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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미국 서부에서 만나다-3> 시차적응

건강한 삶

by 모블랙

지난밤,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최근 한국에서의 삶은 너무 바빴다. 주말 없이 일에 몰두했다. 특히 작년 10월부터는 나뿐 아니라, 우리 팀 모두 20대처럼 온몸을 불살라 일했다. 바쁜 일이 끝나고는 네트워킹의 시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약속들을 소화했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5번까지도 저녁 약속이 있었다. 가끔 보이는 아내의 서운한 표정도 미국 가면 온전히 여행에 집중하자며 애써 모른척한 채로 시간은 흘러갔다.


머리만 대충 말린 채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것은 밤 열 시였다.

꿈에선 불편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미완의 감정. 아마 책임지고 진행해야 할 신사업들을 미뤄놓고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피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주어진 일만 해도 되던 시기에는 일과 삶이 분리가 됐었다. 그리고 그게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 믿었다. 아마 그것은 내가 직장에서 충만함을 느끼지 못해서, 애써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이 일이 나에게, 남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삶과 일이 분리가 힘든 것이겠지.. 남은 이들이 잘해주리라 믿는다. 믿고 맡기는 것도 능력이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12:30을 지나고 있었다. 내 사무실 전화가 핸드폰으로 착신되는 것은 잠시 막아놨으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꽤 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불편한 마음에 잠이 확 달아났다. 한국에서 챙겨 온 드립백 커피를 하나 뜯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데워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물 조절을 실패한 탓에 커피와 물 사이 어딘가의 농도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따뜻한 차를 마시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앞선 두 편이 첫날 새벽에 완성된 글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새벽들을 글을 쓰며 지새야할지..


7시쯤 되니 동생과 아내가 일어났다. 씻지도 않고 근처 카페로 차를 몰고 나갔다. 미국은 차가 없으면 다니기 힘들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땅이 워낙 크니 오밀조밀 무언가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생활권을 인식하는 개념도 도보가 아닌 차로 얼마나 걸리냐였다. 씻지도 않고 대충 걸치고 카페에 들어가 드립커피를 한잔 시켰다. 여기는 pour over라고 표기하는 듯했다. 원두의 종류는 우리나라보다 더 다양한 듯했다. 에스프레소 베이스 메뉴는 다 있고, 필터커피 메뉴도 매장마다 전부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은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 말고는 바로 필터에 내려주는 커피숍들은 잘 없다. 느리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을지로에 포비 같은 카페들도 푸어오버 방식을 고집하다 보니 손님이 많은 점심에는 주문이 말도 못 하게 밀린다. 효율을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선 무언가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하는 것은 소비자가 대개 용인하지 않는다. 특별한 날이나 특별한 시간이 되어야 시간을 길게 쓰고 비로소 대화를 하는 것이다.


숙소를 돌아가 나갈 준비를 하다가 졸음이 몰려왔다. 한국시간으로 보면 이틀을 하루에 네 시간, 세 시간 자고 버틴 것이니 피곤할 만도 했다. 한 시간쯤 눈을 붙이고 씻고 점심을 먹으러 나가며 여행을 시작했다. 한국시간으론 한참 잘 시간이라 그런지 뇌가 기능을 멈춘 느낌이었다. 허기를 달랠 겸, 인 앤 아웃 버거에 가서 햄버거 세트를 시켜 먹었다. 맛은 그냥 상상한 그 맛. 그런데 그 가격에 이 정도 깔끔하면 꽤 괜찮은 식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도 느꼈지만 우리나라처럼 싸고 깔끔하고 맛있는 식당은 잘 존재하지 않는다. 가격대로 서비스, 위생, 음식재료,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 상식인 나라가 많다.

기계에서 뽑아먹는 음료는 언제든 리필이 가능했다. 굳이 큰 사이즈를 시킬 필요가 없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Row DTLA라는 몰이었다. 특이하게 LA최대의 우범지역인 Skid Row를 지나면 철제 담장으로 둘러싸인 곳에 엄청 Fancy 한 쇼핑몰이 자리해 있다. 안에 있는 가게의 콘셉트들도 독특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꾸며진 곳이 많았다.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한 옷가게 매대를 옛날 잡화점처럼 꾸며놓고 파는 물건과 전시하는 물건을 뒤섞어 논뒤 그중 몇 개는 기념품으로 파는 곳이었다.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저 중 절반은 그냥 장식품이다.
먹거리 마켓에는 한국 치킨집 줄이 제일 길었다. 와인샵에는 와인마다 설명을 써서 걸어놓은 것이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느꼈다.

