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느낌
미국에 도착한 첫날, 동생은 시차적응이 힘들 것을 예고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자신만만하게 “여행을 다닌 게 몇 년인데 시차 비슷한 남미에서도 괜찮았어”라며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첫날을 꼴딱 샌 뒤 동생은 그것 보라며 나를 실컷 놀렸다. 그리고는 약국에서 파는 멜라토닌을 먹으면 시차적응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멜라토닌 한 통을 사주었다.
셋째 날로 넘어가는 밤, 어김없이 새벽에 눈을 떴다. 시계는 새벽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동생이 일러준 대로 빛을 보지 않고 멜라토닌 한 알을 혀에 녹여먹었다. 이대로 잠이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찰나 금세 잠이 들었다.
오늘은 동생의 여자친구와 함께 샌디에이고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의 변호사인데, 마침 미국도 마틴루터킹 휴일을 맞아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들과 LA에 놀러 와 있었다. 그녀의 숙소 근처로 아침에 차를 몰았다.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근처 스타벅스를 먼저 들렀다.
아내는 얼마 전부터 영어공부에 다시 재미를 붙였다. Ringle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미국인들과 화상통화를 하며 공부에 푹 빠져있다. 그녀는 늘 미국 가면 영어로 즐겁게 의사소통을 하겠다며 귀여운 포부를 밝히곤 했다.
그 데뷔 무대가 스타벅스였다. 가는 길 내내 긴장된다며 주문을 되뇌더니, 스타벅스에 도착해서는 부끄러우니 보지 말고 저기밖에 나가있으라며 나를 내쫓았다. 그리고는 커피를 알맞게 들고 나오는 걸 보니 성공한 모양이었다. 난 결혼한 뒤 이런 소소한 행복의 순간이 좋다.
조금 기다기니 동생 여자친구가 숙소에서 나왔다. 품에 뭔갈 안고 오길래 뭘 가져왔나 봤더니 반쯤 남은 큰 물통과 작은 물병 몇 개를 들고 왔다. 사람이 많아서 목마를까 봐 들고 왔단다. 말로 잘 표현하긴 어렵지만 꾸며내지 않은 따뜻한 성품이 느껴졌다. 큰 물통 하나만 챙기자니 조금 부족하면 어쩌지 하며 고민했을 테지.
그렇게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며 샌디에이고로 차를 몰았다. UC San Diego라는 건물이 보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들은 UC시스템으로 묶여 있고, 다 좋은 학교라고 동생이 부연설명을 해줬다. 우리나라도 이 UC시스템처럼 국립대 시스템을 도입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첫 번째로 방문한 카페는 동생 여자친구가 좋아한다는 카페였고, 그녀의 최애 메뉴인 아보카도샌드위치는 정말 맛있었다. 깔끔하고 신선했고, 무엇보다 빵이 정말 맛있었다. 사워도우인 듯싶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라호야코브라는 인근 지역으로 이동했다. 해변가를 중심으로 상점가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정말 아름다웠고, 날씨도 끝내줬다. 식사를 하고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산책도 하고 바다사자도 구경하고, 여기저기 상점도 들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동생 여자친구를 LA공항으로 바래다줄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는 길은 정체가 있는지 두시간 가까이 걸렸으나 즐겁게 대화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운전했다.
어떤 사람이 동생의 배우자로 어울리는가. 내가 누구랑 결혼해라 마라 얘기할 권한은 없다. 그래도 혼자 생각했을 때, 우선은 착하고 동생이랑 잘 맞아서 둘 사이의 관계가 편한 사람. 하나 더 바란다면,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대화 코드가 맞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하루동안의 여행이었지만, 나는 괜히 혼자서 나중의 미래까지도 머릿속으로 다녀왔다. 나와 아내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동생과 여자친구가 손을 잡고 앞서갔다. 나는 왠지 모르게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