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것이 이타심의 마지막 조건이었다
우리는 간호사를 ‘돌봄’과 ‘헌신’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들은 가장 아픈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상처를 보듬고 일상을 회복시키는 치유자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해 온 진실이 있다. 그들은 아픈 세상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지만, 정작 자신의 아픔과 안위는 돌보지 못하는 가장 취약한 자리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다. 돌봄의 가치를 숭고하다고 말하면서도, '돌봄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지켜주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소리 없이 무너져간다.
아픈 마음을 돌보는 일을 사랑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현장을 떠나야 했던 사람, 영국에서 정신건강 전문 간호사로 일했던 Soraus(가명)다. 그녀의 이야기는 사회가 돌봄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소진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명의 간호사가 얼마나 위태롭게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Soraus는 영국 간호사로 일하며, 불안장애, 우울증, 조현병, 양극성 장애 등 마음의 병을 앓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했다. 그녀는 정신건강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낀 사람이었다. 그녀에 따르면, 영국 사회는 과거에 비해 정신건강 문제를 훨씬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예전에는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낙인(stigma)이 심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문제가 있을 때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이 매우 평범한 일로 받아들여지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변화 이면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편견의 벽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고용 시장에서의 차별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당신이 직장에 지원할 때 정신 질환이 있다고 굳이 밝힐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만약 밝혔을 경우, 사람들은 당신을 차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죠."
결국 사회적 논의는 활발해졌지만, 한 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낙인의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 그녀는 특히 남성들이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이며, 편견이 특정 성별에 더 무겁게 작용하는 현실도 지적했다.
Soraus가 간호사라는 직업을 떠나기로 결심한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의료진을 소진시키는 극한의 업무 스트레스와 번아웃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결국 퇴사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가장 먼저 그녀를 괴롭힌 것은 불규칙한 3교대 근무였다. "어느 날은 새벽 근무, 다음 날은 저녁 근무, 그다음 날은 밤샘 근무를 할 수도 있었어요. 이런 생활을 몇 년간 반복했을 때 당신의 몸에 얼마나 큰 타격이 가해질지 상상해 보세요."
정신적으로 아픈 환자들을 돌보는 일 역시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를 요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절망하게 한 것은 신체적 안전에 대한 위협이었다.
"요즘 환자들은 병동에 총이나 칼을 들고 와요. 그리고 당신을 죽이거나 찌르겠다고 위협하죠. 이건 제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치유의 공간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한 공간이 되어버린 현실. 이것이 의료 현실의 민낯이었다. 그녀는 많은 간호사와 의료계 종사자들이 이와 같은 위험 때문에 현장을 떠나고 있다고 했다. "더 이상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 되어버렸어요." 그녀의 말에는 깊은 체념이 느껴졌다.
살인적인 근무 강도와 안전의 위협에 더해, 그녀를 떠나게 만든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은 바로 ‘일터 문화’였다. Soraus는 자신이 일했던 병원 환경을 '즐겁지 않은 곳'이자 '독성이 매우 강한(toxic) 환경'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이 매우 부정적이었어요."
그녀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생명을 다루는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기보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부정적인 분위기가 동료들을 짓눌렀던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 간호사들이 겪는 소위 ‘태움’ 문화와 같은 문제가 영국 간호사 사회에도 존재했음을 짐작케 했다.
Soraus는 환자의 건강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고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외의 모든 다른 것들' 때문에 결국 떠나야만 했다. 그녀의 경험은 한 명의 헌신적인 전문가가 어떻게 시스템과 문화 속에서 번아웃되어 가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담을 넘어, 돌봄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정작 돌보는 사람들의 안위는 외면하는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들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정신건강 낙인 (Mental Health Stigma)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부정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낙인은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숨기게 만들고, 적시에 치료받는 것을 방해하며,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많은 국가에서 낙인을 줄이기 위한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여전히 고용, 대인 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차별의 원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