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자격마저 빼앗긴 나라 | 미국 의료 시스템의 현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던지는 서글픈 질문

by morasafon

미국을 떠나 남미의 작은 나라 에콰도르에 살고 있는 Raniair(가명).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찾아 향하는 나라를 뒤로하고, 그는 왜 남미의 작은 나라 에콰도르로 떠나왔을까. 미국에서 10여 년간 의료계에 몸담았던 그를 통해, 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복잡하고 서글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보험'이 없으면 아플 자격도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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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iair의 이전 직업은 약사 보조원(Pharmacy Technician)이었다. 그의 일은 의사의 처방전을 확인하고, 보험사의 급여 지급을 처리하며, 환자와 소통하는 일이다. 그의 일터는 아픈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장벽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미국 의료 시스템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보험’이에요. 환자들은 왜 보험사가 이 약을 보장해주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죠. 의사가 처방을 해도 보험사가 거부하면 거기서 끝이에요. 환자는 보험사가 허락하는 다른 약을 먹거나, 아니면 자기 돈으로 약값을 전부 내야 하죠.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직장에 소속되지 않거나, 정부의 저소득층 지원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매달 800달러에서 1,200달러, 우리 돈으로 10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오롯이 개인이 부담하며 개인보험에 가입해야만 했다. 집세를 낼 것인가, 의료보험을 낼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 잔인한 선택지 앞에서 후자를 포기한다.


“에콰도르에서는 의사를 한 번 만나는 데 20달러면 충분해요. 저는 외국인이라 안정적으로 월 50달러짜리 개인보험에 가입했지만, 사실 보험 없이도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죠. 하지만 미국에서 의사를 만나려면 기본적인 진료만으로도 200~300달러(28만 원~42만 원)가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보험이 없어서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면 평생 갚아야 할 의료비 청구서를 받게 돼요.”


‘의료 관광(Medical Tourism)’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나는 현상. 세계 최고의 의료 기술을 가졌다는 나라에서, 정작 그 국민들은 치료받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의료 관광'에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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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아메리카드림, 더 나은 삶을 찾아 국경을 넘는 사람들


미국의 의료 시스템의 문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의 상황은 과거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물가와 집세, 그리고 눈에 띄게 늘어난 노숙인들.


“제 평생 지금처럼 미국에서 노숙인이 많은 걸 본 적이 없어요. 제가 30여 년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그 어떤 때보다도요. 지금의 미국은 10년, 2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것 같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거대 기업들이 엄청난 부를 쌓고 있는데, 그 낙수효과가 사회 전반에 퍼지지는 않느냐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업들의 성장은 특정 소득 계층에만 혜택을 줄 뿐이에요. 가난은 기회, 인종, 교육 수준 같은 훨씬 복잡한 문제들과 얽혀 있거든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믿었던 기회의 문은 사실 보이지 않는 조건들로 굳게 잠겨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미국인이 더 낮은 생활비를 찾아 에콰도르 같은 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이유였다.


생존을 위해 떠났지만, 돌아가야 하는 이유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는 곧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최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 곁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였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아 떠났던 그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돌아가기를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물가가 저렴한 다른 지역을 새로운 정착지로 고민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치열하게 타협하고 계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과연 한 나라만의 이야기일 뿐일까. 성장과 부의 불균형, 그 아래서 개인의 존엄을 위협받는 삶.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받을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1. 미국의 의료보험 시스템(Employer-Sponsored Insurance)

미국 의료보험은 직장 기반 가입이 중심이며, 이는 2차 세계대전 중 임금 통제를 피하려던 기업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구조는 실직 시 보험 상실로 이어지기 쉽고, 자영업자나 비정규직은 고비용의 사보험에 의존해야 하는 취약성을 안고 있다.


2. 의료 관광(Medical Tourism)

비용 절감이나 특정 시술 접근성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을 말한다. 미국인들은 치과·수술 비용 절감 때문에 주로 멕시코를 찾으며, 한국·태국·인도 등은 성형이나 첨단 의료 분야에서 인기 있는 목적지다. 2023년에는 미국인 약 180만 명이 해외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인의 의료관광 목적지는 멕시코가 가장 많고, 진료 유형은 치과 치료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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