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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Nov 10. 2021

클레멘트 7세와 피렌체의 마지막 공화정

피렌체 30

    1527년 5월, 영원의 도시 로마가 도륙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도자 클레멘트 7세까지 성 안젤로 성에 갇힌 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폭도로 변모한 landsknecht(독일 용병) 앞에서 무릎을 꿇은 교황청의 몰락은 비극적이었다. 전 유럽 앞에서 그 권위는 바닥으로 고꾸라치고 말았다.


    교황청의 속국 피렌체에게 있어서 사코 디 로마의 소식은 메디치 가문의 몰락, 즉 해방을 의미했다. 족쇄를 끊어낼 기회를 포착한 피렌체인들의 공화정 본능이 다시 불타올랐다.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위험을 직감한 알레산드로 메디치와 이폴리트 메디치, 섭정 파세리니 추기경이 곧장 도시 밖으로 피신했다. 피렌체 시민 3000명으로 구성된 대회의가 소집됐다. 30여 년 전 샤를 8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종을 울리겠다!”라고 외쳤던 피에로 카포니의 아들 니콜로 카포니가 곤팔로니에로 선출됐다. 친 메디치 세력은 다시 도시에서 자취를 감춰야 했다. 발견된 이들은 모두 숙청됐다. 30년 전 그들의 손으로 불태운 사보나롤라의 망령 역시 부활을 맞이했다. 시민들은 피렌체가 “그리스도의 공화국”임을 선언했다. 사보나롤라식 금욕주의 계명들이 법령으로서 귀환했고, 도박, 카니발, 미인 대회가 금지됐다. 허영의 불꽃이 재연되지는 않았으나, 부유한 시민들은 그들의 옷, 책, 예술품들을 감춰야만 했다. 도시 곳곳에 새겨진 메디치 가문의 문양과 그들의 흔적이 모조리 제거됐다. 당시 8살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적통,  카테리나 메디치(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메디치의 딸) 역시 연행된 끝에 산타 루치아 수도원에 인질로 감금됐다. 피렌체 역사상 마지막 공화정의 탄생이었다.


클레멘트 7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1526)


    클레멘트 7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절망적인 비보는 없었다. 그는 교황청의 군주이기에 앞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다. 오직 레오 10세(지오반니 메디치)의 후원에 의해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였다. 그가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눈앞에서 영원의 도시가 불타고 있다고 한들 메디치 가문이 집 없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행보는 메디치가에게 있어서 피렌체의 수복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이었는지를 보여주게 된다.


    공화국 정부 역시 클레멘트 7세의 의중을 넘겨짚고 있었다. 교황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피렌체를 되찾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은 이탈리아를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 에스파냐(신성 로마 제국) 간 전쟁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즉 교황과 공화국 양측에게 있어서 ‘줄을 잘 서는 일’보다 중요한 과제는 없었다.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의 선택은 이 지점에서 엇갈리고 말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사보나롤라의 기억은 공화정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니콜로 카포니로 대표되는 피렌체의 온건파는 에스파냐(신성 로마 제국)와의 동맹을 원했다. 클레멘트 7세와 황제 간의 교섭이 성사되기 전에 그들이 먼저 카를 5세와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반면 사보나롤라의 유지를 계승하고자 했던 강경파는 그가 생전에 신의 사자로서 축복했던 프랑스군(난쟁이 샤를 8세의)과 손을 잡아야 함을 주장했다. 공화국의 오랜 전통 역시 피렌체-프랑스 동맹을 지지하고 있었다. 다수의 동의를 얻어낸 강경파는 결국 그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제 피렌체는 프랑수아 1세가 제국령 나폴리로 파견한 프랑스 군과 그 운명을 함께 해야만 했다. 피렌체는 이 원정을 돕기 위해 4000명의 보병과 400기의 기병까지 출전시켰다.


카를 5세

 


    반면 박쥐 같은 처신으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 바 있는 클레멘트 7세는 다시 한번 선택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실 그는 황제에게 손을 내밀려했다. 굴욕적인 투항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사코 디 로마의 기억이 생생한 그였다. 제국을 상대로 다시 적의를 드러내기는 어려웠다. 피렌체의 수복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사코 디 로마 당시 늑장으로 일관하던 프랑수아 1세가 1529년, 드디어 알프스 남쪽으로 프랑스군을 출동시켰다. 게다가 그는 교황에게 다시 공동전선을 구축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과거의 클레멘트 7세였다면 냉큼 받아들였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로선 프랑스의 뒤늦은 등장이 더 이상 반갑지만은 않았다. 군사 동맹의 약속을 저버리고 교황청이 제국군 앞에서 궤멸되는 참사를 방관한(결과적으로 로마가 불타는데 크게 일조한) 프랑수아 1세는 교황에게 있어서 카를 5세에 버금가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의 대군이 남하하고 있는 와중에 카를 5세와 협정을 맺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서 망설임 속에서 둘 사이의 칼부림을 관조하는 쪽을 택했다.


