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사라진 그들 | 영국 컨설턴트의 문화 지도

기술이 아닌 사람을 번역하는 방법에 관하여

by morasafon

영국 출신의 IT 컨설턴트 Bastien(가명)의 40여 년 커리어는,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의사소통의 역사였다. 공장부터 첨단 기술회사까지, 수많은 산업 현장을 누비며 그는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시스템을 구축하고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런 그에게 커리어의 마지막 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팬데믹 시대, 비대면 협업의 명과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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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tien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그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50여 개국 100여 개 사업장의 수백 명 사용자를 연결하는 시스템 도입 사업.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팬데믹으로 인해 단 한 번의 대면 회의 없이 100% 원격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가능해졌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기술이 오히려 심리적 거리라는 새로운 장벽을 만들고 있음을.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들의 표정, 그 미묘한 몸짓을 읽을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리적인 회의실에선 사람들의 몸짓만 봐도 내용을 이해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죠. 하지만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작은 사각형만으로는 그들의 진짜 생각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화상 워크숍에는 수십 명이 들어와 있는데 제 화면에는 십여 명밖에 보이지 않을 땐 정말 답답했죠."


이러한 비대면 협업의 한계는 특히 일본 팀과의 소통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 팀과의 회의는 고요한 침묵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질문을 해도 답이 없고, 화면 너머의 그들은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죠. 만약 직접 만났다면, 저는 회의실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눈빛과 몸짓을 보고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모니터를 통해서는 그저 단단한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었어요."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너무나 달랐던 회의. 집단의 조화와 예의를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적 특성이, 비언어적 소통이 차단된 원격 환경과 만나면서 '소통 불능'이라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Bastien은 만약 프로젝트를 다시 한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일본만큼은 반드시 직접 찾아갔을 것이라고 했다.


국경 너머의 보이지 않는 규칙들


Bastien이 수십 년간 전 세계를 직접 누비며 경험한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문화 차이였다.


그가 3달간 스페인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국에서 모인 동료들과 진행했던 프로젝트 일화다. 시스템 오픈을 앞둔 금요일, 야근을 각오하고 있던 그의 눈앞에서 모든 스페인 동료가 오후 2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퇴근해 버렸다.


"본사에서 걸려온 독촉 전화에, 스페인 직원들이 다 퇴근해서 일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다고 보고했어요. 그들이 어디 있었냐고요? 아마 해변이나 술집이겠죠."


그들에게 금요일 오후와 주말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프로젝트가 지연되어도 그들의 '삶의 규칙'은 회사의 규칙보다 우선했다.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일'을 대하는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였다. 문화 차이는 단순히 언어나 습관의 다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삶,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각기 다른 정의였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깨달았다. 성공적인 해외 근무와 프로젝트 관리를 위해서는 간트 차트(Gantt chart) 이전에 각국의 '문화 지도(Cultural Map)'를 먼저 그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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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방식과 존중의 언어: "당신이 틀렸어요"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는 소통의 방식에도 있었다. Bastien은 말레이시아 출신 Nefi와의 경험을 통해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그가 시스템을 잘못 다루고 있을 때, 효율성을 중시하는 엔지니어답게 그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Nefi, 그건 틀렸어요."


"그 말을 뱉는 순간, Nefi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그의 '체면'을 공개적으로 깎아내린 겁니다. 말레이시아 문화에서 그것이 얼마나 큰 모욕인지 당시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죠."


그 후 Bastien은 자신의 소통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그는 이렇게 접근했다.

"Nefi, 당신 말이 맞아요. 그런데 혹시 이런 방법도 본 적 있나요? 아마 이미 알고 있겠지만, 같이 한번 보죠."


그는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더 나은 길로 안내하는 지혜를 터득했다.


그가 발견한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의사소통이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찾아내는 창의성과 공감의 능력이었다. 진정한 소통은 더 빠른 기술이나 더 완벽한 시스템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화면 너머의 침묵을 견디고, 국경 너머의 낯선 관습을 존중하며, 기꺼이 상대방의 세상으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에 있다. 결국 마음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체면 문화 (Face Culture)

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개념으로, 개인이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 명예, 평판을 유지하려는 심리 및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이 문화권에서는 타인 앞에서 직접적인 비판이나 거절을 통해 상대방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을 극도로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소통 시에는 간접적이고 완곡한 표현을 선호하며, 갈등을 피하고 조화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서 이러한 체면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효과적인 협상과 신뢰 관계 구축에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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