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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미국 서부에서 만나다-10> 캠퍼스라이프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by 모블랙

캐년투어를 마치고는 Davis에서 2박 3일을 보내기로 했다. 이 작은 마을은 UCD라는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생긴 마을인데, 미국에는 이런 마을들을 캠퍼스타운이라고 부른다. 해서 주민들 대부분이 학생, 교수, 교직원, 각종 서비스 노동자, 학생을 상대로 사업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만큼 Davis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들이다. 또 대학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구성되니 보편적인 교육 수준이나 시민의식이 높아 동생말로는 미국 내 가장 안전한 지역 중 하나라고 했다. 실제로 데이비스 다운타운을 돌아다녀보니 고작 서너 명의 노숙자만 만났을 뿐이고, 심지어 한 노숙자는 책을 몇 권 끼고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신림동 고시촌에 폐지 줍는 할아버지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었는데, 40까지 오랫동안 사법고시를 공부하다가 그대로 거기서 늙어버린 인물이었다. 저 노숙자도 만학도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데이비스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새크라멘토 공항에서 우버를 불러 데이비스까지 왔다. 나와 아내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Holiday Inn에 숙소를 잡았고, 동생은 동생이 살던 집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어느 가정집의 in-law unit에 살았다. in-law unit은 말 그대로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이 집에 놀러 왔을 때 그들을 위한 숙소로 마련된 공간이다. 혹은 노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가족들이 서로 독립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전통적으로 기능한 듯 보였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을 짓고 사는 미국인들은, 자기 집을 구할 때 대부분 in-law unit이 딸린 공간을 구한다고 했다. 시대가 흐르며 in-law unit은 airbnb나 학생을 위한 자취방으로 많이 사용되는 듯했다.


그날 저녁, 동생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인 Joseluis를 소개해준다고 했다. 그는 에콰도르 출신인데, 동생이 Davis에 처음 와서 적응을 잘 못하고 있을 무렵 동생을 엄청 많이 챙겨주고 함께 어울려 주어 동생이 많이 의지했던 친구라고 소개했다. 원래 그들이 좋아하던 Pub의 영업시간이 끝나서 다운타운에 있는 Woodstock’s Pizza Davis라는 가게로 갔다. 이름만큼이나 가게 내부에는 rock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늦은 비행기로 돌아온 탓에, 약속시간은 밤 9:30이 될 수밖에 없었고 미국 특성상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온 동네 학생들이 그 가게에 다 몰려있는 듯했다. 아주 착한 친구였다. 아내가 영어를 연습하고 싶다고 대화 초반에 말한 것을 기억해서, 아내가 경청하고 있으니 일부러 아내에게 말도 걸어주고 주위사람들을 세심하게 챙길 줄 아는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보통의 에콰도르 사람들의 삶에 대해 질문했고, 그는 덤덤하게 마약카르텔과 에콰도르 내부의 불안한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 미안해졌다.


한참 얘기를 하던 도중 좋아하는 음악 얘기가 나와서 대화가 그쪽으로 빠졌다. 나는 미국힙합을 오랫동안 좋아해서 들었고, 최근 이슈였던 Kendrick과 Drake의 싸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그런지 돌아가는 우버에서 흑인 우버기사와도 힙합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Chris Brown을 듣던 그에게 힙합얘기를 시작하며 급기야는 ATCQ까지 언급하니 그는 정말 놀라는 눈으로 뒤돌아 봤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 택시기사가 백인을 태웠는데, 그가 한국 음악의 팬이라면서 산울림이나 송골매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


다음 날 점심은 Katherine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캐서린도 동생이 데이비스에서 만난 친구였는데, 그녀는 작년 11월에 그녀의 남자친구와 한국을 방문했었다. 방문 전 동생이 그녀를 나에게 소개해줬고, 그녀의 계획 초안을 받아서 내가 현지인의 입장에서 다시 스케줄을 조정해 주고 식당을 추천해주곤 했다. 당시에 그녀는 말 그대로 한 보따리의 간식을 미국에서부터 들고 와서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가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오후에 잠깐 시간을 내어 식사를 함께 하고 회사인근인 종로와 명동을 가이드해 주었다. 그게 고마웠는지, 그녀는 데이비스에 우리가 오면 맛있는 식당에 데리고 간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어딜 가나 차가 없이 이동이 어려웠다. 일단 대중교통이 잘 안 되어있고,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상업시설들이 굳이 밀집되어있지 않은 탓도 있었다. 캐서린은 전날 시간을 맞추어 우리를 픽업하러 온다고 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나와 아내를 먼저 호텔에서 태우고, 동생 자취방으로 가 동생을 태우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동생은 학생들 사이에선 차 있는 사람들이 늘 약속을 잡게 되면 Ride가 필요한지 물어보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편차가 커서 그렇지, 교육을 받은 시민들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굉장히 높았다. 그녀는 우리를 Osteria Fasulo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아기자기한 그 식당은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평생에 먹어본 이탈리안 중 세 손가락 안에 무조건 꼽힐 만한 수준이었다. 온갖 나라에서 다양한 수준의 별의별 음식을 경험해 보며 더 이상 음식에서 새로운 감동을 느끼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식당은 기대 이상이었다. 캐서린은 이 식당을 Davis의 숨은 보석이라고 했다. 우리를 서빙해 준 미국인 아주머니는 매우 친절하고 프렌들리 했다. 그녀와 나누는 스몰토크가 음식의 맛을 끌어올려주는 듯했다. 만약 샌프란시스코나 새크라멘토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식당은 차로 1~2시간 거리이니 시간을 투자해 방문해 볼 만하다.

