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캐년투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는 길에 자이언캐년이라는 국립공원을 잠깐 들러 구경하고 차를 몰아 베가스로 가는 일정이다.
동생은 미국생활을 하며 국립공원 투어를 한 것이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미국인들은 아주 예전부터 휴가가 되면 가족들과 함께 캠핑카를 몰고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 꽤 많은 국립공원이 산재했고, 각 국립공원마다 가지고 있는 모습이 제각각이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자이언파크 비지터센터에 들러 어디 어디 갈지를 대충 가늠하고는 미리 찾아두었던 식당에 갔다. Oscar’s Cafe라는 식당이었는데, 자연 친화적인 국립공원 안에 있어서 그런지 야외에 있는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다 보니 온갖 종류의 새들이 근처에 날아와서 짹짹거리며 호시탐탐 내 아침을 탐하였다.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안내에 따라 나도 눈을 부릅뜨고 새들과 눈싸움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자이언파크는 앞서 둘러본 국립공원들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비지터스 센터에서 본 짧은 홍보영상 속 마지막 문구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국어로 직역하자면 “야생은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 속에서 보호가 필요하다.”정도의 문장인데, 의역하자면
<자연은 인간이 나서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인간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국립공원을 보호하려 하지 말라. 인간의 역할은 국립공원 속에서 스스로의 안전만 신경 쓰면 될 존재이지, 그 이상으로 자연에 무언가를 해서는 안된다>
라고 읽혔다. 정말 신선했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속은 결국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주-종관계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인가 책임을 가지고 노력해야 된다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셔널파크를 거닐다 보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 하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넌 그냥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야”
창조주가 있다면 아마 인간에게 자연좀 냅두라고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두 시간여를 더 달렸다. 끝없는 황무지를 지나다 보니 지평선 너머로 삐쭉삐쭉한 형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차를 몰아가니 높은 첨탑들이 눈에 들어왔고, 더 가까이 가니 라스베이거스가 펼쳐졌다. 사막 위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도시. 나에게 라스베이거스는 영화세트장처럼 이질적이었다. 마치 트루먼쇼에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라스베이거스는 Sin City라는 별명이 있다. 미드를 보다 보면 심심치 않게 라스베이거스를 신시티라고 지칭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자극할 만한 것은 이곳에 다 보아놓은 듯했다. 수많은 백화점과 명품숍들, 그 안에는 모두 카지노가 들어차 있었다. 에펠탑, 베니스 등등 세계 각 국의 랜드마크 형상을 한 건물들이 즐비했고 세계의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들이 그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쇼를 펼쳤다. 길을 걷다 보면 매 블록마다 대마를 파는듯한 가게들이 성행하고 있었고, 어디를 가더라도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마 대마냄새지 싶다. 화려한 전광판은 각 호텔들이 보유한 거대한 클럽들을 보여주며 관광객들에게 놀러 오라고 손짓했다. 거리는 추운 날씨에도 헐벗은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며 유혹했다. 찍고는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 남자들은 작은 카드를 여자들한테까지 나눠주는데 출장매춘 명함이었다.
일찌감치 먹은 아침이 체하는 듯했다. 백화점 건물 안에 만들어 놓은 베니스를 닮은 수로들에는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는 볼 것도, 살 것도 딱히 찾지 못했다. 동생이 한 턱 내겠다며 데려간 고든램지 버거에서는 먹기 전부터 체한 느낌이 들어 아내에게 소화제 챙긴 것이 지금 가방에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체하지는 않았다. 20대 초반에 왔으면 더 흥미롭게 느꼈을까? 이 도시는 나와는 정말 맞지 않는 듯했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온갖 곳에는 정작 사람냄새는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지 궁리하는 자본만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요즘은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금세 중심을 잃기 쉽다. SNS는 더욱 사람들을 온라인으로 내몰고 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모두가 외로운 세상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숙소에 있는 루미큐브를 했다. 그게 베가스에서 가장 재밌는 시간이었다. 데이비스에 돌아가는 다음날에는 Gabi’s Coffee라는 조선시대 콘셉트의 커피집을 갔다. 고종이 커피를 우리 땅에서 처음 접한 인물이라는데, 그 내러티브를 그대로 살려 커피집을 꾸며놨다. 벽면에는 명성황후의 사진도 있었다. 종업원에게 아내가 명성황후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잠깐 소동이 났다. 재밌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한 동안 재밌게 본 “전당포 사나이들”의 실제 촬영장이자 사업장인 <Gold&Silver Pawn Shop>에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릭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이 시리즈에 가장 재밌는 점은, 전당포 주인들이 협상을 끝내주게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가치 있는 물건이라도 제값(내가 생각한 가격)에 거래할 수 없다면 깔끔하게 포기한다. 난 그 전당포 아저씨들에게 협상의 기술을 배웠다. 저녁 즈음 새크라멘토에 도착하니 공항에 예술작품이 우리를 맞았다. 비행기 탑승구까지 슬롯머신이 따라왔던 베가스와는 다르게 사람냄새가 났다. 난 드디어 살 것만 같았다. 내 기억 속 Las Vegas는 좀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Less Vegas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