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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J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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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디 Jul 18. 2024

우리의 끼는 계속될 거야


J, 우리가 죽고 못 살던 초등학교 6학년 때로 잠시 돌아가 볼까?


내 앞에 네가 있어. 너는 체구가 작고 몸짓이 재빨라 꼭 아기 원숭이 같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너는 나와 친구들에게 쉴 새 없이 쫑알대거나 장난을 쳐. 우리가 방과후에 함께 다닌 수학 학원에서 너는 선생님에게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조용히 하라는 소리를 들어(물론 너랑 떠든 나도 마찬가지지). 선생님이 “이해 갔니?”라고 물으면 우리는 자체적으로 만든 멜로디를 붙여 북쪽의 합창단 아이들처럼 “이해 갔~어요~.” 하고 노래를 불러. 선생님이 짜증을 내면 우린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지. 정말이지 못 말리는 아이들이었어.


너랑 내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데는 우리가 보통의 남자애들과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던 게 한몫했을 거야. 우린 서로의 집에 놀러가면 온게임넷이나 ESPN 대신 온스타일을 틀고 미국판 <도전 슈퍼모델>을 보는 애들이었으니까. 다만 너와 나 사이의 극명한 차이라고 한다면, 그건 ‘끼’에 있었다고 봐.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미안하지만 넌… 타고난 끼는 참 부족한 아이였어. TV 속 모델들과 가수들을 흉내낼 땐 그저 흐느적거리만 해서 내가 낄낄대며 놀리곤 했지. 알지? 나 감히 평가할 자격 있는 거. 그때까지 나 정말 한 끼 하는 애였잖아.


시간을 앞으로 더 돌려볼게. 나의 끼 역사, 그 시발점에는 가족들이 있어. 우리 가족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연휴에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한 집에 열다섯 명은 거뜬히 넘게 모였어. 유치원생이던 나는 항상 거실에 발 디딜 틈도 없게 둘러앉은 식구들 앞에 서 있었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이정현 ‘와’나 엄정화 ‘몰라’, 코요태 ‘순정’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어(순정은 당연히 신지 파트를). 그때의 난 가수에 맞게 성대를 갈아끼우고 춤사위를 똑같이 흉내낼 줄 아는 제법 비범한 아이였어. 다만 전적으로 여자 가수에 한한 재능이었으니, 참 떡잎부터 남달랐지?


내가 재롱을 피우면 가족들은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고, 열띤 반응에 흥이 잔뜩 올라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더 거세게 흔들었어. 온 청중을 휘어잡고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 어른들은 머리를 쓰다듬거나 용돈을 주며 한마디씩 했지. “넌 정말 누구 닮은 거니?” “끼가 보통이 아니다 정말.” “나중에 가수 시켜도 되겠어!” 기대했던 반응에 어깨가 한껏 올라가면 어김없이 이런 말들이 날아왔어. “얘는 딸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고추 떼어야겠다!” 심지어 고모부는 춤추다 떨어진 거 아니냐며 손으로 직접 확인하기도 했지. 활짝 웃는 어른들 따라 나도 웃고는 있었지만, 동시에 의아해했던 것 같아. 어른들은 어떻게 웃으면서 이렇게 극악무도한 말을 하지? 고추를 떼라니. 그 말에 내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걸, 고추가 엄지보다 작은 나이인데도 알았던 것 같아.


나는 슬슬 어른들 앞에 서는 일을 피하기 시작했어. 앞으로 나오라고 할 것 같을 타이밍을 미리 캐치하고 자리를 은근슬쩍 뜨거나 자는 척을 했지. 대신 집에서 풀지 못한 끼는 학교에서 분출했어. 친구들은 춤 추고 노래하는 내게 어른들처럼 말하지 않았어. 그저 웃거나 신기해하거나 같이 춰 줬지. 간혹 “너는 왜 그렇게 여자애 같아?”라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상처가 되지는 않았어. 애들의 말간 얼굴에는 그저 호기심만 있을 뿐, 음흉한 의도 같은 게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거든.


너도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5학년 때 우리 반은 진짜 좀 특이했어. 그때는 격주 토요일마다 학교에 나갔어야 했잖아(쉬는 토요일을 ‘놀토’라 부르곤 했지). 우리 반은 그때마다 장기자랑을 했어. 책상과 의자를 전부 뒤로 밀고 교실 중앙에서 춤을 췄지. 나는 매번 남자애들이랑 슈퍼주니어 정도의 인원으로 팀을 꾸려 춤을 췄어(그때 춘 신화의 ‘Brand New’랑 장우혁의 ‘지지 않는 태양’은 지금도 동작이 어렴풋이 생각나). 무대에서 센터가 되진 못했지만 준비하는 동안 애들에게 동작을 가르쳐 주며 보람을 느꼈어. 말하자면 리더 포지션이었다고나 할까. 가끔은 여자애들이랑 혼성 그룹이 돼서 같이 출 때도 있었어. 한번은 이효리의 ‘애니모션(feat.에릭)’을 추기도 했는데, 나도 다른 남자애들처럼 에릭 포지션었지만 여자애들을 예의주시하며 속으로 되뇌었지. ‘그걸 그렇게밖에 못 추냐 이것들아… 내가 하면 훨씬 잘 출 텐데…’ 


우리가 같은 반이었던 6학년 때 그때의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찾아왔어. 새 학기 회장 선거 때였던 것 같아.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 선거에 출마했었는데, 글쎄 교실 맨 앞에 나가서 유세 스피치는 대충 하고 대뜸 춤을 춘 거 아니겠니. 이효리 ‘겟챠’의 댄스브레이크 파트를 췄어. 당시에 ‘시계 태엽 춤’이라고 해서, 이효리의 등에 태엽이 있다 치고 뒤에서 남자 댄서가 그걸 감는 듯한 제스처를 하면 이효리가 오르골 인형처럼 절도 있게 몸을 움직이는 춤이었지. 뒤에서 누가 내 태엽을 감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효리에 한껏 빙의해 춤을 췄어. 아이들은 나를 향해 박수를 쳐 주었고, 그 반응에 가슴이 벅차올랐지. 너도 그 모습을 봤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르네… 결국 나는 부회장이 되었지만, 부회장으로서의 추억은 어째 그때 춤춘 게 전부인 것 같아.


