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MVP는 Stephen Curry가 아니라 아내였다.
아침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동생 여자친구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월요일이었다. 나와 아내가 모두 눈을 뜨자, 동생커플이 오늘 일정에 대해 공유할 NEWS가 있다며 이야기했다. 내용인즉슨, 동생 여자친구가 다니는 로펌의 파트너 중 한 명이 샌프란시스코를 연고로 한 NBA팀인 Golden State Warriors(GSW)의 24-25 시즌권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 경기 티켓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파트너답게 장당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1층의 앞자리였다.
동생이 미국 생활을 시작할 무렵 스테판커리의 GSW는 다시 한번 파이널에서 우승했다. 스테픈 커리는 엄청난 3점 슈팅을 앞세워 센터 중심이던 NBA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3번의 우승 이후 주축 중 한 명인 Kevin Durant가 빠지고 부진이 찾았왔다. 팬들은 “이제 커리도 한 물 갔다”라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했다. 워리어스 원클럽맨인 그가 다시 한번 우승을 하려면 다른 팀으로 옮겨 조연역할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 해, 온갖 조롱과 팬들의 회의를 이겨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한번 왕좌를 되찾아온 것이다. 동생은 딱히 부연설명 하지 않았으나, 나는 동생이 어려운 미국생활을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을 보며 용기를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동생은 이후 이 팀의 빅팬이 되었고, 그 스토리를 그녀가 파트너에게 자주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이 이제 잘 되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그분이 그녀에게 선물로 NBA경기를 보여주겠다며 제안했단다. 첫 번째 제안은 Lakers와 GSW의 경기였다.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인 르브론과커리가 맞붙는 매치업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그때 캐년투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그녀에게 저녁에 경기를 보라며 제안했다. 착한 동생은 우리가 신경 쓰였는지, 나와 아내의 좌석을 끊어주겠다고 했다. 여러모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LA에서의 경기도 너무 재밌었는데, 오늘은 또 어떨지, 커리는 얼마나 잘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동생이 여자친구를 회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우리는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동생은 피곤하다며 잠을 청했고, 나는 글을 썼고, 아내도 일을 했다. 벌링게임에서는 총 5박을 지내는데, 바로 윗동네인 샌프란시스코를 한 번도 구경을 안 하고 돌아간다는 것이 좀 아쉬웠다. 어차피 오늘 경기가 열리는 Chase Center가 샌프란 시내에 있으니 겸사겸사 오후는 샌프란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미쉐린 가이드에도 선정됐다는 마제소바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근데 진짜 평범했다. 한국에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도.) 동생이 샌프란 시내로 우리를 데려다줬다. 동생은 경기 전까지 함께 동행하겠다고 제안했으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서 우리 부부는 동생에게 샌프란 시내에 내려주고 집에 가서 좀 쉬다가 경기직전에 만나자고 했다.
첫 번째 행선지로 롬바드 스트릿에 도착했다. 샌프란 시내는 언덕길들을 따라 있는 도시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언덕을 올라갔다 내렸다가 하는 시내길과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트램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특히 롬바드 스트릿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인데 최근에는 인사이드 아웃에서 보았던 것 같다.
짧은 구경을 마치고 금문교가 보이는 마리나그린이라는 곳으로 갔다. 흐린 날씨 탓에 금문교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버를 타고 샌프란의 명물인 기라델리 초콜릿 샵에서 내리고는 잠깐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샌프란엔 여러 Pier들이 있는데, 그중에 특히 Pier39가 유명하다. 바다사자들이 데크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매우 귀여웠다. 여기만 유독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 나는 우연히 그랬을 것이라는 의견을, 아내는 여기가 아마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던 항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흑백요리사에 등장해 한 때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트리플스타’라는 셰프는 Venue라는 샌프란의 미쉐린 3 스타 식당에서 일할 때의 에피소드를 간간히 언급하곤 했다. 고단한 외국에서의 요리사 수련에 그는 자주 Pier39를 찾아 클램차우더를 먹으며 외로움을 달랬다곤 한다. 그의 말처럼, 클램차우더를 파는 식당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클램차우더는 크림과 조갯살로 만든 수프이다. 그걸 둥근 모양에 사워도우 중간을 파 내어 수프를 부어서 빵을 적시며 먹는 서민적인 요리이다. 한때 한국에도 유행했던 빠네와 맛도 방식도 비슷하다.
