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교수가 되었다.
동생이 모교의 Tenure-Track에 오퍼를 받고 사인했다. 지난가을이었다.
연구 실력과 업적으로는 이미 자기 분야의 또래에서 견줄자가 없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비슷했다. 학계에선 그의 공로와 실적을 인정하여 그를 Bright Spark Lecture로 선정하여 수상했다. 이 상은 동생이 연구하는 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학회에서 매년 전 세계의 딱 한 명만 선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으로서 지켜본 그의 삶은 매우 고단했다. 박사과정 중에는 지도교수가 급작스레 유명을 달리했다. 제 앞가림도 하기 어려울 때, 동생은 작고한 선생의 유업을 소화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관찰자적 시선에서 본 학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연구 성과가 좋으면 만사형통일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지도교수를 만나느냐에 따라 연구자의 운명은 좌지우지되는 것 같았다. 박사과정을 졸업한 후, 지도교수의 추천아래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성과를 쌓아야 하는 시기, 동생은 스스로를 추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정성스러운 프로포즈들은 친절한 거절과 무응답으로 점철됐다. 대부분의 지원들은 interview까지 가기도 어려웠다. 거절을 표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으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도교수의 보증이 없다는 것. 야속한 운명이었다. 가족들도 속상했다. 운명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다. 미 서부에서 post-doctor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더 넓은 세상에서 더 깊은 공부를 하였다. 본인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은 모두 미국에 있었다. 그들과 닿기 어려워서 그렇지, 기회만 닿는다면 연구가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박사를 졸업한 지 5년, 동생은 본인의 20대 전부를 바친 모교의 정규직 교수가 되었다. 국내박사 출신이자 최연소. 그의 연구 분야에선 매우 이례적인 임용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 미국 여행은 가족끼리의 여행이자, 축하의 자리로 기획되었다. 당초 엄마도 함께 하고 싶어 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함께 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와 아내, 그리고 동생. 셋이서 2주 넘게 서부를 돌아보는 여행계획을 세웠다. 동생이 미국생활을 정리하며 귀국 편에 오르기 때문에 짐이 많았다. 그 짐까지 함께 운반해 주는 소소한(?) 역할도 부여받았다. 설을 끼는 일정이라 평소보다 길게 기간을 잡을 수 있었다. 사실 계획을 세울 당시에는 내 운명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선거를 치르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소임을 다하고, 투여한 노력을 인정받아 리더도 내 휴가를 흔쾌히 허락했다.
LA->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년->새크라멘토->샌프란시스코로 이어지는 서부 일정은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채워졌다. 서부 대도시 중 위쪽 시애틀을 제하면 명소들은 다 둘러보는 셈이었다. 예전에 칠레에 가기 위해 텍사스에서 잠시 출입국을 한 적은 있으나, 여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와이를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적 있지만, “진짜 미국”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돌이켜보면 어려서부터 미국 문화의 영향을 엄청나게 많이 받고 큰 것 같다. 분명 내 자아의 일부는 그것과 닿아있었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과, 서부힙합들. 한국사회에서 배우기 힘든 자유로움과 유연한 부분들은 그곳에서 기인하는 것 같았다. 처음 가는 LA지만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LA가 미국 문화계의 중심이자 그곳에서 생산되는 문화예술 산물들을 세계인이 누리기 때문이 분명했다.
출발하기 약 열흘 전, LA에서 대규모 산불이 났다. 언론에서는 이를 아포칼립스에 비유했다. LA북쪽의 부촌들을 중심으로 할리우드 스타들의 대저택들이 불에 타는 것이 방송을 탔다. 이를 틈타 방화와 약탈도 기승을 부렸다. 주위에서는 이런 상황에 LA를 가는 것을 매우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 역시도 모든 LA일정을 취소하고, LA에서의 6일을 근처 샌디에이고나 위쪽 시애틀로 돌리는 대안을 알아보았다.
문제는 동생이 예약한 LA에서의 수많은 예약들이 대부분 “환불이 불가하다”는 점에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기업들이 소비자중심적인 정책을 펴지 않으면 언론의 뭇매를 맞는다. 그뿐 아니고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어 상당기간 영업이익에 큰 손실을 입는다. 그러나 미국은 조금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았다. LA에서의 숙소는 원래 산타모니카 해변의 아파트를 빌렸었다. 그러나 그곳은 팰리세이드 산불과 매우 밀접한 지역이었다. 육안으로도 산불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예약한 이 숙소의 호스트는 이런 상황에도 전액환불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생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얘기했으나, 평소 주 업무가 “협상“인 내 입장에선 이대로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에어비앤비 본사를 통해 해당 상황이 특수하다는 것, 그리고 화재지역 인근 숙소에서 전액환불받은 사람이 이미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전액환불을 요청했고 승낙받았다.
그래서 다른 예약들은 그대로 수행하고 일단 숙소만 산불과 멀리 떨어진 LA다운타운 남쪽의 어바인이라는 지역에 잡았다. 여기는 샌디에이고와도 가까운 위치여서 LA의 도착 후 상황을 관망하며, 산불로 인해 여행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샌디에이고나 조슈아트리 등 인근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플랜 B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