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자본주의의 배신 | 영국을 떠난 이유

믿었던 세상이 나를 밀어낼 때

by morasafon

"이 방은 지금 전기 콘센트가 작동하지 않아서 잠시 다른 방으로 옮겨야 겠어요."


기본적인 시설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북아프리카의 한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영국인 Roy(가명). 그는 타국에서의 불편한 생활을 이야기하면서도 팬데믹 이후 급격히 악화된 영국의 높은 물가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실질 구매력이 크게 하락한 상황에서, 그곳의 생활비는 상대적으로 매력적인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부서진 약속과 소리 없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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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는 영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내놓는 달콤한 약속들에 그는 변화를 기대하며 투표했다고 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총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노인들의 돈을 빼앗는 것”이었다.


“영국은 겨울이 아주 추워요. 그래서 정부는 노인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난방비 보조금(Fuel allowance)을 지급해왔죠. 많은 노인들이 추위 때문에 겨울에 생명을 잃거든요.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그 보조금을 없앤 거였어요.”


언론은 보조금 폐지로 인해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죽음에 내몰렸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정보는 인터넷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며 그는 씁쓸하게 말한다. “거짓말, 거짓말, 또 거짓말이었죠.” 선거 기간 내내 외쳤던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는 구호는 그렇게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다.


투표용지가 남긴 깊은 배신감


이것은 일회성 실망이 아니었다. 그가 묘사한 영국의 정치는 끝없는 배신의 연속이었다. “한 정당에 투표하면 그들은 나쁜 짓만 골라 하죠. 그래서 다음 선거에서 다른 정당에 투표하면, 그들 역시 똑같이 나쁜 짓을 해요. 계속해서 되돌아갈 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믿었던 투표 행위마저 그에게는 공허한 의식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우리가 투표권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그건 가짜예요. 사실이 아니죠. 어차피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할 테니까요.”


손에 쥐어진 투표용지는 세상을 바꿀 권력이 아니라, 통치에 순응하게 만드는 교묘한 환상이었을까.


그는 말했다. “그들은 더 이상 정치인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저 사업가들일 뿐이죠.” 국가의 운영이 국민을 위한 봉사가 아닌,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비즈니스가 될 때, 시민은 존중받는 주인이 아닌 관리의 대상, 혹은 기업의 ‘고객’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터기지 직전의 샴페인 병, 자본주주의 종말


그렇다면 무엇이 정치를 이토록 망가뜨렸을까. Roy는 그 근원을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서 찾았다. “자본주의는 작동하지 않아요. 더 이상은요. 50년 전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그가 진단한 현대 자본주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간극을 끝없이 벌려놓는 괴물과 같았다.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지만, 돈은 소수에게만 집중된다. 높은 물가를 감당하지 못해 영국 생활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그의 선택은,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뿌리째 흔드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모든 게 돈에 관한 이야기가 됐어요. 더 이상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없죠. 이건 자본주의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에요.”


그는 지금의 세상을 ‘터지기 직전의 샴페인 병’에 비유했다. 부의 불평등과 시스템에 대한 불신, 정치적 무력감이 임계점까지 차올라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이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고립된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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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는 말한다. 이 모든 결과로,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영국 사람들은 점점 더 공동체에서 고립되고, ‘나, 나, 나’만을 외치게 됐어요. 이웃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죠.”


정부는 사람들이 집을 사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그저 자기 삶에만 몰두하기를 바란다. 정부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순응적인 시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에게 물었다. “사람들을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뭉치면 힘이 생기니까요.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들에게는 위협이 되는 것이죠.”


그는 과거 ‘공산주의는 악’이라 몰아붙였던 선전을 예로 들었다. 그가 옹호하려던 것은 특정 이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공동체)’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사람들을 파편화하려는 의도가 자본주의 역사에 늘 존재해왔다는 지적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함께’라는 가치를 잃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섬이 되어버렸다는 것.


이야기 끝에, 그는 덧붙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그의 마지막 말은 공허했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거대한 시스템에 더는 온전히 개인의 삶을 기댈 수 없는 시대에, 생존을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걸까.



1. 영국의 연료 수당 정책

영국의 겨울철 연료 수당은 1997년 도입된 복지 제도로, 원래 모든 연금 수급자에게 지급되었다. 2024년 노동당은 소득 기준을 도입해 지급 대상을 축소했으나, 강한 여론 반발과 정치적 압박으로 2025년에 대폭 복구되어 약 900만 연금 수급자가 다시 혜택을 받게 되었다.


2. 자본주의와 소득 불평등의 심화

OECD 통계에 따르면, 선진국에서 소득 불평등은 지난 수십 년간 계속 심화되었다.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1980년대 평균 약 25% 수준에서 2000년대 약 33% 이상으로 상승한 것으로 평가된다. 팬데믹 이후 자산 가격 상승은 자산 소유 여부에 따른 계층 간 격차까지 확대시켰으며, 이는 소득뿐 아니라 자산 불평등이 경제적 문제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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