경기는 7시였다. 동생커플과는 6:30에 경기장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구글맵을 켜고 대충 예상시간을 보며 동선을 짰다. 저녁을 차이나타운에 있는 Betty&Lou라는 시푸드 레스토랑에 가기로 결정했다. 거기에서 클램차우더와 Chiopino라는 샌프란 전통요리를 먹기로 했다. 치오피노는 일종의 토마토스튜에 가까운 요리인데, 예전에 이 동네 어부들이 팔고 남은 해산물을 통째로 토마토소스와 함께 끓여내어 먹은 데서 기원한다고 한다.(출처-ChatGPT)
5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탓에 식당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주인에게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가볍게 치오피노만 먹고 싶다. 괜찮냐? “ 했더니, 주인은 웃으며 ”네가 콜라 두 잔을 먹고 나가도 우리는 괜찮다 “며 농담을 건넸다. 난 미국 와서 처음으로 팁을 줄 만한 식당이라고 느꼈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한국 식당들에 <1인 1 메뉴 주문이 필수입니다>라는 근엄하고 진지한 안내는 그에 비해 얼마나 계산적인가.
클램차우더와, 치오피노 모두 너무 훌륭했다. 여행을 여기저기 다니며 늘게 된 실력 중 하나는, 가보지 않고도 맛있는 식당과 맛없는 식당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여러 군데의 후보지 중 소거법으로 지워나갈 수 있다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지우고 남은 식당을 가면 이젠 거의 실패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는 6:10쯤 우버를 타고 체이스센터로 향했다. 퇴근시간과 겹치는 탓에 낮에 예상시간을 찍어본 것보다는 조금 더 걸렸다. 동생에게 6:40 도착한다는 카톡을 보내니, 괜찮다며 7시 전에만 오면 된다고 답장이 왔다. 그런데 점점 차가 가지를 못하더니 조금 가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시간이 계속 늘어나더니 급기아 7:10까지 시간이 늘어났다. 좌회전길이 하나인데, 여기 사람들은 절대 중간에서 끼어들어서 얌체같이 좌회전하는 법이 없는 듯했다. 이럴 때는 택시 기사 아저씨가 ‘센스 있게 직진차로로 갔다가 마지막에 딱 껴서 좌회전해주면 좋을 텐데’라며 내심 꼼수를 부려주길 바랐다. 내가 시간이 없다는 말에도, 우버 드라이버는 이게 샌프란시스코라며 무사태평이었다.
그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시민의식이 살아있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서울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제멋대로 난폭운전을 하는 차들은 상당수가 택시기사였다. 나는 그들의 인성에 분노했으나, 사실 승객이 된 입장에서 요구하면 기사는 또 서비스업 관점에서 그렇게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좀 더 나아가면, 우리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회에 산다. 원칙보다는 관계 지향적인 사회에 살다 보니, 공정과 상식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자주 목도한다. 그것을 욕하는 사람도, 방금 전의 나처럼 자기 입장이 되어 피치 못할 상황이 되면 또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합리화하는 경우도 많다.
어쨌거나, 7:10이 넘어서 도착했다. 동생커플은 애진작에 식당에서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은 짜증이 나 있지만 감정을 표출하진 않았고, 동생 여자친구는 우리한테 고생했다며 식사는 맛있게 드셨냐고 오히려 위해주었다. 난 정말 미안하다며 이렇게 막힐 줄 몰랐다고 사과했다. 동생이 특히 기대하는 경기라 더 그랬다.
