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역사가 문을 닫는다 | 영국 펍의 몰락

다문화와 세대 차이, 든든했던 마을의 울타리가 무너지다

by morasafon

나무로 된 낡은 테이블, 나지막이 울리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따스한 온기. 영국의 펍(Pub)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영국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Zaran(가명)을 만나면서, 나는 그 낭만적인 풍경 너머로 저물어가는 한 시대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는 한 문화의 변화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교회와 펍, 한 마을의 두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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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Pub)과 바(Bar)는 달라요.”


Zaran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가 술과 춤,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라면, 펍은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 과거 전화조차 없던 시절, 영국의 작은 마을에는 어김없이 두 개의 중심지가 있었다. 하나는 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펍이었다.


“펍은 일종의 사교 행사였죠. 일요일이면 가족과 함께 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동네 사람들과 모여 카드 게임이나 다트 게임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어요. 아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 공간이 마련된 곳도 많았고요. 그곳은 지역 사람들을 위한, 말 그대로 ‘공공의 집(Public House)’이었습니다.”


펍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고 마을의 역사를 품는 하나의 공동체 문화 그 자체였다. 한국 사회에도 이토록 다양한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서로의 안부를 묻고 교류하던 공간이 있었던가.


300년 된 펍,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균열


Zaran의 동네에는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펍이 있다고 했다. 수백 년 전 주류가 금지되었을 때, 한 밀수꾼이 밤마다 해안으로 술을 들여왔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펍이다. 그곳은, 말 그대로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하지만 Zaran은 이 유서 깊은 문화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펍들이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영국 사회의 변화와 맞닿아 있었다.


“영국은 이제 다문화 사회가 되었어요. 특히 무슬림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문화 때문에 자연스럽게 펍이 사라지고 있죠.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펍을 찾지 않아요. 그들은 시끄러운 음악과 춤이 있는 바(Bar)로 향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죠. 그저 친구들과 어울릴 뿐이에요.”


그의 말은 펍의 쇠퇴가 단순히 음주 문화의 변화가 아님을 시사했다. 그것은 낯선 이와 기꺼이 말을 섞고 관계를 맺던 열린 공동체의 시대가 저물고, 사람들 사이의 연결 고리가 하나씩 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세대 차이가 만들어 낸 단절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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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마저 흩어지는 시대


이야기는 사회 변화로 이어졌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사람들은 더 이상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지 않는다. Zaran의 형제들은 모두 다른 도시에 살고, 그의 자녀 또한 다른 도시에서 자리를 잡았다. 과거에는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던 대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이제는 희미해졌다.


“저는 예전 방식이 더 좋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요. 가족이 곁에 있다는 건 엄청난 힘이 되거든요.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결혼도, 아이도 원치 않는 경우가 많죠. 제 아이도 그래요. 물론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저희 세대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이건 돈의 문제라기보다, 삶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아요.”


개인의 삶과 즐거움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 더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더 외로워졌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고단함 속에서 피어나는 기쁨, 세대를 이어가며 서로를 지지하는 유대감의 가치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Zaran은 자녀가 없는 이들이 겪게 될 노년의 외로움을 염려했다.


우리는 무엇으로 서로를 연결해야 할까


영국 펍이라는 창문을 통해, 나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는 시대의 풍경을 보았다. 펍의 문이 하나씩 닫힐 때마다, 그 안에서 피어났을 수많은 이야기와 관계들, 세대를 이어온 온기는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물론 모든 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Zaran 역시 아버지를 구식이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그의 아이가 자신을 구식이라 부른다며 웃었다. 세대는 늘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바라본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지요”라고 그는 덧붙였다.


펍이 사라진 자리를, 흩어진 가족의 빈자리를, 우리는 무엇으로 채워나가고 있을까. 이렇게 파편화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연결하게 될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담론이 아닌,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함께 웃을 수 있었던 옛 펍의 문화가 아닐지.



영국의 펍(British pub)

로마 시대에 군인과 여행객을 위해 술을 팔던 태번(tabernae)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지역 주민들이 교류하고 소식을 나누는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것을 핵심 목적으로 삼아 발전해 온 공간이다. 펍의 운영은 정부로부터 공식 주류 판매 허가(licence)를 받아야 가능하며, 주인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프리 하우스(free house)'와 특정 양조장에서 맥주를 공급받는 '타이드 하우스(tied house)' 형태로 나뉜다. 오늘날 영국의 펍은 높은 운영비와 변화하는 소비 습관으로 인해 그 수가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영국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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