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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미국 서부에서 만나다-16> 마지막 이야기

가족의 의미

by 모블랙

길었던 미 서부 여행도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출국을 하루 앞둔 날, 우리는 아웃렛을 가기로 했다. 동생은 예전에도 미국 아웃렛이 정말 싸다며 자주 이야기를 했다. 해서 한국에서 계획을 짤 때에도 아웃렛에서 하루종일 옷을 사는 것을 마지막 날의 여행일정으로 계획했었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아웃렛 특성상 모두 외부에서 쇼핑을 해야 하는데 비가 이렇게 와서 괜찮을까는 의견을 조심스레 밝혔다. 동생은 예보를 보니 맞을만한 수준인 것 같다고 했고, 아내는 내 말에 순수하게 분노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뚫고 가겠단 열망이 읽혔다.


10시 오픈에 맞춰 가기 위해, 동생 여자친구를 회사에 내려주고는 그대로 차를 몰아 아웃렛으로 향했다. 아웃렛까지 가는 길은 거리가 조금 있었다. 그래도 크게 막히지 않은 탓에 9:40분쯤 아웃렛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생은 이미 지난 블랙프라이데이에 강의를 하기 위한 옷들을 다 사서, 더 이상 살 옷이 없다고 했다. 선물을 하나 사줄까? 물어보니 그마저도 거절했다. 그것보다 그냥 근처에 스타벅스에서 강의준비를 하겠다며 우리를 내려주고는 떠났다.

가게들의 위치를 파악하며 둘러보다 보니 개장시간이 되었다. 비가 오는 탓에 손님이 정말 거의 없었다. 동생은 아웃렛에 주말만 되면 보스나, 프라다 같은 매장들은 줄이 길어 들여다보기도 어렵다고 했는데 줄은커녕 손님보다 종업원들이 더 많은 상황이었다.


아내는 너무 좋다며 신난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시, 우리는 이윽고 물건들이 전혀 싸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잘 안 팔리는 시즌이 지난 상품을 모아놓은 아웃렛답게, 딱히 예쁜 것들은 별로 없는데 문제는 가격이었다. 가격이 한국 백화점의 신상 가격이었다. 환율이 1차적으로 문제였고, 세금 10%도 계산에서 크게 작용했다. 거기에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70~80% 할인 기간도 아니니 꼴랑 30% 할인해 봐야 오히려 한국보다 더 비싼 경우가 많았다.


점심을 먹고 조금 더 둘러보았으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 매장이 없거나, 국내서 유명하지 않은 매장들 위주로는 좀 살만한 게 있었고 나랑 아내는 Vuori에서 조거팬츠를 하나씩 샀다. 동생 여자친구가 샌디에이고에서 함께 쇼핑하며 소개해준 이 운동복 브랜드는 룰루레몬이랑 비슷한 성격의 브랜드였다. 그런데 룰루레몬보다도 더 편하고 예쁜 옷들이 많았다.


더 이상 살 것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동생을 불러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은 한국시간으로 내 생일이었다. 또한,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이어서 동생커플과 넷이 벌링게임 시내에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동생 여자친구는 모처럼 회식이 있는 저녁이었던 것 같은데 상황을 잘 설명하고 오늘 빠지기로 상사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나라랑 다르게 저녁시간에 절대 회식 같은 것을 하지 않는 미국회사의 특성상 거의 연례행사쯤 될 터인데, 그렇게 빠져도 되나 싶었다. 고맙기도 했다.


LIMON이라는 페루음식을 파는 식당은 사람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남미를 여행할 때 세비체라는 요리를 처음 접하고 당시에 여행을 함께 다닌 친구들과 칠레의 화이트와인을 마시며 새로운 맛의 세계를 경험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세비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동생 여자친구는 본인이 변호사가 됐을 때 받은 의미 있는 샴페인을 들고 나왔다. 맛이 아주 좋았다. 모르는 라벨이었는데, 비비노에 스캔하니 꽤나 좋은 샴페인이었다.


