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J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란디 Aug 05. 2024

그 애에 관하여


엊그제는 애인이랑 <보이프렌드> 마지막회를 봤어. 맞아, 지난 편지에서 내가 말한 일본의 게이 연애 프로그램. 나는 보다 말았지만, 애인은 신명나게 정주행을 하고 있었더라고. 그날이 마침 마지막 에피소드가 공개되는 날이었어. 결말이 어찌될지 궁금했기에 같이 보자는 애인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지.


마지막회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장면은 ‘료타'라는 출연자가 ‘카즈토'라는 출연자에게 고백을 하고 나서였어. 이 프로그램에선 출연자가 잘되고 싶은 사람과 합의 하에 함께 지낸 숙소인 ‘그린 룸’을 떠나면 커플로 성사가 돼. 합의에 실패하거나 합의할 만한 사람이 없는 출연자의 경우 홀로 떠나야 하고. 앞서 두 명의 출연자가 그린 룸을 홀로 떠난 뒤, 료타가 카즈토에게 잠시 단 둘이 대화를 나누자고 해. 료타는 이미 이전에 카즈토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어. 그 뒤로 마음을 접으려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 마지막으로 용기를 낸 거야. “지금도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고, 만약 네가 좋다면 같이 그린 룸을 나가면 좋겠어.” 


결국 료타도 그린 룸을 홀로 떠나. 카즈토가 아주 정중하고 상냥하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거든. 그런 카즈토에게 료타는 웃음기 띤 얼굴로(그러나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로) 말해. “고마워, 두 번이나 고민해 줘서.” 하지만 억누른 슬픔이 터져버렸는지 제작진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 그러고는 말하지. “제 마음속 중요한 기분을 제대로 전달해서 다행이고, 솔직함을 잃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친절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요. 그런 부분을 소중히 하고 싶어요. 후회없이 끝냈어요.” 나는 코끝이 시큰해진 채로 감탄했어. 끝까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상대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고, 후회는 없다고 말하는 그가 지나치게 멋져 보였거든.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는 걸 해 본 적 없는 겁 많은 나로서는 말이야. 


그때 애인이 화면을 정지하고 물었어. “형은 짝사랑해 본 적 있어?” “있지.” “몇 살 때?” “음… 21살 때부터 22살 때까지.” “아 맞다, 그 군인?” 군대에서 동기를 좋아한 적 있다고 내가  얘기한 게 생각났나 봐. “어떤 점이 좋았어?” 기습 공격 같은 질문에 어물쩍 넘어가려 했지만 애인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더라고. 자포자기하듯 말했어. “걔가 좋았다기보단 상황 탓이 컸던 것 같아. 동기 아무도 없이 막내 생활 한 달 넘게 하느라 엄청 힘들 때 걔가 왔거든. 그래서 더 의지하고 특별하게 느낀 게 아닐까?” 거짓말이었어. 사실 나는 걔한테 첫눈에 반했고, 걔를 향한 짝사랑은 22살에 전역하고 나서도 한참 지나 25살, 아니 26살, 어쩌면 27살까지도 이어진 것 같거든.


J, 너도 누군가를 짝사랑해 본 적 있니? 있다면 그 사람이 일반이었던 적은? 맞아, 내가 짝사랑한 “그 군인"도 일반이었어. 근데 정말 그랬을까? 네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 한번 들어봐.


처음 그 애를 본 순간이 또렷이 기억나. “야, 너 동기 왔다!” 복도에서 마주친 선임의 외침에 잔뜩 들뜬 채 생활관으로 달려갔어. 맨 앞 침상 위에 앉아 있는 그 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잠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K-드라마 속 클리셰가 현실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지. 새하얀 피부에 여드름이 달아오른 불그스름한 볼, 옅은 갈색 눈동자, 잔뜩 얼어붙은 자세... 그 애를 순식간에 스캔하며 생각했어. ‘뭐야… 귀엽잖아!’ 


다른 부대에서 얼마간 생활하다 전출을 오게 된 그 애에게 나는 우리 부대의 생활 방식에 대해 살뜰히 알려 줬고, 그 애는 나를 고분고분 따르며 점차 적응해 나갔어. 그 뒤로 동기들이 한 주 걸러 한 명씩 들어왔지만, 우리 사이는 유난히 친밀했지. 선임들이 사귀는 거 아니냐며 시시때때로 놀릴 정도로. 그때마다 나나 그 애나 멋쩍어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실은 나 역시 걔한테 묻고 싶었어.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야?” 그만큼 그 애는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지. 


그 애의 행동들은 정말이지 ‘비일반’적이었어. 생활관에 아무도 없거나 깜깜한 밤에 같이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면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거나 내게 팔짱을 꼈어. 종종 뒤에서 나를 끌어안아 놀래키거나 내 무릎을 베고 누워 하루 일과를 재잘대기도 했어. 그 애랑 살짝만 닿아도 몸에서 야릇하고도 난감한 변화가 생겨나는 탓에 나는 스스로에게 수시로 주문을 되뇌어야 했지. ‘이러지 마. 얜 그저 스킨십에 스스럼 없고 애교 많은 특이한 일반일뿐이야.’ 근데 얘가 자꾸만 나한테 칭얼대는 거야. 휴가 나가 있으면 공중전화로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자기 안 보고 싶냐고, 올 때 맛있는 거 사오라고. 그 애가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에 “여보야”나 “자기야”라고 써 있으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혼자 실실 웃기도 했지. 그러다 잔뜩 심각해졌어. ‘어쩌면 얘도 이쪽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굴 리가 없잖아…’ 그런 내게 그 애는 착각하지 말라는 듯 종종 전 여자 친구 사진을 보여 주거나 아는 누나랑 했던 첫 섹스 얘기를 자랑거리처럼 꺼냈지. 