구경을 마치고는 할리우드로 향했다. 파라마운트 본사의 주차장에 차를 댄 뒤에 걸어서 할리우드 이곳저곳을 탐방했다. 아메바뮤직이라는 아주 큰 레코드샵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고,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차이니즈 시어터에서 이병현과 안성기의 손금도 확인했다. 그러나 내 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형형색색 간판의 네온사인이었다. 색의 배합도 다양하고 글씨체도 너무 예뻤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미국의 모습이 이런 거였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무인택시 Waymo를 타고 파라마운트 건물까지 돌아왔다. 신기하면서도 섬뜩했다. 사람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활동들도 곧 인공지능이 대체하진 않을까 하는 위기감도 들었다.

미국에서 지낸 지 3년이 넘은 동생에게 한식은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들과 먹는 음식이었다. 다른 것은 다 나와 아내의 선호를 다 맞추어 본인이 모든 것을 준비하면서도 식사만큼은 한식을 고집했다. 원래도 한식을 좋아하는 동생이라 나도 군말 없이 따랐다. 오늘 저녁은 진솔국밥이라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LA서 유명한 국밥집으로 분점까지 있는 것 같았다. LA에서의 식사는 일단 서울물가에 3배를 생각하면 딱 맞았다. 팁 20%에 1500원에 육박하는 환율까지.. 달러표시된 금액으로 대충 계산하면 큰코다치기 일쑤였다. 이날도 국밥 세개에 부추전 하나를 먹고 한국돈으로 15만원 가까이를 지출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사가 양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늘 식사 하나씩에 사이드메뉴까지 먹었지만, 여기선 그냥 한 그릇만 먹어도 충분히 넘쳤다. 매우 비싸지만, 그렇다고 “아 비싸게 내고 별로 먹지도 못했다”는 말을 내뱉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을 싸갔다. 외식물가가 비싸니 싸가는 건가 싶었다.


저녁을 먹고는 그리피스 천문대로 차를 몰았다. 라라랜드에 나와서 한국인들에게 더 유명해진 곳이었다. 나는 야경보다도 산불을 확인하고 싶어서 갔으나 산불이 난 지역에서 그을음이 피어오르는 것 말고 불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생은 미국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배려심이 깊다고 했다. 사소한 생활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대화를 하자마자 한국인 여행객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우리가 사진을 찍는 와중에 치고 들어와서 자리를 뺏었다.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는데 몰두해서 주위 사람들이 사진을 찍든말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마음이 조금 씁쓸했다.

팰리세이드 산불 지역에서는 짙은 연기만 피어올랐다.

미국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미국문화를 간접적으로 많이 접해서 미국식 사고방식과 문화에 대해 나름 이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오산이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순 없지만, 미국인들은 자유로운 듯하면서 보수적이고 서로를 신뢰하는 듯하면서 안전은 좋지 못한 곳이 많았다. 넓은 땅만큼이나 내가 참 좁은 곳에서 아등바등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저녁이었다.


분명 시차적응에 실패해 매우 피곤했다. 그런데 무언가 마음 한 부분이 개운한 느낌이었다. 건강한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운동을 열심히 해서 실제로 건강상의 지표들이 좋은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날 느낀 건강한 삶은 내면의 건강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넓은 땅만큼이나 미국인들의 삶은 복작거리지 않은 것 처럼 보였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주고 받고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미국이었다. 땅이 넓으니 나의 개인 영역을 서로가 존중해주었다. 아무도 내 패션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나다운 삶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것을 남과 즐겁게 공유할 수 있는 여유. 그런 건강한 문화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삶이 행복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 무엇인지. 왜 한국이 살기에 어렵다고 느끼는지.. 이런저런 만감이 교차한 저녁이었다.

Pulp라는 Pale Ale종류의 맥주를 먹었는데, 샌프란시스코 브루어리에서 생산되는 맥주라고 했다. 오렌지향이 아주 상큼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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