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는 침묵이 가장 안전한 언어이다
빨간 2층 버스와 안개 낀 거리, 전 세계의 문화가 뒤섞인 화려한 도시. 60대의 런던 토박이, Ranian(가명)과의 대화는 화려한 도시의 커튼 뒤에 가려진 다른 풍경으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혹은 알면서도 외면했던 도시 생활의 서늘한 민낯이었다.
Ranian은 런던 토박이 버스 운전사지만, 그의 뿌리는 카리브해의 자메이카에 닿아있다. 작년에 태어난 손주들을 보기 위해 지금은 런던에 머물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내년 말, 카리브해의 섬나라 자메이카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내가 왜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입고 있던 스웨터를 가리켰다.
"자메이카에서는 이게 필요 없거든요. 스웨터 말이에요. 그곳은 늘 해가 빛나니까요."
그의 대답은 단순히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런던의 춥고 긴 겨울은 그에게 물리적인 추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 듯했다. 그는 런던에서도 작은 텃밭을 가꿨지만, 일 년 내내 따스한 햇살 아래 과일과 채소를 키울 수 있는 자메이카의 삶을 그리워했다. 자메이카에서는 먹을거리를 직접 기르며 살아갈 수 있기에, 런던에서처럼 운전에 부업까지 하며 쉴 틈 없이 일할 필요도 없다.
“나이가 들면 추운 나라에서 늙고 싶지 않았어요. 매일 해가 비치는 따뜻한 나라에 있고 싶었죠.”
그의 말에는 더 느리고, 더 단순하며, 더 자연과 가까운 삶에 대한 오랜 바람이 담겨 있었다. 그의 선택은 단순히 은퇴 후의 휴양을 꿈꾸는 것을 넘어, 평생을 살아온 도시 생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평생의 터전인 런던에서 떠나게 만들었을까.
Ranian은 햇살이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운전하는 버스 안에서도, 해가 뜨는 날이면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고 했다. 겨울 내내 무뚝뚝하던 승객들도 햇살 아래에서는 더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일 년 중 고작 한 달의 휴가가 아닌, 12달 내내 행복한 곳에 머물 기회가 있다면 그곳을 택하고 싶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당연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가 런던을 떠나려는 이유는 단순히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도시와 시골의 근본적인 차이, 바로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시에서는 늘 무언가를 얻기 위해, 어딘가로 가기 위해, 돈을 쓰기 위해 바쁘게 서두르죠. 저는 런던의 아파트에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차 한잔 마시며 이야기 나눌 만큼 아는 이웃은 두 명 정도 될까요.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면 인사는 하지만,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해요.”
그의 이야기는 서울에 사는 나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도시에서 우리는 종종 섬처럼 고립된다. 이웃과 교류 없이 살아가는 익명의 삶. 이것은 현대 도시 생활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고립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라, 정부가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하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자는 ‘톡 투 미(Talk to Me)’ 캠페인 배지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Ranian은 그 운동이 런던에서 별다른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자메이카에서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특히 어른에게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아주 무례한 사람으로 여겨져요. 하지만 런던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걸면, 사람들은 당신을 미친 사람이거나 무언가를 훔치려는 도둑으로 의심하죠.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면, 대부분의 여성은 핸드백을 꽉 붙잡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걸 수 없는 도시.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익명의 군중 속에서 개인은 워로워 진다. 그가 그리워한 것은 자메이카의 햇살뿐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기였을 것이다.
대화는 도시의 안전 문제로 이어졌다. 나는 최근 미국이나 영국 일부 도시의 범죄율 증가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밤거리를 걷기 두렵다는 다른 영국인의 이야기도 꺼냈다. Ranian은 영국 사회에 범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하는 이미지와는 다른 현실이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런던에도 총기나 칼을 이용한 범죄가 뉴스에 나오죠. 하지만 95%의 경우, 그런 범죄는 범죄자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마약상이 무고한 시민을 공격하는 일은 흔치 않아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에 나서기 때문에 범인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피하죠.”
그는 런던이 범죄 없는 유토피아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폭력은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며,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은 생각보다 안전하게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범죄율이 높다고 알려진 자메이카에서조차 관광객은 가장 안전한 집단에 속한다고 했다. 관광 산업이 국가의 주요 수입원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광객의 안전을 철저히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실제 삶의 감각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생각하게 했다.
Ranian과의 짧은 대화는 ‘런던’이라는 하나의 도시를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도시’라는 공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더 많은 기회와 편리를 위해 도시로 모여들었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그는 자메이카의 삶이 성 평등이나 소수자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영국보다 40~50년은 뒤처져 있는 사회라고 말했다. 그가 꿈꾸는 곳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이상향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아가려는 이유는, 잃어버린 공동체의 감각, 자연, 그리고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와 온기를 되찾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마주친 이웃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고, 낯선 이의 친절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삶. 햇살 아래 땀 흘려 기른 채소를 이웃과 나누는 삶. 어쩌면 우리는 현대적인 도시에서 원시적인 그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네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까.
1. 영국 외로움부 장관 (UK's Minister for Loneliness)
영국 정부는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 문제’를 전담하는 장관직을 신설했다. 이는 고령화, 1인 가구 증가, 공동체 약화 등으로 인해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 심각한 공중 보건 및 사회 문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외로움부 장관은 개인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위협하는 사회적 고립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적 전략을 수립하고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2. 영국의 '톡 투 미(Talk to Me)' 캠페인 배지
영국의 '톡 투 미(Talk to Me)' 캠페인 배지는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적 운동의 일환이다. 이 배지를 착용한 사람은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 열려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현대 도시의 익명성과 단절감을 해소하려는 시도이다. 런던 시민 조나단 던(Jonathan Dunne)이 시작한 이 캠페인은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는 도시 문화 속에서 작은 소통의 물꼬를 트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낯선 이와의 대화를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게 여겨, 캠페인이 사회 전반의 문화를 바꾸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