세비체와, 스테이크&치킨 플레터, 빠에야 등등 여러 요리를 시키고 여행에 대한 소감을 서로 나눴다. 여행을 크게 LA, 캐년투어, Bay 세 개로 나누어 각자 어떤 것을 느꼈는지 이야기했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아내는 Kanab에서 야외에서 목욕을 하며 별을 바라봤던 순간을, 동생은 모뉴먼트밸리와 자이언캐년 등 국립공원 투어를, 나는 Ruhstellar라는 농장 겸 브루어리에서 보낸 시간을 꼽았다.

아내는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았던 그 순간을 ‘우주가 내 편인 것 같은’ 황홀한 경험이었다고 밝혔다. 동생도 비슷한 이유를 들었다. 동생은 본인이 도시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 와서 국립공원 투어를 다니다 보니 자연을 좋아하게 되었단다. 어느 순간 광활한 자연을 보며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감사하다’는 마음은 상대가 나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주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냐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건 없이 잘해주는 것은 다른 말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서 본인은 자연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꼈단다. 그래서 아내가 말한 ‘내 편인 것 같다’라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동생의 여자친구는 동생과 함께 그랜드캐년을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처음 그랜드 캐년을 보았을 때 벅차오르는 감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랜드캐년을 자세히 보면 계단모양의 단층을 관찰할 수 있는데, 단층마다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어떤 시기에는 그곳이 바다였고, 어떤 시기에는 그곳이 육지였다는 소리이다. 그렇게 수천만 년, 수억 년의 세월을 보내며 자연은 그곳에 존재했다.


그녀는 동생에게 기껏해야 100년 동안 살다 가는 인생인데,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 거대한 자연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열심히 살아 성공해 부귀영화를 누린 들 자연에 비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물어봤단다. 그런데 동생은 그 질문에 대해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대답을 했단다. 뭘 해도 인간은 작은 존재인데, 너무 고민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자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들이 나눴던 대화를 회상하는 것을 듣고 뭔가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도전을 주저했는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는데, 왜 그렇게 바쁘다는 핑계로 주저하고 시간을 허송세월 보냈던가. 생일에 값진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샴페인이 다 떨어졌다. 아내는 남편 생일인데 본인이 내겠다며 당차게 카드를 내밀었다. 역시 미국에서 제대로 먹으면 인당 10만 원은 기본이었다. 부담이 되었을 텐데, 한국에 돌아가 열심히 일해 카드값을 벌겠다며 귀여운 포부를 밝혔다.


돌아가는 길에는 근처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서 들어갔다. 서로의 필기체를 비교해 보며 성격을 유추하고 분석하는 재밌는 시간도 가졌고,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모 생각이 나 이모에게 영상통화를 걸고 다 같이 놀았다. 이모는 긴 공직생활에서 은퇴 후 제주도에 집을 사서 이모부와 함께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서 너무 좋아 “라며 행복한 웃음을 보이는 이모와의 통화를 마치자 어느새 자정이 다 되었다.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음을 느끼고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꽤나 긴 여행이었다. 돌이켜 보니 2012년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유럽일주를 한 이후로 가장 길게 떠난 여행이었다. 여행을 준비할 당시 내가 선거캠프에 있느라 아무것도 신경 쓰기 어려울 정도로 바빴다. 동생은 본인도 바빴을 텐데 모든 일정을 짜고 예약까지 끝냈다. 심지어는 선물이라며 본인이 여행경비의 7할 가까이 지출했다.


가끔 바쁜 일상을 살다가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허무함과 외로움이 뒤섞여 감정이 북받칠 때가 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고 내버려 둔 채 시간이 흐르니, 문득 그런 감정이 들이닥치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치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 엄마아빠를 따라갔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부모를 놓쳤을 때 느꼈던 고독함과 막막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내와 동생, 그리고 동생 여자친구와 함께 채워나간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렇게까지 외로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끔 너무 못나고 부족한 것 같아 자괴감이 드는 순간순간들은 여전히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내가 등을 기대고 있는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이, 내가 사랑을 주고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좀 더 분명히 새기게 되었다. 그게 내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 나를 밀어 올려 줄 수 있는 힘이었다. 이 글을 빌어, 그들에게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사함을 전한다. 언젠가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줄 것을 다짐하며 <형제, 미국 서부에서 만나다>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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