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31
1530년, 메디치 가문은 마침내 근거지 피렌체를 수복했다. 교황의 사생아, 스물두 살 알레산드로가 피렌체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카를 5세는 그를 위해 피렌체의 공작 작위와 자신의 딸 마가레트를 아내로 하사했고, 스페인 군을 도시 내 바소 요새에 배치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전을 확실시했다. 지도자로서 별다른 소양을 갖추지 못한 알레산드로였으나, 그는 정권 초기 큰 문제없이 군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오랜 전란을 겪은 피렌체 시민들의 평화를 향한 갈망과 황제의 에스파냐군이 조성한 위화감은 전례 없이 강력했다.
다만 그에게는 도드라진 결함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성적 도착증이었다. 주색잡기로 유명한 메디치 집안 남자들 중 유독 그의 행실만이 역사에 남을 정도로 강한 비난을 산 데에는 그가 피렌체 공화정의 전통을 부정하는 공작 작위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이 없는 외지인이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그런 그가 피렌체의 귀족 여성들을 혼인 여부를 따지지 않고 마구 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단짝으로서 포주 역할을 했던 인물은 메디치 가문의 로렌지노 메디치였는데, 국부 코시모의 동생 로렌조 계열에 속하는 그는 클레멘트 7세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모든 정치적 입지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의 이름 로렌지노 역시 작은 로렌조를 뜻하는 것으로, 그가 왜소한 체구의 남자이며,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주변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황제와 교황 사이 협정의 결과로 메디치가는 명실공히 왕가로 거듭나게 됐다. 알레산드로 또한 단지 클레멘트 7세의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피렌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여성들을 물색하는 일에 전념해야 했던 메디치가의 남아 로렌지노가 점차 그를 바라보며 운명을 저주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 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은 피부의 호색한 알레산드로를(그는 무어 출신 노예 여성과 클레멘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향한 로렌지노의 반감은 커져갔고, 질투심에 휩싸인 그는 16세기 피렌체에서 브루투스의 역할을 스스로 재연하겠다는 과대망상을 품기에 이르렀다. 결국 1537년 1월, 그는 피렌체의 귀족 여성 카테리나 소데리니 지노리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는 빌미로 알레산드로를 그의 집으로 유인해서는 고용한 암살자와 함께 알레산드로를 직접 해치워 버렸다.
브루투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듯이 로렌지노의 만용 역시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의 이름이 말해주는 바처럼 로렌지노는 그릇이 작은 인물이었다. 도시의 운명을 뒤흔들 거사를 저지르면서도 제대로 된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던 것이었다. 일을 마친 후 그는 암살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손을 부여잡고서 베네치아로 줄행랑을 쳐버렸고, 날이 밝고서 한참이 지나서야 집안을 확인해 본 알레산드로의 경호원들은 뒤늦게 피투성이 시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각 그의 보좌관 귀차르디니와 추기경 치보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정황을 파악한 이들은 신속하게 메디치파 인사들을 집결시켰다. 개정된 회의의 건안은 물론 후계자의 결정이었다. 틈을 준다면 도시 내 산재하는 공화주의자들이 다시금 기치를 들고일어날지 몰랐다(만약 로렌지노가 공화주의자들에게 미리 자신의 계획을 알렸더라면,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거사 후 그들에게 전갈이라도 보냈더라면 사건은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다)
팔라쪼 베키오에 모여든 메디치가 인사들은 즉각 논의룰 시작했다. 그러나 적임자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국부 코시모 계열에서는 더 이상 후계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직속 후계자에 해당하는 카트리나 메디치는 여성인 데다 당장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다. 메디치 혈통의 추기경 치보는 알레산드로의 4살 아들 줄리오를 후계자로 내세웠지만, 어린아이를 앞세워 섭정 정치를 펼치려는 그의 속셈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클레멘트 7세와 알레산드로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귀차르디니는 로렌조(베키오-국부 코시모의 동생) 계열의 코시모를 후계자로 제시했다(살인자 로렌지노는 당연히 물망에서 제외돼야 했다). 하지만 반대 세력의 저항 역시 거셌다. 그중에서는 공화정으로의 귀환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의견 차이는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리했던 귀차르디니는 이와 같은 전개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팔라쪼 베키오 밖 광장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경호대장 알레산드로 비텔리에게 새 정권 내 자리를 약속하고서 그의 편으로 포섭해 두었고, 회의가 지연되고 있던 시점,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비텔리는 군사들에게 "코시모! 코시모! 코시모를 피렌체의 공작으로!"를 연창 하게 했다. 그리고선 갑작스러운 소동에 당황하고 있는 메디치 지지자들이 모인 회의장을 향해 돌아서서는 "서두르시오!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오!"라고 호통을 쳤다. 허무하게도 이 간단한 작전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회의장의 모두는 제2의 치옴피의 난을 두려워하는 친메디치 인사들이었다. 귀차르디니는 원하던 대로 회의 결과를 신속하게 결정지었다.