다행히 그렇게 늦지 않은 탓에 선수입장은 못 보았지만, 경기 자체는 크게 지나지 않았다. 1 쿼터가 시작하고 3분 정도의 경기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와 아내는 3층에 좌석이 있었는데, 좌석이 열 중간에 있는 탓에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서 자리를 조금 만들어 주어야 지나갈 수 있었다. NBA경기장들은 하나같이 거대하고 높다. 관중이 많은 탓에 앞자리와 뒷자리 단차를 높게 둔다. 그래야 앞자리에 키 큰 사람이 앉더라도 머리에 가리지 않고 경기를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차는 높고, 열간 간격은 좁은 탓에 매우 위험해 보였다. 중간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다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가 밑에 층으로 구르기라도 하면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레이커스 경기장인 크립토아레나는 층간 유리막도 없었는데, 다행히 워리어스 경기장인 체이스센터는 신식이라 방어막이 갖춰져 있었다. 팬들이 맥주도 많이 먹는데, 술 취해서 굴러 떨어지면 어쩌냐고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나 다를까 2 쿼터가 끝나고 하프타임에 화장실을 다녀온 내 앞자리 사람이 발을 헛디뎌 앞으로 굴렀다. 뚱뚱한 덩치가 구르니 거의 재앙이었다. 앞자리 앉은 사람들은 등과 목으로 그 육중한 무게를 받아내었다. 한 남자는 그의 발에 얼굴을 걷어차였다. 다행히 유리벽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히더니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또 민망했는지, 깔깔깔 웃으면서 친구들이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런데 본인 발에 얼굴을 걷어 차인 사람, 엉덩이에 등이 깔린 사람 등 봉변을 당한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사과도 없었다. 아내는 그 모습에 분노했다. 나 역시 미국은 정말 사람들 간의 편차가 크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상대팀은 올랜도매직이었다. 두 팀다 5할 정도의 승률의 팀으로 박빙이 예상되었다. 경기는 엎치락뒤치락하더니 홈팀인 워리어스가 마지막 순간에 홈팀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승리를 가져왔다. 커리는 부진했으나, 다른 팀원들이 더 잘해주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배가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경기장을 나가니 화장실 줄이 너무 길었다. 마침 든 생각으로는 1층으로 내려가면, 1층 사람들은 이미 화장실을 들렀다 나갔을 테니 줄이 짧아 거기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산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니 바로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출구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출구에는 경비원들이 지키며 사람들이 재입장하는 것을 금했다. 들어올 때 모든 사람이 짐 검사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집단 테러에 대한 경계가 엄중한 듯했다. 그래서 재 입장 시에는 짐 검사를 원칙적으로 할 수 없으니 다시 들여보내주지 않는 것이다. 화장실이 너무 급하다며 사정을 해 보았으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화장실 위치를 설명해 주었으나 사람도 너무 많아 시끄럽고, 말도 빨라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비는 쏟아지는데, 화장실은 찾을 수가 없었다. 동생 커플을 만났으나,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먼저 기념품샵에 들어가 있으라고 소리치며 달렸다. 내가 어찌할 줄 모르고 있으니 아내가 나섰다. 경비원들 몇 명에게 화장실을 물어보더니 기어코 화장실을 찾아 나를 데려다주었다. 어디를 나오면 늘 말하거나 뭘 찾거나 하는 것은 내 담당이었다. 어쩔 때는 그런 아내의 의존적인 태도에 내가 불만을 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진짜 급할 때 아내는 나를 안심시키며 본인이 상황을 해결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 순간도, 내가 너무 술에 취해 커플모임을 하고 정신을 못 차릴 때 아내가 끝까지 나를 챙겨준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재밌는 건 아내도 비슷한 상황에서 나와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부부란 것은 그렇게 어려운 순간에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다시금 깨달았다.
평온해진 상태로 스토어에 들어갔으나, 예쁜 옷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커스 경기를 관람했을 때에는 하나 발견했는데 그때도 인파에 휩쓸려 그냥 나와버렸다.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여긴 살게 없었다.
내가 화장실도 찾고 어쩌고 하느라 시간이 꽤나 늦어버렸고, 집에 돌아오니 열한 시가 넘었다. 돌아가며 씻고는 얘기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