식사를 하면서 Instagram얘기가 나와서 캐서린에게 계정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계정을 알려주었다. 팔로워가 만 명 가까이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너 인플루언서였냐고 물어봤더니, 그녀는 그냥 평소에 옷 입는 사진을 올리는 계정이라고 답했다. 재밌는 것은 그녀에 계정에는 그녀에 관한 어떤 정보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 나이 직업 사는 곳 등 모든 것이 비공개였고, 얼굴을 모자이크 한 채로 데일리룩만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일종의 ‘Social Experiment’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녀가 공부하면서 배운 Data Science의 연구방법을 SNS에 적용해 실험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그녀의 개인적인 정보를 올리지 않는 것에 대해 ’ 보는 사람들의 꿈을 자극해야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얼굴이나 직업등을 올리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고 인식을 하게 되나, 그런 것을 배제하고 올리게 되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쉽다는 말이었다. 꽤나 재밌는 관점이었다.


점심을 마치고는 다시 데이비스 다운타운으로 돌아왔다. 차로 UCD의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았다. 정말 큰 학교였다. 미국은 대학마다 전공마다 강한 학교가 달랐는데, 데이비스는 특히 농업이 유명한 학교였다. 학교의 마스코트도 젖소다. 그래서인지 캠퍼스 안에 다양한 동물들이 꽤 많았다. 특이한 것은 캠퍼스 안에 정육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동물이 죽으면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고기를 학교 내 정육점에서 팔았다. 식용을 위해 키운 가축이 아니다 보니 넓은 거주공간과 사람의 애정(?)이 깃들어 있어 고기의 질은 매우 좋은 편이었고, 돈이 없는 학생들은 그곳에서 질 좋고 값싼 고기를 손쉽게 구매하여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일종의 윤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이곳은 비공식적인 정육점이었다. 간판도 없고 카드도 받지 않고 아주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곳이었다.

투어를 마치고는 Temple Coffee라는 카페를 갔다. 새크라멘토에 본점을 두고 있는 이 커피 프랜차이즈는 데이비스에서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카페라고 했다. 나 역시도 동생이 원두를 가져다주어 주말마다 커피 향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급 피로가 몰려와서 나는 좀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10분 정도 걸어서 동생 집으로 갔다. 방은 침실과 화장실 그리고 작은 거실로 되어 있었는데, 내 대학생활 자취방을 떠올리게 했다. 동생은 이 가격에 이런 방이 없다고 했으나, 나는 어쩐지 짠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모교의 교수가 돼서 귀국길에 오른다니 한 편으론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한숨을 자는 사이 동생과 아내는 Davis캠퍼스 투어를 하고 차까지 빌려서 왔다. 우리나라의 Socar같이 이곳에는 Zipcar라는 회사가 단기로 차를 빌려주었다. 나는 솔직히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동생은 꼭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나를 차에 태워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20여분 달려 Dixon이라는 동네에 도착했다. 그곳에 있는 Ruhstaller라는 브루어리에 방문했는데, 맥주 브루어리 겸 농장이었다.


동생 말대로 나는 이곳이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브루어리와 이어진 농장에서 키우는 닭, 오리 등의 동물들은 그냥 자유롭게 풀어져 있었다. 사람들과 뒤섞여 소파 옆에도 올라왔다가, 맥주안주도 조금 뺏어먹다가, 큰 놈이 작은놈을 괴롭혔다가(나는 어쩐지 이 대목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떠올렸다), 목청을 높여 울어재꼈다가, 근처 연못에 풍덩 빠졌다가 다시 몸을 털고 나왔다가. 너무 귀엽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주인도 정말 쿨한 것이, 아이를 등에 둘러메고는(의자 모양의 백팩에) 장작을 패며 손님들에게 모닥불을 피워주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서쪽 지평선을 향해 넘어가고 있었고 점점 볼을 스치는 바람은 찬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모닥불로 자리를 옮겨 불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회사 고민도 하고, 내 인생에 대해 고민도 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맞는 것인지,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가질 것인지.

라스텔라의 모닥불 앞에서의 순간은 이번 ‘미국여행’이란 문단의 ‘쉼표’ 같은 역할을 해 내었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붐벼 이 큰 농장에 앉을자리가 없다고 했다. 소파와 의자는 닭과 거위들의 털과 배설물로 지저분했으나 미국사람들은 별 신경 안 쓰고 털썩털썩 잘 앉았다. 대부분의 옷차림이 남자는 청바지 여자는 레깅스였다. 조금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옷들. 이번 여행에서 느낀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이란 내 관점에서 ’별 중요치 않은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아이들은 넘어지고 달리고 다시 넘어지고, 닭도 쓰다듬었다가 강아지와 뛰어놀았다가 제 방식대로 농장을 즐기고 있었다. 부모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자식들을 바라보았지만 옷이 더러워진다느니 동물들을 조심하라니 하는 잔소리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남을 의식해서 신경 쓰고 꾸미고 온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그 순간에, 함께 있는 친구와 가족과의 시간에 집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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