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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미국서부에서 만나다-2> First Class

편리함이 곧 가격인 세상

by 모블랙


인천->LA or 뉴욕은 미주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투톱 노선이다. 따라서 프레스티지(비지니스)석은 구경하기도 힘들고 이코노미석도 미리 하지 않으면 마일리지로 예약이 어려운 편이다. 다행히 토요일 저녁에 출발하는 LA 편 이코노미석이 대기예약을 걸어놓았더니 자리가 생겨서 두 달 전쯤 예약에 성공했다. 몇 년간 모은 마일리지가 꽤 많이 쌓여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도 가능한 수준이어서 매일같이 대한항공 예약시스템을 살펴봤다. 산불이 난 뒤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일리지편 자리가 계속 생기는 것이었다. 이코노미는 당연하고 프레스티지석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아마 여행사들이 미리 부킹을 해놓고 모객을 한 뒤 배정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산불 이후로 모객에 실패하거나 취소되어 예약을 컨펌해야 하는 최종시점에 미리 잡아놨던 마일리지석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삼 일 전부터 조금 더 섬세하게 상황을 살폈다. 출발기준으로 언제쯤 좌석이 풀리는지, 기준은 무엇인지 미리 고객센터를 통해 점검했다. 운도 매우 따라줬다. 비행기 시간이 연착되면서 웹이나 앱을 통한 예약변경이 불가능해졌다. 출발시간 변경 편은 사람을 거치지 않고는 변경이 불가능한 정책이 있는 듯했다. 다시 말해, 나와 같이 이코노미석을 끊어놓고 프레스티지석이 자리가 나면 업그레이드를 하려는 고객들은 모두 고객센터를 통해서만 변경할 수 있었다. 고객센터는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됐다.


한국시간 18일 오전 7시, 알람이라도 맞춘 듯 눈이 떠졌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좌석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만약 새벽에 자리가 났다면 신규로 발권하지 않는 이상 고객센터 오픈 전까지는 모두 대기해야 하므로 기회가 있겠다 싶었다. 검색하니 일반석(3), 프레스티지석(0), 일등석(2). 일등석이 두 자리가 났다. 일등석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기에 마일리지가 얼마가 공제되는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걸면서 컴퓨터를 켜고 동시에 마일리지 공제표를 확인했다. 2인기준 이코노미 마일리지는 70000, 비즈니스는 125000, 일등석은 160000. 일등석 업그레이드엔 9만 마일이 필요했다. 다행히 여유가 있었다.


7:03 고객센터에 전화가 연결됐다. 내 인적사항을 말한 뒤 일등석 자리부터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성공. 몇 년 동안 한 땀 한 땀 모은 카드 마일리지를 톡톡히 사용했다. 9만 마일을 사용해 업그레이드한 일등석은, 마일리지 효율로 따지면 1마일당 100원 이상의 값어치를 해내었다. 대한항공 평균 마일리지가 1마일당 20~30원 가치를 하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이득을 본 셈이다. 그 이후로 프레스티지석은커녕 일반석 세 자리도 금방 매진되었다. 출발 직전까지 또 풀리는 좌석이 있나 확인을 해 보았으나, 내가 예약한 일등석 두 자리 말고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명절을 낀 주말출발 항공편이라 임시공휴일도 지정됐겠다 인기가 많은 시간대였던 것 같다.


끝끝내 추가로 마일리지편은 풀리지 않았다.

저녁 8시 출발 편이라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공항까지는 택시로 한 시간이면 가기 때문에 오전에 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나는 모닝캄 회원이라 프레스티지 라운지가 이용이 가능해서, 일등석을 예약하기 전에도 라운지에 미리 들어가서 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등석 라운지는 뷔페가 아니고 정식으로 한 상이 나온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다. 운 좋게 일등석을 예약해 퍼스트클래스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출발 4시간 전, 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절차도 일등석은 특별했다.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 수속을 진행하러 들어가면 프레스티지석 고객들이 전용 카운터에 줄을 서 수속을 하고 있었고 그곳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아예 고급스러운 공간에 일등석 전용 체크인 라운지가 있었다. 내가 할 일은 들어가서 캐리어를 맡기고 소파에 앉아서 준비해 준 음료와 다과를 즐기는 것이 다였다. 그럼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가격이 곧 서비스. 대단한 서비스는 아니지만, 이 편리함과 호사를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있구나라고 처음 느끼게 해 준 순간이었다.


일등석 체크인 라운지 전경.


이미그레이션은 일등석이라고 구분되어있지 않았다. 출국장에 똑같이 줄을 선 후 심사대를 통과했다. 인천공항에 시스템이 바뀐 이후에 수속시간이 길어졌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평소보다 보안검색대가 덜 운영 중이었고, 훨씬 오래 걸렸다. 마치 유럽에서 출국하는 것 같았다. 간단하게 필요한 것들을 사고 퍼스트클래스 라운지로 입장했다. 입장 시 티켓을 보여주니 일등석라운지 서비스라며 수하물에 달 수 있는 열쇠고리를 제작해 주겠다고 했다. 이름과 연락처가 포함되어 있는 금속재질의 열쇠 고리었다.

