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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Oct 24. 2021

미켈란젤로 3 - 시스티나 천장화

피렌체 29

  1504년, 다비드의 완성과 함께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로 등극한 미켈란젤로는 그의 일생에서 손꼽히는 행복한 시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감들이 몰려들었고, 제안되는 보수 역시 상당했다. 피렌체 공화국 정부는 미켈란젤로에게 열두 제자의 조각을 피렌체 대성당 내부에 설치하는 작업을 일임했고, 도시의 양모 길드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공방을 마련해주었다. 그만을 위한 저택 역시 제공될 예정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에서 일전에 계약한 시에나 대성당을 위한 조각상들과 그 외 새로운 조각상을 마치는 데 전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비드의 성공이 그에게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일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외에 바라는 것이 없다고 고백하곤 했던 미켈란젤로가 고대하던 상황이기도 했다. (부오나로티 가문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별장을 매입하는 데 열성을 보였던 그였지만, 그에게 은퇴 후, 농장을 돌보면서 사는 일반적인 노후 계획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끝없는 창작 활동 외 다른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는 신이 그를 도구로서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조각품을 무한정 수확하는 행복한 시절은 미켈란젤로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전사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다음 해인 1505년에 그를 로마로 소환한 것이었다. 바티칸 성당의 피에타에 크게 감명받은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그의 영묘 제작을 일임하고 싶어 했다.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 묘보다 더 웅장한 건축물을 구상하고 있던 교황은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에게 그의  마솔레움을 맡기고자 했다.


  '전사 교황'이라고 불릴 만큼  호전적인 인물, 율리우스 2세의 명은 거부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교황청의 권위와 힘은 절대적이었다(교황청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에스파냐)으로 대표되는 외세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피렌체 공화정의 수장 피에로 소데리니는 미켈란젤로를 아꼈지만, 그에게 예술가 한 명을 위해서 교황청과의 전쟁까지 불사할 배짱은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떠나야만 했고, 그에게 맡겨진 조각상 작업 역시 모두 보류돼야 했다. 그는 복잡한 심정 속에서 로마로 향했을 것이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율리우스 2세는 피에타의 아름다움을 치하하며, 피에타가 자리한 베드로 성당에 그의 영묘를 제작해 줄 것을 주문했다. 미켈란젤로에게 기획과 설계의 총권이 맡겨졌고, 연봉 1천2백 두카트와 1만 두카트(완공 시에 하사될)가 추가로 약속됐다. 완성돼야 하는 조각상만 수십 점이 넘었다. 조각가에게 있어서 평생의 과업이 주어진 셈이었다.  젊고 야심 찬 미켈란젤로로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가 설계한 40점 넘는 조각을 전부 조각하기 위해선 수십 년도 모자랄 터였다). 영묘 건설에 굉장한 적극성을 보여주던 교황의 후원 아래서 미켈란젤로는 이 거대한 작품을 향한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곧장 폭 10미터에 높이가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마우솔레움/영묘가 설계됐다. 요구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대리석을 공수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직접 피렌체 북서쪽의 카라라로 향하여 8개월간 대리석의 채석과 운반 과정을 지휘했다. 무려 1백 톤에 달하는 대리석들이 그가 조각에 임하는 동안 차차 로마로 운반될 예정이었다. 교황 역시 협조적이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미켈란젤로의 작업 현장을 찾아서 영묘에 대한 계획을 논했다.



    그러나 교황은 용맹한 만큼 변덕스러운 남자였다. 대리석들이 전부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열정은 몰라보게 식어버렸다. 1506년 초를 기점으로 교황의 온 정신은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으로 쏠리고 말았다(미켈란젤로에게 첫 연봉을 지급하기도 전이었기에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의 가격을 치를 수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 그토록 열성을 부렸던 것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변화였다.  미켈란젤로는 이것이 자신을 시기한 교황의 건축가 브라만테(베드로 성당 재건축 책임자였던)의 농간이라고 생각했고, 약속을 어긴 교황을 향한 반감과 함께 브라만테를 향한 증오를 평생 거두지 않았다. 대리석 채석 작업에 청구된 비용마저 자신의 돈으로 치러야 했던 미켈란젤로는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는 영묘를 위한 자금을 요구하기 위해 교황과의 면담을 몇 차례 요구했지만 거듭 문전박대당했고, 심지어 카라라에서 공수해온 대리석은 성 베드로 성당 공사에 쓰이기 시작했다. 결국 바티칸에서 "영묘에는 단 한 푼도 더 쓰지 않겠다"라는 교황의 고백을 엿들은 그는 수모와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로마를 탈출해 피렌체로 떠나버린다.  