프랑수아 1세 (장 클루엣, 1530)

    공화국 정부가 에스파냐(신성 로마 제국)와 손을 잡았다면 그들은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테다. 유럽 최강자들 사이 승부는 또다시 카를 5세의 승리로 끝이 났기 때문이다. 명장 로트렉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연승을 거듭하며 신속한 속도로 나폴리까지 진격했으나, 때마침 찾아온 역병이라는 불운 앞에 자멸하고 말았다. 피렌체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은 오착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교황은 1529년 체면을 몰수하고 신속하게 카를 5세에게 손을 내밀었고, 황제는 교황의 친서를 받아들였다. 박쥐 같은 처신이 밉기는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교황이었다. 카를 5세라고 한들 교황청을 적으로 두는 일의 상징성이 달가울 리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였다(종교 개혁의 여파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을 무렵, 교황청과 피렌체의 이권을 보살피기 바빴던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들은 이 새로운 도전을 상대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쏟지 않고 있었다. 이 시기 신교도들의 자라나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려 했던 이는 되려 교황의 적 카를 5세였다). 대신 국교를 재개하는 대가로 그는 교황청이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상징성을 모두 전용하기로 결심한다.


    우선 전쟁 과정에서 함락된 교황청의 모든 영토가 황제령으로 병합됐다. 이제 반도 내에서 황제를 상대로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또한 교황에게 볼로냐에서 자신을 위한 대관식을 주관할 것을 요구했다. 700년 전 샤를마뉴를 위해 처음 거행된 즉위식을 그를 위해 재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황에게 있어서 로마를 불태운 자의 머리 위에 직접 왕관을 씌우는 일을 의미했다. 하지만 교황에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1530년, 카를 5세의 생일인 2월 24일에 맞춰 거행된 대관식에서 교황은 제국의 쇠 왕관을 카를 5세의 머리 위에 직접 올려주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대가로 클레멘트 7세는 단 하나의 조건에 대한 동의를 받아냈다. 황제는 피렌체를 메디치 가문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조지오 바사리가 그린 1529-30년의 피렌체 공성전


    교황의 피렌체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오렌지 대공이 이끄는 4만 제국군(대부분 에스파냐 병사들이었다)이 출정했다. 황제의 대군이 아르노 강변에 그 모습을 드러낸 1529년 초가을, 피렌체에게는 투항과 항전 사이 양자택일이 강요되고 있었다. 공화국은 후자를 택했다. 페루지아 출신 용병 대장 말라테스타 발리오니에게 피렌체군의 지휘가 일임됐고, 메디치 예배당 공사를 맡고 있던 미켈란젤로까지 동원되어 성벽 공사가 진행됐다. 공화정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절대적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항전은 끈질기게 전개됐다. 때마침 등장한 호국 열사 프란체스코 페루치의 활약 역시 눈부셨다. 페루치는 피렌체와 피사 사이에 위치한 엠폴리의 요새 수비대에 주둔하며 항구 도시 피사에서부터 피렌체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필사적으로 지켜냈다. 성문으로 향하는 보급대를 위협하는 에스파냐군을 매번 용맹한 돌격으로 무찔러낸 페루치의 활약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우피치 박물관 외부 니치에 설치된 페루치의 조각상

 

    하지만 적군의 장 오렌지 대공 역시 영리했다. 그는 무모한 공성전을 피하면서 도시의 상황이 악화되기만을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제 아무리 피렌체라 한들 농성을 무한정 지속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예상은 옳았다. 11개월이나 지속된 그들의 항전은 경탄스러운 것이었으나 대치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자연스레 성안 물자 역시 고갈되고 있었다. 찾아온 굶주림과 함께 피렌체 시민들의 사기 역시 추락하고 말았다. 굶주린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메디치가를 돌아오게 하라!”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엠폴리에서 출군을 시도한 프란체스코 페루치 역시 치열한 전투 끝에 피스토이아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이 과정에서 오렌지 대공 역시 전사한다 - 분노한 에스파냐 군의 새 지휘관, 나폴리의 장군 마라말도는 포획한 페루치를 잔인하게 손수 난도질한다).  


    페루치의 사망과 보급로 차단의 소식은 모든 희망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결국 페루치가 처형된 지 일주일 만인 1530년 8월 10일, 피렌체는 황제군에 항복의 뜻을 전한다. 훗날 피렌체의 역사가들은 패배의 원인을 용병 대장 발리오니의 배신으로 돌림으로써 공화정의 최후를 애도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이 공성전에서 승리했다고 한들, 교황청-제국을 상대로 피렌체가 계속해서 그들의 공화정을 지켜내기는 어려웠을 테다.


    메디치 가문은 결국 피렌체를 수복했다. 으레 그러하듯 반-메디치파 우두머리들이 고문-처형되는 한차례의 피바람이 불어야 했다. 그 후 피렌체로 돌아온 알레산드로 메디치가 피렌체의 카포(우두머리)로 임명됐고, 얼마 후 피렌체의 공작으로 옹립됐다. 공화정의 모든 정부 기관은 그 존속을 허락받았다. 물론 시민들을 상대로 부린 눈가림에 불과했다. 모든 최종 결정권은 종신 군주 알레산드로에 의해 독점됐다. 갑작스레 공작을 모시는 공국으로 전락한 피렌체의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알레산드로 역시 그가 시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바소 요새의 건설을 지시했고, 그곳에서 에스파냐군과 함께 머물며, 도시 행정을 주관하는 동시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의 권위는 황제와 교황청, 무엇보다 피렌체 내에 주둔하고 있는 에스파냐 군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던 것이었다.

