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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미국 서부에서 만나다-5> NBA와 MZ

Lebron James

by 모블랙

지난밤에도 잠깐 잠에서 깼다. 멜라토닌을 한 알 먹을까 하다가 조금 누워있으니 금세 잠에 다시 들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날이었다. 예정된 것이라고는 저녁에 NBA경기를 관람하는 것뿐이었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니 동생이 대문을 열어놓고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며칠 같이 있어보니 짬날 때마다 정말 책을 잘 읽었다. 그것뿐 아니고 휴대폰의 알람들도 끌건 끄고, 킬 건 키고 하면서 스스로 삶의 리듬을 만들고 지키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얼마나 항상 대기상태로 있었던지.. 또 그것이 응당 내가 취해야 할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믿었다.


정답은 없지만 매일의 반복된 삶 속에서 정리할 것들은 좀 있어 보였다. 이를테면 유튜브나 인스타 하는 시간을 줄이고 책 읽는 시간을 늘리는 것부터 올해는 시작해야지.


오전에는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와 간단한 요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동생은 책을 읽고, 아내는 작사를 하고, 나는 밀린 사무실의 뉴스를 업데이트하고 글을 썼다. 햇살은 카페 뒷마당에 심어진 나무 틈새를 후비고

들어왔고, 나는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채 정면으로 햇살을 즐겼다.


첫 번째 행선지로는 The Grove라는 쇼핑몰을 방문했다. 아내는 외국을 나갈 때 꼭 무엇을 사지 않더라도 물건들을 둘러보는 것을 참 좋아한다. 웨스트 할리우드에 위치한 이 쇼핑몰은 매우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날씨도 좋아 뭘 사지 않고 구경만 하고 다녀도 충분히 즐길 만했다. 옆에는 또 Farmers Market이 있어서, 간단하게 맥주와 간식을 먹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LA를 수도 없이 왔던 동생은 이렇게 사람이 적은 LA는 처음 본다고 했다. 아마 산불의 영향으로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 중 다수가 일정을 취소한 듯싶었다. 그러나 여행 중 산불로 인한 영향은 첫날 하루이틀 공기가 좀 안 좋은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마저도 서울보다는 훨씬 공기가 좋았다. 덕분에(?) 아주 쾌적하게 LA를 여행할 수 있었다.


날씨 좋은 LA는 정말 끝내줬다. 괜히 캘리포니아가 살기 좋은 동네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월 말에도 날씨가 20도 내외를 왔다 갔다 했다. 일 년 내내 기온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단다. 이 정도로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봄, 가을 날씨(우리나라 기준)는 사실 한국은 일 년 중 2주나 될까.. 그러니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고, 날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방식으로 생활방식이 발달한 것 같다. 운동도 전부 실내에서 하니.. 다른 건 몰라도 날씨하난 정말 부러웠다.


그로브에서 구경을 마치고 베버리힐스로 이동했다. 동생이 취업기념이라며 좋은 점퍼를 선물로 사줬다. 항상 내가 사주고 챙겨줬던 터라 미안하면서 고마웠다. 딱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는데 가격 때문에 선뜻 구매하기 어려웠다. 결혼 전 같으면 이 정도는 큰 고민 없이 샀을 테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희생을 각오해야 함을 의미했다. 물론 그 과정도 행복하게 가꾸는 것은 부부의 노력에 달린 일이다.


이날 저녁도 역시 한식을 먹었다. 선농단이라는 한식집에서 갈비찜을 시켜 먹었는데, 역시나 양이 많고 질이 좋았다.

불쇼도 한식 컨텐츠의 일부


LA레이커스 홈구장인 크립토아레나를 가는 길은 차가 매우 막혔다. 르브론 제임스가 등장할 때 하는 세리머니를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크립토 아레나 주위는 이미 레이커스 팬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가 레이커스의 져지를 입고 있었다. 제일 많이 보인 유니폼은 코비 브라이언트였다. 경기장은 무척 거대하고 화려했다. 입장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려 경기는 이미 1 쿼터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릅신 영접!!
중간중간 공연이 진짜 재밌었다.

나는 중, 고등학교 때 농구에 거의 미쳐있었다. 그중 중3이 내 전성기였다. 그때 친구들과 인천 시 대회를 나가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때 막 NBA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르브론 제임스였다. 이미 떡잎부터 달랐던 그는 2003년 클리블랜드에 드래프트 된 첫 해부터 날아다녔다. 나도 그때 당시 르브론에 열광했고 그의 유니폼을 사서 농구할 때마다 입었다. 자연스럽게 내 영어 이름도 제임스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으며 서서히 농구와 거리가 멀어졌다. 2016년쯤엔 잠깐 다시 농구에 다시 흥미를 느껴 열심히 하기도 했으나 채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미 몸이 많이 굳어 더 이상 예전만큼 점프력이 나오지 않았고 체력도 받쳐주지 않았다. 마음먹고 뛰면 림도 잡았던 고등학교 때에 비해, 그물을 건드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불혹을 넘은 내 어린 날의 우상 제임스는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도 팀에서 가장 잘했다. 엄청난 자기 관리였다. 나는 이렇게 늙고 변했는데, 그는 아직도 자신을 채찍질하며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젊음을 일찍 놓아버리는 것 같다.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게 되면 바쁜 생활에 지쳐 시간 나면 늘어지게 된다. 쉬기에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자유로운 토론이 거의 불가능한 대한민국 회사들의 특성상, 새로운 세대들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으면 낙오자로 낙인찍히기 일쑤다. ‘요즘 MZ세대들은’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실제로 90년~00년대 생들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늘 새로운 세대에게는 그들이 별나다며 오렌지족이니 X세대니 Y세대니 라벨이 달렸다. MZ라는 단어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대한민국에선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증에 불과하다.


순수함의 회복이 필요하다. 이 나이땐 뭘 해야 한다는 것은 애초에 없다. 골프채를 내려놓고 다시 농구화를 신자. 점퍼가 좀 무딜 수 있다. 삐걱거릴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다시 공을 던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다시 하려면 연습이 배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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