    미켈란젤로를 냉정하게 홀대했던 율리우스였지만 그에겐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가를 놓아줄 의향이 없었다. 곧장 교황의 병정들이 미켈란젤로를 추격했고, 필사적으로 말을 달린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겨우 피렌체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다시금 피렌체 공화국을 압박해오며 그의 귀환을 요구해오는 교황의 손아귀를 피해 갈 재주는 없었다.  결국 1506년 11월, 교황이 머물고 있던 볼로냐로 소환된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율리우스와 다시 대면하고, 그와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관계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는 예전과 같이 돌아갈 수 없었다).


     미켈란젤로를 다시 곁에 두게 됐으나, 영묘를 향한 교황의 열정이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켈란젤로를 다른 계획에 투입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이었다.


   피렌체 출신 건축가 바치오 폰텔리가 1481년에 완성한 시스티나 예배당은 열왕기(Book of Kings)에 명시된 솔로몬 왕의 신전의 비율을 그대로 따온 예배당(건물의 길이(40m) = 높이(21m)의 약 두 배 = 너비(14m)의 약 세 배)으로서, 새 교황의 선출을 결정하는 장소이자, 베드로 성당 재건 전 르네상스 바티칸 교황청의 심장과도 같은 장소였다(오늘도 이곳에서 새 교황이 선출된다)


 채석장에서 보낸 8개월 내내 대리석을 향한 갈망을 불태웠던 미켈란젤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뜻을 따르기로 합의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교황에게 분노하고 있던 그였다. 게다가 그에겐 프레스코화를 완성한 경험이 없었다.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프레스코화 기법을 수업했으나, 어디까지나 소년 시절 도제로서의 경험에 불과했다(피렌체에서 카시나 전투 프레스코화 작업을 자청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숙적 다빈치를 꺾어놓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이번에도 교황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는 예배당 천장화에 앞서 볼로냐에서 1년 2개월을 고스란히 바쳐 율리우스 2세의 청동상을 주조해야 했다(그에게 청동상은 첫 도전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예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서 원치 않는 청동상을 주조해야 했던 당시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1508년 5월, 교황의 명을 따라 청동상 작업을 마치고서야 로마로 복귀한 미켈란젤로는 결국 시스티나 예배당의 20미터 높이 천장으로 파견된다. 미켈란젤로는 결국 이 울퉁불퉁하고 경사진 돔 모양의 750여평을 전부 채우기 전까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교황은 아마도 미켈란젤로에게는 무엇이든지 맡기기만 하면 희대의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한 듯하다. 미켈란젤로의 입장에선 그거 증오하던 브라만테를 위시한 경쟁자들이 그의 실패만을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맡은 일을 허투루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전기를 읽는 독자로서 위대한 예술가를 이처럼 학대하는 교황의 고집이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프레스코화)은 제 예술이 아닙니다”라는 미켈란젤로의 항의를 묵살해 버리고, 매번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마는 율리우스 2세의 독불장군 기질이 후세를 위해 남긴 유산은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막무가내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없었을 것이고(심지어 오늘의 베드로 성당 역시 없었을 것이다), 르네상스 전성기는 그 최고의 걸작을 잃었을 것이며, 가히 짐작건대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의 볼륨 역시 한 눈금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일 디비노(신성한 자)’,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그만큼의 걸작이었다.

 

시스티나 예배당과 베드로 성당의 쿠폴라

                       


     미켈란젤로가 천장화의 임무를 내키지 않아 한 이유는 우선적으로 프레스코가 그것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가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작업이라는 데 있었다. 젖은 석고에 색을 입혀 석고가 마르면서 그림이 탄화칼슘화되며 벽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프레스코는 이 화법의 전성기였던 르네상스 당시에도 실력이 없는 화가들은 감히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중노동을 요구하는, '진정 남자다운'(조르지오 바사리) 화법이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와 라파엘로의 벽화들이 외부 공기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음에도 오늘날까지 보존된 데에는 그것이 프레스코화였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프레스코 작업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벽돌로 쌓아 올려진 건물의 표면에 아라치오라고 불리는 두꺼운 석회 벽이 발라져야 했다. 그 후, 화가는 하루 내에 작업할 양만큼의 젖은 석회, 인토나코를 발라서 표면을 균일하게 만든 후, 석회가 마르기 전에 벽면의 그림을 전부 끝내야만 했다. 따라서 화가들은 그들이 하루 내에 끝마칠 수 있는 면적을 계산하여 하루치  인토나코의 양을 결정해야 했다.