추기경 치보가 4살 줄리오를 섭정으로 세우려 한 데에는 그를 꼭두각시로 삼고선 피렌체를 직접 다스리려 한 계획이 배후에 있었다. 열일곱 살 코시모를 옹립하게 된 귀차르디니의 속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회의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코시모와 그의 어머니의 거처를 메디치 궁으로 옮기게 하고서 추후 그의 배후에서 피렌체의 앞날을 새롭게 그려낼 꿈을 꾸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가까운 벗이었던 그는 피렌체의 전통인 공화주의 사상을 계승하려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귀차르디니의 야심은 완벽한 계산착오에 기반하고 있었다. 국부 코시모의 이름을 이어받은 피렌체의 새 지도자는 꼭두각시 역할에 만족할 정도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풍채가 남다르고, 자기 속을 절대 쉽사리 드러내지 않지만, 입을 열기 무섭게 제안이 아닌 단호한 명령으로 일관하는 청년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을 일으켜 세운 지오반니와 코시모 메디치를 연상시키는 전략가이자 1527년 사코 디 로마를 자행한 독일군으로부터 피렌체를 지키다 전사한 아버지 루도비코 메디치를 닮은 호걸이었다.
1537년 피렌체의 권좌에 오른 코시모가 가장 먼저 착수한 사안은 도시 안팎에 남아 있는 정적들의 제거였다. 소년 군주를 만만히 본 반 메디치 세력은 공공연히 그를 향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시모는 가장 먼저 군대를 모집하여 피렌체의 대표 가문 중 하나인 스트로찌 가문의 도전을 단숨에 무찔렀고, 암살자를 파견하여 훗날 분란의 불씨가 될 수 있는 로렌지노를 베네치아에서 암살했으며, 반정부적 발언을 일삼던 도메니코 수도승들을 산 로렌초 수도원에서 모조리 쫓아내 버렸다. 반 메디치 세력의 기세는 완벽하게 꺾였으며, 도시 내에서 피렌체의 수복을 호시탐탐 노리던 반정부 인사들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메디치가에 도전할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됐다.
명민한 동시에 행동이 신속했던 코시모는 여러 면에서 마키아벨리가 꿈꿨던 군주에 가장 가까운 피렌체의 지도자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마키아벨리의 독립 국가의 꿈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그 누구보다 먼저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소국 피렌체가 속국으로서의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카를 5세와의 협업을 통해 권리를 보장받는 것만이 국익을 위한 최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친구이자 메디치 가문의 오랜 조언자 귀차르디니가 꿈꿔온 피렌체와는 완벽하게 다른 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귀차르디니는 코시모에게서 은퇴를 권유받고서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도시 내 모든 정적을 제거한 코시모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물론 메디치 가문의 번성이었다. 우선 그는 아라곤 왕가 소속 나폴리 총독 톨레도의 딸 엘레아노르와 혼인을 직접 추진했다. 그는 그녀와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막대한 자금을 혼수의 명목으로 마련했고, 1542년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자금이 절실했던 카를 5세를 위해 이 금액 중 상당 부분을 내놓았다. 카를 5세는 감사의 표시로 바소 요새에 주둔하던 스페인 군을 비롯해 리보르노, 피사 등지에 주둔한 제국군을 토스카나로부터 철수시켰고, 코시모의 피렌체군은 재빨리 피사와 리보르노를 피렌체 지배하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그는 피렌체의 자치권을 확보하게 됐으며, 항구 도시 피사와 리보르노를 손에 넣게 됐다. 고삐를 놓지 않은 코시모는 이제 피렌체의 오랜 숙적 시에나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곧 시작된 두 앙숙 간의 전투에서 보여준 소도시 시에나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무려 3년간의 치열한 공성전이 이어졌다. 인구 2/3가 희생된 처절한 투쟁 끝에 시에나는 백기를 들었지만, 피렌체군이 입성했을 무렵 도시 내 기관 대부분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모든 주요 산업 시설을 잃은 시에나는 더 이상 피렌체에 상업적 이점을 가져다줄 수 없었다. 하지만 시에나를 정복함으로써 반 메디치 세력을 완벽히 소탕한 코시모는 명실공히 토스카나의 지배자로 그 입지를 확보하게 됐다. 리보르노와 피사의 두 항구와 내륙의 시에나까지 점령지로 포섭하게 된 피렌체는 코시모의 치세 하에서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아우르는 도시 국가로 거듭나게 됐다.