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어. 지난 번에 말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쪽인 Y랑 말이야. 우린 지금까지 둘이서 해외 여행을 세 번 다녀왔어. 스무 살엔 방콕을 3박 4일 동안 돌아다녔고, 스물다섯 살엔 한 달 가까이 북미를 한 바퀴 돌았지. 그리고 서른하나가 되어 베트남 사파와 하노이를 5박 6일간 여행했어. 둘이서 미국 얘기를 하도 자주 해서인지 그사이에 6년이 흘렀다는 게 참 신기하더라고.
스물다섯 살에 Y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어. 우리는 주에 한두 번씩 긴 전화 통화를 하며 서로의 근황을 공유했지. 어느 날 Y가 내게 제안을 하더라고. 북미를 같이 돌아보는 것 어떻겠냐고. 처음엔 망설였어. 그때 난 푼돈 밖에 없는 대학생일 뿐더러, 해외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는 건 다른 삶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여긴 우물 안 개구리였거든.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Y가 없으면, 이때가 아니면 앞으로 미국에 갈 일은 영영 없을 것만 같은 거야. 염치를 무릅쓰고 엄마 아빠한테 손을 벌려 뉴욕행 티켓을 끊었어. 우린 JFK 공항에서 반년 만에 재회했지.
뉴욕, 보스턴, 시애틀, 포틀랜드 거쳐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지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막을 내린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기 전, Y는 내게 동부와 중부 도시를 돌아다닐 계획을 짜 보길 권했어. 중동부에 몰려 있는 근사한 카페와 편집숍, 미술관들을 구경하는 건 전적으로 내 취향에 가까우니 Y는 내게 큰 기회를 준 거나 다름없었지. 한데 여행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고 천성이 게으른 나는 일정을 짜는 데 무지 서툴렀어. 하루하루 동선을 비효율적으로 짜 일과 중간중간 수정해야 했고, 강경 한식파인 Y가 힘겨워할 줄 모르고 유명하다는 브런치집을 하루에 한두 번씩 들르곤 했지. 그 탓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Y는 브런치 금지령을 선포했고…
그 뒤로 나는 혼자 대만을 일주일간 여행하기도, 애인이랑 일본 여행 가서 가이드가 되어 보기도 해서인지 베트남에선 꽤나 능숙한 여행자가 되어 있었어. 동행자에게 무자비한 일정을 전달하는 대신 매일 아침마다 Y와 상의하며 그날그날 계획을 세웠어. 비행기 티켓 발권과 숙소 예약을 맡은 Y의 수고에 보답하고자 셈도 잘 못하면서 환전에 총무 역할까지 자처했지. Y도 그사이에 나만큼이나 달라졌더라. 내가 짠 일정을 엑셀 표로 만들어 정리하던 스물다섯 때와 달리 이제는 그날 아침에 일정을 짜도, 상황이나 컨디션에 따라 세워 둔 일정을 바꾸어도 상관없는 유연한 여행자가 되었더라고. 그 덕에 우리는 사파와 하노이에서 한 번도 다투지 않았지.
애초에 우리는 하노이만 6일을 여행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사파라는 곳에 스위스 뺨치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숙소가 있다며 Y가 가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결국 사파에서 이틀, 하노이에서 나흘을 보내는 일정으로 바꾸었어. 탁월한 결정이었지. 사파는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였고, 무엇보다 하노이는 내게 조금 버거운 도시였거든. 살갗이 타들어 갈 것 같은 햇빛, 끊임없이 울려 대는 오토바이 경적 소리, 코끝을 떠나지 않는 매연 냄새, 거리에 널브러진 쓰레기, 가게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국숫집 사장님… 총천연색 하노이 풍경은 무지 아름다웠으나 이번 생에 한 번 보는 걸로 족하겠더라고.
