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이 아니라 마음에서 먼저 무너지는 것들
한 나라가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도 위에서 지워지거나, 역사책 속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일상 속에서 천천히 희미해져 가는 것 말이다. 우리는 종종 국가의 위기를 경제 지표나 정치적 갈등, 자연재해로 인식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어쩌면 더 조용하고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 나라를 그 나라답게 만드는 무형의 것들—언어, 문화, 집단적 기억—이 서서히 변질되고 대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말이다.
이 낯선 질문은 아일랜드 청년 Yunal(가명)을 통해,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 처음 나의 호기심은 뉴스에서 본 ‘사실’에서 시작됐다. 아일랜드의 심각한 주택난, 그리고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난민과 이민 문제. 하지만 그가 내게 들려준 것은 한 나라의 ‘진실’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집의 문제가 아니라, 고유한 삶의 터전이 사라진 자리에 세워진 거대한 불안, 즉 ‘아일랜드 정체성’ 자체가 소멸할지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화의 시작은 언론에 비친 아일랜드의 주택 문제였다. 그는 아일랜드가 겪고 있는 이민 문제가 언론에 비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각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단순히 우크라이나 난민들만이 아니에요. 전쟁과 상관없는 파키스탄, 이집트, 조지아 같은 곳에서 온 망명 신청자들이 훨씬 많죠. 아일랜드는 인구 6백만의 아주 작은 나라예요. 이 모든 사람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의 목소리에서는 불평 이상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정부는 임시 텐트촌을 지어 외국인들을 수용하지만, 정작 자국민은 자신의 땅에 있는 작은 캐러밴에 사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당하는 부조리였다. 그는 이것을 ‘정부의 폭정(tyranny)’이라 불렀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눈에 보이는 집의 부족이나 사회적 혼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현상일 뿐이었다. Yunal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이 모든 변화의 끝에 아일랜드가 더 이상 아일랜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아일랜드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이민자의 나라가 아니에요. 그 나라들은 다양한 인종이 하나의 국기 아래 모여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었죠. 하지만 한국인이 하나의 문화와 민족이듯, 아일랜드인 역시 하나의 문화와 민족, 하나의 깃발 아래 있어요.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죠.”
Yunal은 대규모 이민이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적 DNA를 희석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그는 바로 이웃 나라 영국을, 자신의 두려움이 현실이 된 ‘미래의 거울’처럼 여기고 있었다.
“런던의 백인 영국인 비율이 40%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영국의 젊은 세대가 자메이카, 아프리카 등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탄생한 그라임(Grime), 드릴(Drill) 같은 음악에 열광하고, 그들의 슬랭을 따라 하는 것을 단순한 유행이 아닌, 문화 정체성의 이동으로 보았다. 고유의 문화적 발전이 멈춘 자리를 다른 문화가 채우고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나아가 2016년 브렉시트 투표가 보여준 것은, ‘영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 아래 뭉치기보다 출신 배경에 따라 분열되는 모습으로, 국가 통합의 약화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영국에서 가장 흔한 남자아이 이름이 '무함마드'라는 사실은, 단순히 이름 하나의 문제가 아니에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영국의 기독교 기반 문화와 가치관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입니다.”
즉 영국 사회의 인구 구조와 문화적 중심이 이슬람 문화권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통계라고 이야기하며, 이것이 아일랜드가 맞이할 미래일 수 있다고 했다.
“저출산 문제는 이 두려움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어요. 아일랜드 현지인의 출산율은 낮은데, 이민자 커뮤니티의 출산율은 훨씬 높았죠. 이건 복잡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간단한 수학 문제예요. 10년, 20년 뒤를 계산해 보면 결과는 명확해요. 이대로라면 10년 안에 아일랜드 인구의 30%가 외국 태생이 될 거란 전망도 있어요.”
그의 눈에는 미래의 아일랜드가 그려지고 있었다. 언어와 문화, 생활 방식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고향이 아닌 낯선 땅.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가 사실상 소멸하는 것, 그것은 그에게 실존적인 공포였다.
Yunal의 우려는 아일랜드의 언어 이야기에서 절정에 달했다. 아일랜드어(게일어)는 수백 년간 영국의 지배 아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민족의 영혼 그 자체였다.
“우리 고유의 언어는 지금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요. 영어가 우리 문화와 스포츠까지 모든 것을 억압했죠. 수천 년 전 유럽의 중심에서 시작된 우리 켈트 문화는 계속 밀려나, 이제 유럽 대륙의 서쪽 끝, 이 작은 섬의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셈이에요. 마지막 남은 숨결 같은 거죠. 우리는 이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때인데, 오히려 외부의 거대한 파도에 그것을 놓아버리려 하고 있어요.”
한 언어가 소멸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언어에 담긴 역사, 신화, 노래,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방식 전체가 사라지는, 한 세계의 종말이었다. 벼랑 끝에 선 언어. 그 위태로운 이미지는 아일랜드가 처한 상황을 생생히 대변했다.
나는 그의 주장이 타민족에 대한 배척이나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모든 말의 근원에는 자신의 나라와 문화에 대한 깊고 뜨거운 사랑이 자리햇다.
“우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외쳤어요.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할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다워야 한다(We not only need to be free, but Irish as well).’ 이 말은 물리적 자유를 넘어,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자유, 우리의 정체성을 지킬 자유를 의미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제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돼요. 이건 증오가 아니에요. 오직 사랑이고, 지키고 싶은 열정일 뿐입니다.”
나는 그저 '이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궁금해했지만, 그는 ‘정체성’을 지키려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자신의 것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생겨난 간절함이었다.
‘다문화 사회’와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성급하게 하나의 문화가 가진 고유한 색채와 역사를 지키려는 절박한 목소리를 배타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치부해온 것은 아닐까. 이민과 문화적 다양성이 가져오는 풍요로움과 역동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문화적 고유성과 정체성의 가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어줄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다르지 않았다.
한 나라가 사라지는 것은 지도에서 국경이 지워질 때가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잊을 때,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키고 전승하려는 마음이 사라질 때일지 모른다.
1. 아일랜드 이민 위기 (Irish Immigration Crisis)
아일랜드는 최근 몇 년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과 국제 보호(난민) 신청자의 급증으로 사회 기반 시설 문제에 직면했다. 주택, 의료 등 사회 기반 시설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자국민과 난민 간 갈등이 일어나고, 일부 지역에서 난민 수용 시설 반대 시위가 발생하는 등 정치적 긴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2. 켈트 문화 (Celtic Culture)
켈트 문화는 기원전 유럽 중부에서 발흥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고대 문화다. 특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지에 그 명맥이 강하게 남아있다. 고유의 켈트어(게일어 등), 독특한 신화와 전설, 복잡하고 상징적인 매듭 문양(Celtic knot) 예술 등이 특징이다. 영국을 지배한 앵글로색슨의 게르만 문화와는 뚜렷이 구분되며, 아일랜드 민족 정체성의 핵심적인 뿌리를 이룬다.
3. 아일랜드어 (Irish Language/Gaeilge)
게일어(Gaeilge)라고도 불리는 아일랜드어는 아일랜드의 제1공용어이자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다. 오랜 영국 식민통치 기간 동안 영어가 지배 언어로 자리 잡았으나, 독립 이후 정부의 강력한 부흥 정책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영어가 지배적이며, 게일어 사용 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어, 아일랜드어 보존은 국가적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