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는 공작 코시모의 피렌체는 이전의 피렌체가 아니었다. 15세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그들의 권력을 노골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시민들을 자극하는 일을 삼가야 했다면, 16세기 피렌체 시민들은 반대로 공작 코시모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삼가야만 했다. 국부 코시모가 독재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대리인들을 통해 은밀히 피렌체 시뇨리아를 조종했다면, 공작 코시모는 정부 청사인 팔라쪼 베키오를 그의 성으로 삼고서 건너편 병영에 주둔한 스페인 용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생활했다. 코시모가 도메니코 수도원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을 산 로렌초 바실리카에 초대했다면, 공작 코시모는 반정부의 소리를 내는 그들을 전부 수도원에서 쫓아내 버린 것이었다.
도시 내 대형 건축 사업 역시 오로지 메디치 가문을 위해서, 그들의 허락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우피치 박물관이 된 정부청사 역시 코시모의 구상하에 건설된 것이었다. 그는 아르노까지 이어지는 우피치 건물을 오래전부터 꿈꿔왔고, 조르지오 바사리에게 이 임무를 일임했다. 1549년에는 코시모의 아내 엘레아노르가 비좁은 팔라조 베키오를 떠나 피티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직접 그녀의 재산 중 일부 9000 플로린을 하사하여 팔라쪼 피티의 대규모 보수작업을 명령했다. 1560년, 완성된 피티 궁전으로 코시모의 가족은 이사했고, 피티 궁전에서부터 정부 청사인 우피찌까지 출퇴근을 해야 하는 코시모를 위해 그만을 위한 통로가 폰테 베키오 위로 건설됐다(이 역시 바사리의 작품이었다)'너무 큰 궁전을 지음으로써 시민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걱정하던 메디치 가문은 이제 피렌체 시민들을 발밑에 두는 통로를 건설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코시모의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통해 피렌체는 그 위상을 높이 세우게 됐다. 그러나 유럽의 정세는 더 이상 피렌체와 같은 소도시가 패권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르노의 도시 국가는 더 이상 유럽 정치, 문화, 경제 어느 쪽에서도 중심적 위치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 유럽적 유행은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지나 매너리즘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사코 디 로마 이후로 유럽의 정세는 돌이킬 수 없이 이탈리아를 지나치고 있었다. 강대 중앙집권 국가들의 등장과 함께 전 유럽의 운명은 이들의 세력 싸움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고, 코시모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피렌체의 지정학적 위치를 명민하게 이용하여 토스카나의 세력을 확보하는 것뿐이었다. 코시모가 이루어낸 권력의 집중과 피렌체 정부의 관료화와 역시 사실상 전 유럽적 경향이 피렌체에 뒤늦게 찾아온 것에 불과했다. 도나텔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아닌 바사리, 키엘리니 정도의 예술가만이 그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 역시 시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치하 아래서 메디치 가문이 커다란 진일보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1569년 코시모는 대공의 자리에 오르며 마지막으로 그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면서 그의 오랜 치세를 마무리하게 됐다.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과의 관계를 유지해온 코시모의 외교 수완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었다. 피렌체가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그가 토스카나 대공의 자리에 오르게 됐으며, 대공 코시모와 함께 피렌체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사코 디 로마의 참사 속에서 피렌체를 수호하다 전사한 그의 아버지와 요새에 갇힌 채 오로지 메디치 가문의 존속만을 걱정한 클레멘트 7세의 희생은 대공 코시모라는 걸출한 후손의 등장과 함께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