그럼에도 그 애에 대한 의구심이 나날이 커진 건 그 애가 제멋대로 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 그 애는 전날 밤까지 같이 하하호호 떠들어 놓고 다음 날이면 나를 모른 체하곤 했어. 침상 위에 모로 누워 태평하게 TV를 보는 그 애에게 다가가 왜 나를 피하느냐고,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물으면 그 애는 계속 말을 돌렸지. “왜, 내가 게이 같아서 그래? 나랑 더 친해지면 너도 게이 될까 봐 그러냐?”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그때 난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지 얼마 안 됐고, 험난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그 사실을 영영 나만 알기로 다짐했으니까. 얼마 못 가 그 애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친구한테 털어놓으며 그 다짐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아무튼 느닷없이 차가워진 그 애 때문에 밤새 울다가 다음 날 다시 여름 해처럼 밝게 웃는 그 애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돌아오길 몇 번이고 반복했어. 나는 그 애의 종잡을 수 없는 변심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고통에 중독됐지. 오직 나한테만 멋대로 구는 게, 우리가 보통 사이가 아님을 증명한다고 믿었거든. 


그렇게 막 상병이 되었을 무렵, 그 애의 유해함을 더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결심을 했어. 갑자기 나를 모르는 척하는 그 애에게 더 이상 찾아가지 말기로. 무슨 일인지, 내가 뭐 잘못했는지 묻지 않기로. 그 애는 내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어.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냥 내가 다 잘못했다고, 내 앞에서 웃어만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누르고 두 달을 넘게 견뎠어. 어느 날 그 애가 먼저 다가와 사과를 하더라. 그동안 미안했다면서. 물론 그 애답게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진 않았지.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야?” 이번에도 묻지는 못하고 그저 웃으며 그 애의 사과를 넙죽 받아줬어.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애가 이쪽이건 아니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어도 상관없었으니까.


다시 그 애와 단란한 군 생활을 보내던 중, 기어코 그날이 오고 말았어. 그 애랑 같이 외박을 나가  술을 진탕 마시고 우리 집으로 돌아와 그만… 하고 만 거야. 술김에 다짜고짜 벌어진 일이었지. 근데 한창 달아오르던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 그 애가 자꾸만, 자꾸만 내 안에 넣으려고 하더라고. 내가 거부해도 손에 힘을 가득 실어 내 양 허벅지를 벌렸어. 아무리 쑤셔넣어도 실패인데 기어코 애를 쓰면서. 그제야 깨달았지. 이 몸짓에는 사랑이 없구나. 이 아이는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구나.


금방 잠든 그 애를 한참 동안 비참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방 밖으로 나가 거실 소파에서 뜬 눈으로 남은 밤을 지새웠어. 잠에서 깬 그 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더군. 부대로 복귀한 뒤 나는 그 애를 피하기 시작했어. 그게 더는 힘들지가 않더라. 역시나 그 애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지. 


우린 불가피한 순간에 어쩌다 한 번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지내다 전역을 했어. 그대로 걔에 대한 마음은 끝일 줄 알았는데, 그래야 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주에 몇 번씩 그 애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사진들을 넘겨 보면서 고민했어. 전역 축하한다고 메시지를 보내볼까, 그 김에 고생 많았다고, 나 사실 너 많이 좋아했다고, 여전히 그렇다고, 근데 네가 더러워할까 봐, 내 고백이 너를 더럽힐까 봐 용기낼 수 없었다고 말해볼까… 타자를 쳤다 지우길 수시로 반복하다 결국 포기했어. 그러고 3~4년이 지나 술에 잔뜩 취한 어느 날 그 애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지. 그 애는 받지 않았어. 콜백도, 메시지도 없었어. 얼마나 다행이야. 다음 날 이불을 발로 찰 기억을 만들지 않았으니.  


그 애를 길에서 마주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질리도록 좋아한 탓인지 가끔씩 부질 없는 상상을 해. 만약 그때 그 애가 내 전화를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내가 료타처럼 용기를 내 고백을 했을까? 그랬다면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였는지 알게 됐으려나? 그제야 나는 후회없이 끝을 냈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지난번에 얘기한 친구 Y랑 스물다섯 살에 둘이서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어. 뉴욕의 럭셔리한 편집샵들을 눈으로만 소비하고 문 닫힌 슈프림 매장 앞에서 아쉬워하다가 배가 고파진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근처 그리스 음식점에 갔어. 자리에 앉자마자 Y가 말했어. “야, 저 직원 개잘생겼다.” 뒤돌아보니 정말 그렇더라.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구릿빛 피부, 내 기억에 신화의 김동완을 닮은 듯한 서글서글한 인상까지. 게이라면 설레지 않기가 힘든 외모였지. 식사를 하는 동안 Y는 수시로 직원을 향해 힐끗거렸고, 다 먹어 갈 때쯤 내게 말했어. “나 저 사람한테 번호 주고 갈래.” “진짜로?” 이미 Y의 얼굴엔 고민의 흔적 같은 건 사라진 뒤였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어. ‘아무리 봐도 저 사람 일반인데…’ 


나는 먼저 밖으로 나가 있었고, 1-2분 정도 뒤에 Y가 나왔어. 직원이 아주 상냥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다더라고. 그 말을 전하는 Y의 얼굴을 잊지 못해. 조금은 붉어진, 그러나 후회 같은 건 하나도 남지 않은 개운한 얼굴. 나는 어쩌면 그런 얼굴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해 이렇게 구질구질한 글을 남기는지도 몰라.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은 겁이 나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