 이와 같은 하루치의 면적은 1 조르나타라고 불렸다. 사실상 1 조르나타는 일반적으로 화가에게 오로지 4시간 정도의 작업 시간밖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석회가 마르는데 걸리는 8시간 중 첫 2시간은 벽이 지나치게 젖어 있는, 배경 작업 외 채색이 가능하지 않은 시간이었고, 마지막 2시간은 작업을 하기에는 석회가 이미 지나치게 굳어버린 시간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5세기 르네상스 당시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프레스코화의 주요 인물을 그리는 데에 3 조르나타를 할당했다. 배경에 1 조르나타, 몸에 1 조르나타, 가장 중요한 머리/얼굴과 손을 그리는 데 1 조르나타를 쓰는 식이었다.


창세기의 아홉 장면 중 하나인 '추방'. 미켈란젤로의 작업 순서를 따라 조르나타의 경계선을  표시한 그림.



 물론 석고가 마른 후에도 ‘덧칠’(세코)이 가능하기는 했다. 그러나 덧칠된 색은 벽의 석고와 함께 칼슘화 된 본래의 프레스코만큼 영구적일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벗겨지거나 변색되기 십상이었다. 불가피한 경우, 혹은 화려한 색상의 치장에만(프레스코에 금장 장식을 더하는 작업은 덧칠로서만 이루어져야만 했다) 사용된 세코라 불리는 이 덧칠 과정은 화가와 의뢰인 모두 원치 않는 것이었다. 의뢰한 작품이 처음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보존되길 바랬던 의뢰인들은 종종 계약서에 프레스코화가 ‘부온 프레스코’ 일 것. 즉, 덧칠 없이(단 한 차례의 작업으로) 완성된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명시하기도 했다.


    프레스코가 야기하는 이러한 까다로움을 잘 알고 있었던 바사리는 프레스코화에 비하면 캔버스 위에 유화를 그리는 화가들에겐 무한한 게으름이 허락되고 있는 셈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비계 위에서 그림을 무한정 살펴보는 일을 즐겼던 다빈치는 프레스코화가 아닌 새로운 화법을 고안해내기 위한 무던한 노력을 쏟았는데, 이와 같은 수고에는 그에게 프레스코화를 완성해 낼 성실함이 결여돼 있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김준산))


    따라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서 후세에 길이 남아야 할 천장화가 부온 프레스코로 완성돼야 함은 물론이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손이 가장 빠르기로 유명했던 프레스코의 장인 기를란다요의 도제로서 예술가의 여정을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이 새로운 도전이 어떤 어려움을 야기할 것인지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을 테다.


라파엘로의 타피스트리, 페루지노와 보티첼리의 벽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주문 당시 교황이 구상하고 있던 천장화는 예배당 창문 위 공간(스팬드럴)에는 12 사도의 그림을, 천장의 중앙 공간에는 기하학무늬를 채워 넣는 비교적 단순한 구성이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 초안을 거부했다. 그 정도로는 '초라한' 천장화가 될 뿐이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교황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 구성을 전적으로 일임했고(미켈란젤로의 회상에 따르면 그러했다. 다만 추측컨대 예배당 천장화라는 중요한 작업이 전적으로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졌을 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마 교황청의 누군가가 미켈란젤로에게 조언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 구조는 미켈란젤로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무려 삼백여 점의 인물화와 건축물과 장식으로 채운 새로운 설계가 탄생했다. 결국 천장화의 고된 작업을 미켈란젤로 스스로가 자청하게 된 셈이었다. (우리는 천장화를 강제한 후에, 설계에 있어서는 자유를 허락한 율리우스 2세의 영리함을 다시 한번 칭찬해야 하겠다)그림 한 점에 대 여섯 번의 스케치가 필요한 만큼 그는 천장화를 완성하기 위해 무려 천 장이 넘는 밑그림을 직접 그려내야만 했다.


