얼굴을 하고 음탕하게 구는, 감히 “부랄 달고 그런 짓” 하는 족속들.


J, 너도 유튜브를 자주 보니? 한국 영상들도 많이 봐? 그렇다면 2~3년 사이에 한국 게이 유튜버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알 거야. 연예인, 인플루언서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영상도 유튜브에 수두룩하지. 굉장한 변화라고 생각해. 자신이 게이임을 드러내는 용감한 이들이 더 많아질수록, 그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닿을수록 거대한 벽에 서서히 균열이 날 거라고 나는 믿거든. 다만 조회 수가 높은 영상들을 보면 대부분 제목이 자극적이야. “게이들이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는 이유” “하네스만 입고 남자친구 유혹해 보았더니…?!” “게이의 군대썰 ㄷㄷ” 사람들이 게이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지. 그럴 만도 해. 당사자인 나조차 저렇게나 자극적인 제목들에 끌리거든. 재밌으니까. 스스로 “끼스럽다” 칭하는 유튜버가 이쪽 썰을 맛깔나게 풀면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치고, 반쯤 헐벗은 남자들끼리 야릇한 포즈를 취하면 도파민이 싹 돌아. 그렇지만 현실의 우리가 그렇게나 고자극적이기만 한 존재들은 아니잖아. 평범, 그 대단한 가치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웃고 말하고 사랑하고 살아가기도 하지. 이토록 다채로운 우리라는 사실이 더 알려져야 더 많은 이들이 깨달을 거야. 게이가 Y게이는 아니라는 걸. 


애인에게 전화로 Y게이 영상을 다 보고 난 불쾌감을 토로하며 덧붙였어. “요즘은 어린 애들도 유튜브 많이 보니까 Y게이 본 애들 많을 거 아냐. 그게 제일 걱정돼. 게이에 대해 잘 모르는 애들이 이제 ‘게이’ 하면 Y게이부터 떠올릴까 봐.” 애인이 한숨을 쉬더니 얼마 전 중학생 남자애가 다른 애 보고 “이 새끼 게이 같애!”라고 소리치는 걸 들었다고 하더라고. “이 새끼”라고 지목된 아이를 보니 피부가 희고 왜소한 게, 꼭 자기를 보는 것 같았대. 애들한테 기집애 같다고 놀림당하던 그 시절의 자신을.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중학교 2학년 때의 내가 떠올랐어. 수학 학원 수업 시간, 결혼을 앞둔 선생님에게 축하의 박수를 쳐 주던 남자애가 손을 번쩍 들고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지. “선생님! 얘는 나중에 남자랑 결혼할 거 같아요!” 교실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고, 나도 아이들을 따라 애써 웃었어. 하지만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요동치는 걸 막을 순 없었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를 불러내 엉엉 울었어. 그때 난 내가 게이인 줄도, 게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는데 그 말이 수치스럽다는 것만큼은 명확히 알았던 것 같아. 과거의 애인을 닮은 그 애도 알지 않을까? 다른 애가 소리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게 얼마나 커다란 상처인지. 


내년에 개정되는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 ‘성소수자'라는 단어가 제외된대. 성소수자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길 없는 아이들은 Y게이로 게이를 알게 될지 몰라. 그럼 Y게이와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아이들은 쉽사리 놀림감이 되겠지. 그러니 세상엔 더 많은 게이들의 이야기가 필요해. 너에게 보내는 이 비루한 편지 또한 쓰임이 있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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