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걷는 평탄한 길은, 누군가 맨몸으로 개척한 황무지였다.
여성 의사, 여성 편집장, 여성 트럭 운전사. 이제 우리는 특정 직업 앞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여성 CEO나 여성 정치인의 등장도 더는 새롭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당연해 보이는 ‘오늘’은, 사실 누군가의 치열한 투쟁으로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보이지 않는 벽에 온몸으로 부딪혀 균열을 만들어 낸 수많은 선구자들이 다져놓은 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미국에 사는 Yasirel(가명)은 전직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한국은 여러 번 방문했던, 익숙하고도 특별한 곳이라고 했다. “1980년부터 90년대 말까지 일했어요. 아주 오래전 이야기죠.”
그녀가 항공업계에 몸담았던 시절은 지금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남성 승무원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대.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남성들이 승무원이 되고, 여성들이 조종간을 잡기 시작했다. Yasirel은 그 거대한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서 겪었던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를 꺼내놓았다. 바로 그녀의 친구, ‘캡틴 마리(가명)’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비행 사이의 휴식 시간, Yasirel은 승무원 라운지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복도 건너편 파일럿 라운지에서 한 여성 파일럿이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남자 동료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이름이 뭐예요?”
“캡틴 마리예요.”
“잠깐만요, 뭐라고요? 당신이… 캡틴이라고요?”
“네, 737기 캡틴 마리 그린이에요.”
Yasirel은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캡틴 마리’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이 너무나도 벅차서, 미친 사람처럼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그 이름이 주는 느낌이 정말 좋아요!” Yasirel의 그 말에 마리는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저도 그래요.”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까.
캡틴 마리의 이야기는 단지 ‘여성 기장’이라는 타이틀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 항공사에서 처음으로 임신한 파일럿이 되었다. 그러나 회사에는 여성 파일럿을 위한 임부복 유니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좀 더 큰 사이즈의 셔츠를 입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하지만 마리는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안 돼요. 저 다음에도 임신하는 파일럿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임부복을 만들어야만 해요.’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죠.”
오랜 싸움 끝에 회사는 마침내 그녀를 위한 임부복 셔츠를 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건넨 셔츠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그녀가 수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얻어낸 ‘캡틴’을 상징하는 계급장이었다. 마리는 그 셔츠를 돌려보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는 내 노력으로 이 계급장을 얻었어요. 내 셔츠에 달아주세요.”
결국 마리는 계급장이 달린 임부복을 손에 넣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옷을 입고 비행할 수는 없었다. 셔츠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출산 휴가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번도 입지 못했네요.” Yasirel의 아쉬움 섞인 말에 마리는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입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다음 사람을 위해, 그들이 나와 같은 싸움을 하지 않도록 선례를 만드는 게 중요했어요. 나는 그들의 첫 번째 사례(First Case)였으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먹먹한 감정이 올라와 잠시 숨을 골라야했다. 결혼이나 임신을 하면 당연하게 회사를 그만둬야 했던 우리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국 역시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소송을 통해 부당함에 맞서 싸운 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여성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스스로 ‘첫 번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Yasirel은 씁쓸하게 덧붙였다. 캡틴 마리는 조종실 안에서 항상 수많은 의심과 싸워야 했다고. 남성 부기장들은 끊임없이 그녀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가 남성 기장이었다면 결코 듣지 않았을 질문들이었다. “정말 확신하는 겁니까?” 마리는 언제나 대답해야만 했다. “물론, 아주 확신합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법과 제도는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벽은 여전히 넘기 힘든 장벽이 되기도 한다.
캡틴 마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사람’을 위해 싸웠다. 그녀의 사려 깊은 의지와 용기 덕분에, 후배 파일럿들은 불필요한 싸움 대신 비행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직업군에는 저마다의 ‘캡틴 마리’가 존재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사회 분위기는 조금 더 나아졌다. 우리는 그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유리천장을 다음 세대를 위해 깨뜨려 나가는 것. 이것은 단지 여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성별, 인종, 장애, 나 등 수많은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모든 종류의 벽을 허무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캡틴 마리가 후배들을 위해 항로를 개척했듯, 우리 역시 다음 세대가 더 넓고 평탄한 활주로에서 이륙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야 하지 않을까.
1. 미국의 임신차별금지법(Pregnancy Discrimination Act of 1978)
직장에서 임신, 출산 또는 관련 질병을 이유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연방법이다. 법 제정 전에는 임신을 이유로 여성의 채용, 승진, 해고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 법은 임신한 여성을 다른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직원과 동일하게 대우하도록 규정하여, 여성들이 경력 단절 없이 경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법적 기반이 되었다.
2. 유리천장
조직 내에서 능력 있는 여성이나 소수자가 일정 직급 이상으로 승진하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의미한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처음 사용된 이후, 직장 내 성별·인종 차별을 설명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공식적인 규정이 아닌, 편견, 고정관념, 비공식적 네트워크 등 복합적 요인으로 형성되며, 여전히 많은 조직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