나의 ‘끼 전성기’는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막을 내렸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뀔수록 더욱 지루한 사람이 되어 갔어. 내가 사람들 앞에서 ‘여자 춤’을 시도 때도 없이 춘 애였다는 게 꼭 전생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지. 그건 상상만 해도 두렵고 부끄러운 짓이었어. “게이 새끼”라고 불리며 비웃음당한 경험이 어느 정도 누적되었으니까. 결국 나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끼를 참기만 하다가 부리는 방법을 까먹어 버린 거야. 슬프거나 억울하지는 않아. 끼를 향한 내 의지와 욕망은 딱 그 정도였구나 생각해. 그래서 걸스 힙합이나 보깅, 왁킹 같은 춤을 추는 남자들을 볼 때면 어떤 경외심마저 들기도 해. 그들이 이겨 낸 두려움 같은 것을 아주 조금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리하여 서른이 넘은 지금은 끼가 완전히 소멸돼 모두가 생각하는 알파 메일의 전형이 되었다,라는 전개를 기대했다면 미안. 끼라는 건 가히 본능에 가까워서 죽인다고 해서 죽여지는 게 아니더군. 나는 머리가 클 만큼 커 버려서 끼를 죽이지는 못해도 조절할 줄은 알게 되었어. 사회 생활 할 때는 최대한 얌전하고 차분하게 굴지만(‘남자답게’는 노력해도 안 되더라), 혼자 있거나 애인 혹은 친한 친구들이랑 놀 때 숨겨둔 끼를 마구 방출해. 그 실력은 초등학생 때 비하면 보잘 것 없으나 열정만큼은 가히 4세대 걸그룹 안 부럽지.


지금의 애인과 500일 넘게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 큰 것 같아. 우리는 서로에게 ‘여성스러움’을 숨기지 않아. 상대를 “공주”라거나 “퀸”이라거나 “빗취”라고 왕왕 부르기도 하고, 느닷없이 테크노 음악을 틀고 왁킹 배틀을 뜨거나 메간 디 스탈리언의 트월킹을 따라 하기도 해. 타고난 손짓과 몸짓과 말투와 걸음걸이를 숨기느라 갖은 애를 쓴 연애 초기를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지. 가끔 팬티만 입고 애인 앞에서 트월킹을 추곤 해. 내가 “정 떨어져?”라고 물으면 애인은 씩 웃으면서 “오히려 좋아. 더 해 줘.”라고 말하지. 추잡스러울 만큼 나다운 모습을 사랑스럽게 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으니, 이 얼마나 기적 같은 트월킹이야.


언젠가 애인이랑 서울역 근처 태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어. 무슨 얘길 하다가 애인이 빵 터져서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상체를 한껏 뒤로 젖혀 웃었는데,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고는 말하더라고. “어렸을 때 내가 이렇게 웃으면 고모부가 나한테 왜 이렇게 여자애같이 웃냐고 뭐라 했어. 그래서 나 웃는 법 고치려고 엄청 노력했잖아.” “어떻게 고쳤는데?” 내가 묻자 애인은 5초 정도 사색에 잠기더니 말했어. “그냥… 참았던 것 같아.” 내 눈이 아주 빠른 속도로 붉어지는 걸 애인은 보았을 거야. 마음껏 웃는 것마저 참아야 했던 어린아이를 생각하니까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


가끔 애인을 빤히 바라보면서 감탄하곤 해. ‘어쩜 이렇게 그대로지?’ 애인이 보여 준 어렸을 적 사진 속 얼굴이랑 지금 얼굴이 내 눈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거든. 특히 웃을 때 얼굴에 수줍음이 한가득 떠오르는 게. 그게 꼭 애인 안에 그때 그 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만 같은 어떤 증거처럼 느껴져. 나도, 너도 그런 증거 하나쯤은 갖고 있겠지?


저번 주말에도 애인이랑 코인노래방에 가서 4세대 걸그룹 메들리를 한바탕 불렀지 뭐야. 에스파로 시작해 뉴진스 거쳐 키스오브라이프까지. 어설픈 춤사위와 함께 끼와 흥을 마음껏 분출했어. 내가 나띠처럼 엉덩이를 흔드니까 애인이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마구 웃더군. 꼭 여자애처럼. 나는 바라. 애인이 쭉 지금처럼 여자같이 웃고 울고 걷고 말하고 행동하기를. 앞으로도 입을 다소곳이 가린 채, 어렸을 때 참았던 몫까지 마구마구 웃어 주기를. 나와 애인이 함께하는 동안, 우리의 끼는 계속될 거야. 


J, 너와 내가 한국에서 다시 만나면 같이 코노에 가도 좋겠다. 애인이랑 내가 얼마나 화끈하게 노는지 보여 주겠어. 그날은 ‘일반’마냥 발라드 열창하거나 랩하는 건 절대 사절인 거 알지? 너의 그 어설픈 끼를 내게 마음껏 보여 주라. 그럼 나는 마음껏 비웃어 줄 테니. 우리 그날만큼은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애들이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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