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권리'와 '책임'의 무게
영국을 떠올리면 으레 따라오는 이미지가 있다. 신사의 나라, 유서 깊은 역사, 그리고 유럽 특유의 합리적인 ‘워라밸(Work-Life Balance)’. 치열한 경쟁 사회에 지친 우리에게 그곳의 삶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영국에서 25년간 매니저로 일했던 Jamese(가명)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90년대에 고향을 떠나 영국에 정착했고, 지금은 동남아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다. 그가 들려준 영국 노동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의 틀을 흔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영국 사람을 고용하는 걸 선호하지 않았어요.”
그가 25년간 몸으로 겪은 영국 직장 생활은 당혹스러웠다. 특히 관리자로서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시간’에 대한 구성원들의 독특한 관념이었다. 물론 런던의 악명 높은 대중교통은 정시 출근을 방해하는 주범이다. 지하철이 고장 나거나 지연되는 일이 잦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몇 분씩 늦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상사가 “조금만 더 일찍 다녀줄 수 없겠니?”라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지각에 대한 분위기는 관대했다.
Jamese가 문제 삼은 것은 불가항력적인 지각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진짜 업무는 ‘9시 정각’이 아닌 한참 뒤에나 시작되었다.
“일단 자리에 도착하면 커피 한 잔을 타러 가야죠. 가는 길에 동료 피터와 잠시 수다도 떨고요. 그러고 나서 컴퓨터를 켜면, 실제 업무는 9시 15분쯤 시작돼요.”
퇴근 시간의 풍경은 어떠한가.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가 ‘회사를 나서는 시간’이 아니라 ‘업무를 종료하는 시간’으로 여겨지는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 5시는 ‘건물 밖으로 나서는 시간’을 의미했다.
“오후 4시 45분쯤 되면 다들 컴퓨터를 끄기 시작해요. 코트를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마치죠. 그리고 5시 정각이 되면, 모두가 문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회사는 5시까지 일하라고 월급을 주는 건데 말이죠.”
그는 이런 작은 시간들이 쌓여 만드는 비효율과 조직의 손실을 지적했다. 계약직으로 일하며 프로젝트가 끝나면 몇 달씩 여행을 떠날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에게도, 이러한 느슨한 문화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가 영국인들을 “망가졌다(spoiled)”고 표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영국 복지 제도, 특히 ‘병가(sick leave)’ 문화였다. 감기나 독감처럼 가벼운 질병으로 아플 경우, 상사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최대 3일까지 유급 휴가를 쓸 수 있었다. 자신의 연차와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병가’였다.
“정말로 아픈 사람들을 보호하는 이 제도를 사랑해요. 하지만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알던 한 직원은 매달 어김없이 ‘아프다’고 전화하고 이틀씩 쉬곤 했죠. 정말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출근하기 싫었던 거예요.”
병이 3일 이상 길어지면 의사에게 ‘병가 소견서(sick note)’를 받아 제출해야 한다. 일단 소견서가 제출되면, 회사는 의사가 명시한 기간까지 직원을 절대 출근시킬 수 없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원이 “이제 괜찮아져서 출근하고 싶다”고 말해도, 상사는 “안 된다”고 답해야만 한다.
Jamese는 이와 관련해 믿기 힘든 실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한 남성이 병가를 낸 뒤, 소견서 기간이 만료될 때마다 병원에 가서 계속해서 기간을 연장했다. 그렇게 그가 출근하지 않고 월급을 받아 간 기간은 무려 15년이었다.
물론 Jamese가 들려준 이야기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대다수가 아닌, 일부 극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다만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선한 제도와 시스템이 누군가에 의해 악용되는 현실은 안타깝고 씁쓸하다.
소수의 선택이 결국에는 제도의 보호가 절실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마저 앗아가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닐지. 한 사회의 신뢰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균열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지도 모른다.
1. 영국의 법정 연차 휴가 (Statutory Annual Leave)
영국 법률은 모든 근로자에게 연간 최소 5.6주의 유급 휴가를 보장한다. 주 5일 근무자의 경우 이는 28일에 해당하며, 공휴일(Bank Holidays) 8일을 이 휴가 일수에 포함시킬 수 있다. 글에서 언급된 ‘22일+8일’은 법정 최소 기준보다 조금 더 관대한, 많은 영국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일반적인 휴가 정책의 예시이다.
2. 병가 소견서 (Sick Note / Fit Note)
영국에서는 근로자가 7일(달력 기준)까지는 의사의 진단 없이 스스로 병가를 증명(self-certification)할 수 있다. 7일을 초과하여 결근할 경우, 의사로부터 ‘업무 적합성 소견서(Statement of Fitness for Work)’ 또는 ‘핏 노트(fit note)’를 발급받아 회사에 제출해야 한다. 이 소견서는 근로자가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거나, 특정 조건 하에서만 업무가 가능함을 증명하는 법적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