라운지 안으로 입장하니, 그동안 다녔던 라운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넓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시간이 5시쯤 되어서인지 직원이 바로 식사자리에 착석할 것을 권했다. 메뉴는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부터 샌드위치까지 다양했고 주문하면 조리를 시작하며 20분 정도 걸린단다. 아내는 안심스테이크를 나는 김치찌개한상을 시켰다. 술도 셀렉션이 좋았다. 싱글몰트류도 수준이 높았고, 꼬냑은 XO등급이었다. 식전주로 꼬냑을 온더록해서 먹고 식사를 마쳤다. 갑자기 빈속에 도수가 높은 술을 마셔서인지 소화가 안돼서 일등석에서 음식과 술을 많이 못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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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Class 라운지에서 나온 김치찌개와 양주 콜렉션


출발시간이 조금 더 지연되었다. 라운지에서 세라젬에 누워 몸을 좀 풀고 있다가 시간에 맞춰 비행기를 타러 이동했다. 연착되어 이미 탑승구 앞에는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등석 고객은 제일 앞에 가기만 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게 일등석 먼저, 일등석 위주였다. 체크인할 때 옆자리를 달라고 했더니, 이 비행기는 신형모델로 옆자리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자리가 아니고 방이 있었다. 그 큰 비행기에서 일등석은 단 여섯 자리 었고 그때만큼은 뭔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앉자마자 승무원들이 차를 권하고 식사에 대해 디테일하게 조율했다. 서빙시간, 방식, 메뉴 등등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주는 시스템이었다. 정말이지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약간 컨디션이 안 좋다고 이륙직후 먹는 식사를 조금 미루고 싶다고 하니, 당연히 맞춰드리겠다면서 이불을 펴드릴까요?라고 먼저 물어보았다. 덕분에 이륙하자마자 다른 승객들은 식사할 때 나는 두 시간정도 자고 회복한 후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중간에 자느라 라면은 못 먹고, 소화가 안되어 전부 한식으로 먹었다. 단순히 데우는 식사가 아니고 방금 주방에서 조리한 컨디션으로 음식이 나왔다. 최근에 먹은 한식 중에 가장 훌륭했다. 위스키는 기본이 조니워커블루부터 시작했고, 와인 셀렉션은 대부분 병당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듯 보였다. 차나 음료도 가장 고급 브랜드였고 모든 것이 최고급이었다.


승무원 두 명이 단 6명의 고객을 위해 비행기간 내내 교대로 상주하며 수시로 고객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다. 방해받을 만할 때는 안 나타나고 필요할 땐 어김없이 옆에 기다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자고 일어나니 그 소리를 듣고 따뜻한 차를 우려내어 예쁜 컵에 담아서 다과와 함께 내왔다. 당연히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불과 2분 만에 이루어진 서비스였다. 아내는 내리고 나서 돈을 많이 벌어야 될 이유가 생겼다고 다짐했다. 나는 신혼여행때 비즈니스도 못 태워준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 기회에 만회한 것 같아 기뻤다. 한 편으로는 부모님을 앞으로 계속 좋은 비행기를 태워드려야 되는데.. 라며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일등석 전경

식사와 주류 메뉴판

첫끼, 한식정찬. 전채코스만 양식의 캐비어메뉴로 변경을 요청했고 기꺼이 서비스해주었다.

두 번째 식사. 역시 양식이 아닌 우거지갈비탕으로. 진심으로 맛있었다.

아무 피로함 없이 열한 시간의 비행이 끝났다. 내리기가 아쉬울 정도로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보통 장거리 노선은 첫날에 잠을 거의 설치며 오기 때문에 몸이 정상이 아닌데, 오히려 체기를 회복하며 컨디션이 좋아진 채로 비행이 끝났다. 시작이 좋았다.


퍼스트클래스인 덕에 가장 먼저 비행기에서 내려 가장 먼저 입국수속을 했다. 미국은 입국시 질문이 까다로워 시간이 오래걸리는것으로 유명하다. LA공항같은 경우는 보통 나오는데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나는 착륙한지 단 30분만에 짐을 찾고 공항을 빠져나왔다.공항에서 동생이 여자친구와 함께 마중을 나왔고 렌터카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본인도 자기 친구들과 여행 중이었는데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 우리를 에스코트해 준 것이다. 너무 고마웠고, 한 편으로는 저런 심성이면 기꺼이 가족의 일원으로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도 같은 마음이라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차를 빌리는 것은 꽤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스템이 엉망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급한 것은 고객이지 렌터카 직원들이 아니었다. 심심치 않게 동양인, 특히 한국인들의 Work Ethic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들은 적 있다.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하게 되었다. 지구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이 센 미국,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대도시의 일처리가 이렇다니..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별점테러당하고 망했다.


한 시간여 씨름한 끝에 차를 타고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동생은 LA 올 때마다 한인타운에서 한식을 먹는다며, 본인이 좋아하는 보쌈을 사달라고 했다. 여태까지 한식만 먹어서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꺼이 한인타운을 방문했다. 생각보다 별 것은 없어 보였고, 그냥 한국말 쓰면서 살 수 있는 동네구나 싶었다.


보쌈중자에 밀면하나 멸치국수 하나를 셋이 나눠먹고 팁까지 우리나라돈으로 17만원 쯤을 지불했다. 미국물가가 바로 체감이 되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집에서 웬만하면 해 먹으려고 하지.. 뉴욕이나 엘에이에서 연봉 1억은 저소득층이라더니 진짜 현실이었다. 딱 서울물가에 세배정도 곱하면 대충 맞았다.


식사를 하곤 옆에 K마트에 들러 먹거리들을 구경했다. 영등포 이마트에 온 듯 친숙한 물건들이 많았고, 백인 흑인들이 뒤섞여 한국 식품들을 사는 것은 흥미로웠다.


도시는 어두웠고, 거리는 위험해 보였다. 절대 차 안에 가방을 두지 말아야 된다는 조언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피곤이 몰려왔다. 고속도로는 다운타운을 끼고 길게 뻗어있었고, 동생과 오랜만에 깊은 대화들을 나누며 드라이브를 했다. 좋은 첫날이었다.

매대에 메로나가 꽤 좋은 위치에 진열되어 있었다. “올때 메로나~”는 미국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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