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편견이 깨지던 순간
사우디아라비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뜨거운 사막과 석유, 엄격한 이슬람 율법, 아바야를 두른 여성들... 과연 그곳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일하고, 관계 맺고 있을까. 그 막연한 질문에 생생한 목소리로 답을 들려준 사람은 미국인 Khars(가명)였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살고 있는 그와의 대화는, 나의 낡은 편견이 얼마나 실제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대화의 시작과 함께 나의 가장 큰 충격은 다름 아닌 ‘워라밸’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때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익숙했던 한국의 직장 문화를 이야기하자, Khars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에요. 장담하건대, 이곳의 근무 환경은 당신이 경험했던 것보다 1,000배는 나을 겁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사람은 없어요. 보통 6시간에서 8시간 정도 일하죠. 이곳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가족이 중요해요. 종교가 첫 번째, 그리고 바로 다음이 가족이죠."
이 원칙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직원의 삶을 보호하는 구체적인 제도로 작동하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온전히 슬픔을 추스를 수 있도록 두 달의 유급 휴가를 줍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아프면, 간호를 위해 6~7개월까지도 쉴 수 있어요. 아이가 아파서 하루 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요."
‘가족 때문에 회사에 피해를 준다’는 죄책감이 없는 사회. 오히려 아이가 있는 직원은 "더 책임감이 강하고 안정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아 채용 시장에서 환영받는다. 그곳에서 일은 삶의 일부일 뿐, 결코 삶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이상적인 워라밸이 가능한 사회의 이면에는 또 다른 현실이 존재했다. Khars는 자신이 목격한 사우디 사회가 크게 세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고 설명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가진 최상류층, 미국과 비슷한 물가를 감당하며 사는 중산층,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을 낮은 곳에서 떠받치는 외국인 노동자 계층이다.
그는 한 가지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미국에서 배관공을 부르면 시간당 100달러는 줘야 해요. 여기서는 길거리에 나가 배관 기술이 있는 사람을 찾으면, 단돈 10달러에 똑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
이 엄청난 가격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그 답이다.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저임금 서비스직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Khars는 "이곳에서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영어는 필수"라고 했다. 유창한 영어가 곧 계층을 나누는 보이지 않는 기준선이 되는 셈이다. 저렴한 주유비와 인건비 덕분에 중산층의 삶은 풍요로울지 모르나, 그 풍요는 누군가의 값싼 노동력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외국인으로서 사우디 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은 가능할까. Khars는 이 질문에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우디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따뜻해요. 흥미로운 점은, 그들은 자기 민족끼리는 꽤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외국인에게는 유독 관대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환대에는 명확한 선이 존재했다.
"당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은 당신이 결코 사우디 사람과 같아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스스로를 우월한 민족이라 믿거든요. 당신은 언제나 환영받는 손님일 뿐,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이러한 태도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여전히 남성이 유리한 문화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남자에게 능력이 없다면, 능력을 갖춘 여성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냉정한 능력주의가 공존했다. 친절하지만 거리를 두고, 전통을 지키면서도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그것이 Khars가 경험한 중동의 문화였다.
그곳은 전통과 변화, 때로는 낯선 가부장적 모습과 따뜻한 가족 중심주의가 뒤섞인,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땅이었다. 그 무엇보다 가족과 삶 자체의 가치를 높게 두는 모습은, 피상적인 지식과 고정관념을 넘어 세상을 마주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사우디 비전 2030 (Saudi Vision 2030)
2016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발표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사회·경제 개혁 계획이다. 석유에 의존해 온 국가 경제 구조를 다각화하고, 관광,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산업을 육성하며,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와 같은 사회 개혁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청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