 

알레산드로 메디치 (조지오 바사리)


    기어코 피렌체를 다시 손에 넣은 클레멘트 7세는 이제 삶의 마지막 과업응 완수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1533년, 노구를 이끌고(당시 55세였던 그는 이미 몰라보게 쇠약해져 있었다) 볼로냐를 찾은 교황은 카를 5세에게 피렌체 공작 알레산드로와 황제의 사생아 마가레트 사이의 혼인을 제안한다. 교황은 직접 알레산드로를 피렌체의 공작으로 임명한 바 있었다. 이제 알레산드로는 명분상 엄연히 왕족에 속했다. 다행히 동맹국 피렌체의 안정을 원하기는 카를 5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볼로냐에서 이루어진 이 협상에서 카를 5세는 이 교황청/피렌체와 에스파냐/신성 로마 제국 사이 정략결혼에 동의한다.


    일차적 목표를 달성한 클레멘트는 이제 진짜 소기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회심의 한 수를 던진다. 그는 카를 5세에게 로렌초(우르비노 공작)의 딸 카테리나 메디치를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중 한 명과 혼인시키는 일에 대한 황제의 생각을 묻는다. 1533년 당시 교황청은 엄밀히 말해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양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529년 피렌체 수복을 위해 카를 5세와 손을 잡았으나 공개적으로 프랑스를 적으로 돌린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카를 5세는 ‘평민의 딸보다 조금 더 나은 신분의 여자’에 불과한 카테리나에게 그의 라이벌 프랑수아 1세가 아들을 결혼시키고자 할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별생각 없이 만약 성사될 수 있다면 그것에 이의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카테리나 메디치와 올레앙 공작(앙리)의 결혼식. 야코포 다 엠폴리의 작품 (우피치 박물관)


    클레멘트 7세의 마지막 공작은 주도면밀했다.  이미 프랑스와 모든 협상이 끝나 있었던 것이다. 카를 5세는 뒤늦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다. 1533년 10월, 열네 살 카테리나 메디치와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올레앙 공작 앙리(앙리 드 벨루와)의 결혼식이 마르세유에서 이루어졌다. 교황은 친히 마르세유까지 행차하여 이 결혼식을 주관했다. 그는 감개무량한 심정이었을 테다. 메디치가를 유럽 왕족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로까지 끌어올리는 일은 위대한 자 로렌초의 소망이었다. 그의 꿈은 아들 지오반니(레오 10세)를 거쳐 조카(클레멘트 7세는 파치 가문의 칼 아래 쓰러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의 아들이었다)인 클레멘트 7세의 대에 이르러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결혼식을 자축하기 위해 연회와 그 뒤를 따른 축제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뿌려졌다. 메디치 가문의 통 큰 소비의 전통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무려 열두 명의 신부 들러리가 동원된 화려한 결혼식에 아흐레에 걸쳐 열린 축제가 뒤따랐고, 프랑수아와 앙리 쪽 식구들에겐 천문학적인 금액의 선물이 전달됐다. 이 모든 비용을 지불한 것이 신부 측이었음은 당연했다.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클레멘트는 피렌체와 교황청 전역에서 특별세를 걷어들여야 했다.


지난 포스트에서도 등장했던 그림이다. 가운데가 레오 10세 왼쪽이 줄리오(클레멘트 7세)다. (라파엘로)

 

   클레멘트 7세는 다음 해인 1534 9 지병으로 사망한다(증상으로 미루어 보았을   관련 질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재위는 종교개혁, 영국 교회의 분리, 로마의 약탈이라는 참사들로 얼룩진 것이었다. 역대 최악 교황의 꼬리표가 붙어도 지나치지 않은 족적이었다.  박쥐 같은 행동으로 동맹국을 모두 잃었던 것처럼, 그의 교활하고 오만한 성품은 교황청   누구의 존경도 얻어내지 못했다. 교황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는 로마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시민들은 칠에 걸쳐 그의 묘에 거듭 침입하여 낙서를 하고 무덤에 오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클레멘트 7세는 메디치 가문의 장으로서 의미심장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사코 디 로마의 암흑 속에서도, 그는 피렌체를 수복하고, 구상하고 있던 정략결혼을 완수시킬 묘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결국 카테리나와 알레산드로를 각각 프랑스와 에스파냐 왕족과 혼인시킴으로써 생전에 메디치 가문을 유럽 왕족의 중심부로 편입시켰다. 이제 이러한 클레멘트 7세의 헌신이 열매를 맺게 될 지의 여부는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게 될 메디치가의 후예들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대공 코시모 메디치와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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