여행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사파 숙소 테라스에서 Y와 나란히 빈 백을 깔고 앉아 눈앞의 풍경을 감상할 때였어. 맑은 하늘에 흰 물감을 아무렇게나 풀어 놓은 듯한 구름,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산과 논밭, 저 멀리 개미처럼 보이는 차와 오토바이… 문명의 손길이 얼마 닿지 않은 천국에 도착한 기분이었지. 우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따금씩 “와.” “어쩜 이래.” “미쳤다.” 같은 감탄의 말들을 주고받은 뒤 다시 조용해졌고, 정적을 깨고 제법 진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다시 침묵에 잠기곤 했어. 정적을 잘 못 견디는 평소의 나라면 어떻게든 대화 거리를 만들어 공백을 메우려고 애를 썼을 텐데, 그때는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 신기했지. 포틀랜드 국립공원에서 그림 같은 설산을 마주할 때도, 라스베이거스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넘어가며 절경 같은 평원을 내달릴 때도 나는 정적이 길어지면 금세 두려웠거든. ‘얘가 왜 아무 말이 없지? 혹시 내가 뭐 거슬리게 한 게 있나?’ 제 발 저리듯 초조해하던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안심하게 된 건 그사이 우리 사이에 자라난 어떤 믿음 덕이겠지. 설령 내가 실수를 했대도 우리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리란 걸 아니까.
이제야 말할 수 있어. 미국 여행을 할 때, 나는 Y에게 자격지심을 느꼈어. 사실 그때의 난 Y뿐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 느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눈에 보이는 누구라도 나 자신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무작정 깎아내렸어. 자존심은 더럽게 세서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고. 그렇게 이십 대 초중반을 보낸 것 같아. 원인을 파헤치자면 A4 5장을 쓰고도 모자랄 것 같으니까 그 얘긴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아무튼 미국이라는 넓고 낯선 땅에서 반년 만에 만난 Y는 내가 알던 Y와 사뭇 달랐어. 거처의 땅덩이가 넓어진 만큼 더 그 애다워졌달까? 원래부터 매사에 적극적이고 호기심 많고 열정이 넘치는 아이였는데, 미국에서 마주한 Y는 그 모든 장점이 곱절로 늘어나 있었지.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을 때 서슴없고, 우버 드라이버와 막힘없이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만큼 영어 실력도 아주 유창해져 있었어. 거기에 구글 맵을 한 번만 스윽 봐도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는 똑부러진 모습까지. 전부 다 내게는 부재한 자질과 능력이었기에 나는 Y 몰래 스스로를 나무랐어. 너는 왜 이 모양이니? 왜 우버 드라이버한테 사소한 인사조차 제대로 못하니? 왜 자꾸만 영어를 잘못 읽어서 식당 서버한테 팁을 두 배로 주니?...
그런 볼품없는 생각들이 내 안에 고여 있다가 결국은 Y를 향한 짜증으로 삐져 나오기도 했어. 가령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Y가 자신을 찍어 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나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굴었어. 결과물을 확인한 Y가 다시 찍어 달라고 하면 한숨을 쉬고, 내 사진을 찍어 준다 해도 죽상을 하고… 다시 없을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는 몰랐지. 어리석게도. 베트남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Y를 찍었어. 그 애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저기 좀 서 봐, 거기 그렇게 있어 봐 하며 그 애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어. 지난 시절 못나게 군 걸 만회하고 싶었나 봐. 결과물을 보고 만족해하는 Y의 얼굴을 볼 땐 오바마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분짜를 먹었을 때보다, 땀을 줄줄 흘리다 들어간 카페에서 망고주스 첫입 맛봤을 때보다 살짝 더 기뻤어. 친구를 바라보며 나를 의식하지 않는 즐거움을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아.
하노이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우연히 간 카페에서 만난 바리스타가 클럽 한 곳을 추천해 줬어. 글쎄 거기서 빅뱅과 투애니원 노래로 댄스 파티를 연다는 거야. 둘의 업적을 기리는 자리를 서울이 아니라 하노이에서 마련했다니! 우연이 물어다 준 희소식에 우리는 저녁을 먹고 밤 10시가 다 돼 갈쯤 클럽으로 향했어. 입구에 도착하니 검정 셔츠 입은 남자들이 우리를 가로막더라고. 파티는 9시에 끝났고, 지금은 예약자들만 입장이 가능하다면서. 아니, 명색이 파티인데 7시에 시작해서 9시에 끝나는 게 말이 돼? Y는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나는 아쉬움이 남아 슬며시 제안했지. “우리… 게이 바라도 갈래?” 찾아보니까 하노이에 게이 클럽은 없고 작은 바만 두어 개 정도 있더라고.
바까지 걸어가는 길, Y가 제안했어. “우리 투애니원 노래로 메들리 하자.” “좋아!” 한 명이 첫 소절을 부르면 다른 한 명이 옳다구나 하고 따라 부르는 식이었어. Can’t Nobody, I Love You, I Don’t Care, Fire, 내가 제일 잘 나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명곡들을 우리는 어제까지도 들은 애들처럼 막힘없이 부르며 걸었어. 30도가 넘는 열대야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사람들이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바에 도착하기 5분 전쯤부터 빅뱅 메들리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어째 빅뱅 노래들은 가사가 가물가물하더라. 우리가 게이임을 새삼스럽게 실감한 순간이었지.
바 앞에 도착한 우리는 들어갈지 말지 5분 넘게 고민했어. 바의 생김새나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시시해서 흥이 팍 식었거든. 숙소로 가기로 결심하고 돌아섰다가 ‘그래도 하노이까지 온 김에 하노이 게이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Y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어. 10초 만에 밖으로 나왔어. 물이 별로더라고.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숙소 쪽으로 걸으며 멈췄던 투애니원 메들리를 다시 이어 갔어. 그런 우리가 철딱서니 없는 애들 같기도, 진짜 어른 같기도 하더라. 미국을 여행하는 내내 게이 클럽을 쏘다닌 우리가, 물도 별로고 음악도 구리고 재미까지 없어도 잘생긴 백인이랑 뭐라도 해 보고 싶어 자리를 못 떠난 우리가 미련없이 돌아서는 삼십대가 되다니!
스물다섯에서 서른하나가 되기까지, 우리에게 생겨난 변화가 참 많아. 둘 다 1년 이상 연애를 이어 가고 있고, 각자 두어 곳의 직장을 경험했고, 서로의 줄어든 머리숱이나 늘어난 주름을 보고 더는 비웃지 않지. 변치 않은 것들 또한 있다는 걸 베트남을 여행하며 다시금 확인했어. 남들은 조금도 이해 못할 우리끼리의 밈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고, 배 아프게 웃으면서 “우리만큼 재밌게 노는 애들도 없겠지?” 하며 오만하게 굴고, 여전히 서로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슬쩍 짜증이 나다가도 말 같지도 않은 얘기에 금세 깔깔 웃고 만다는 거. 그렇게 우리가 서른하나고, 서른하나엔 뭘 해야 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같은 지긋지긋한 문제들은 잠시 잊는다는 거.
엊그제 Y가 사진을 한 장 보내왔어. 미국 여행 중에 같이 찍은 셀카더라고. 사진 속 우리 둘 다 너무 뽀얗고 앳돼 보자마자 감탄하는 동시에 슬픔을 느꼈지. 하노이에서 찍은 우리 사진을 보며 비교해 봤어. 6년이란 세월에 걸맞게 늙어버린 우리 모습에 조금 씁쓸해지더군. 그렇지만 다시 오육 년쯤 지나 이 사진을 꺼내 보면 우린 지금의 젊음과 생기에 똑같이 감탄하고 서글퍼하겠지? 그때 우리는 어디를 여행하고 있을까? 사는 동안 Y랑 여행하고 기록하고 추억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 참 괜찮은 인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다시 갈 일은 없으리라 확신한 하노이가 벌써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