    그림에 앞서서 준비 작업이 선행돼야 했다. 20미터 높이의 천장에 석고를 바르기 위해서 비계가 설치됐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석고가 기존의 천장화(피에르 마테오가 작업한 푸른 하늘에 별이 박혀 있는 단순한 배경의 프레스코화였다)와 함께 제거되고 2cm의 아라치오가 천장에 발라졌다. 이 작업은 미켈란젤로의 절친한 친구였던 피렌체 출신 피에로 로셀리에게 맡겨졌다(미켈란젤로는 조수진 전원을 피렌체인들로 구성할 것을 고집할 만큼 피렌체인들을 향한 편애, 타 지역인들을 향한 불신을 숨기지 않았다)친구를 위해 아라치오를 건조하는 과정을 최대한 신속하게 끝마쳐 준 로셀리의 헌신 덕분에(젖은 석고 위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화의 특성상 혹독한 추위가 찾아오기 마련인 겨울에는 부온 프레스코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 가을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제 그가 구상한 천장화의 설계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가 그려지기 전 시스티나 예배당 양면의 벽에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프레스코화를 완성해둔 바 있었다. 페루지노, 보티첼리, 시뇨렐리, 기를란다요 등의 작품들이 한쪽 벽에는 예수의 삶, 반대쪽 벽에는 모세의 삶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는 신이 10 계명을 하사한 모세가 ‘구체제/구약 세계의 수호자라면, 예수는 신체제/신약 세계의 수호자’ 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는 코니스에 새겨진 내용이기도 했다)


 프레스코 위, 예배당 창문들의 옆, 아치의 기둥에는  연대순으로 나열된 초대 교황들의 초상화가 마치 니치 안 조각상들처럼 배치돼 있었다. 양쪽 벽에는 모세와 예수가, 그 위로는 역대 교황들이 나열된 이 구조는 로마 교황청이 모세와 예수의 유지를 계승함을 피력하는 동시에 교황청의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을 가시화하며, 교황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제시한 천장화의 구조는 모세와 예수 이전의 그리스도 역사를 천장 전면에 펼치는 것이었다. 우선 천장 중앙의 공간에 창세기의 1)아홉 장면이 배치돼야 했다. 2)이 장면들을 둘러싼 공간(삼각 스팬드럴 사이 공간과 예배당의 양 끝에 위치한 궁륭 사이 공간)에는 7명의 예언자와 5명의 무녀들이, 3) 창문 위 스팬드럴 속에는 예수의 조상들의 초상화가, 4) 마지막으로 천장의 네 모퉁이 삼각 궁륭에는 구약 성경에서 선별된 네 장면을 그려내는 계획이었다.

마땅한 사진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직접 시스티나 예배당 그림들에 이름들을 적어 넣어 보았다. 미켈란젤로는 윗 그림 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장을 채워나갔다.



    신이 빛과 어둠을 분리하는 순간부터 술 취한 노아까지의 아홉 장면과 이 아홉 장면들을 관조하며 이로부터 예수의 도래를 예지 하는 다섯 무녀와 일곱 예언자들 (각각의 예언자/무녀의 곁에 그들의 지성과 예지력을 상징하는 두 정령/요정이 추가됐다), 요셉의 선조들과 권선징악(하만의 희생의 경우 – 십자가에서 희생된 예수를 연상시키는 나무의 묘사)의 네 장면 모두 예수의 등장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창세기를 사유하며, 무녀와 예언자들이 정신으로 예지 하는 일을 요셉의 조상들이 세속에서 현실화하고 있는 형상을 나타내는 구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역사를 완성하는 과업을 자청한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가운데 공간에 창세기의 주요 장면을 완성한 후, 그 주변의 무녀/예언자와 스팬드럴 속 예수의 조상들을 그리는 식으로 천장을 채워나갔다. 그 방향은 만취한 노아(+ 스가랴, 델피의 무녀, 요엘) -> 대홍수 (+예수의 가족)-> 노아의 제사(+이시야, 에리테리아 무녀) -> 추방 (+예수의 가족) -> 이브의 탄생 (+쿠마에 무녀, 이스마엘) -> 아담의 탄생 (예수의 가족) -> 물과 뭍 (+페르시아 무녀, 다니엘-> 해와 달 (예수의 가족) -> 빛과 어둠 (예레미아, 리비아 무녀, 요나) (즉 윗 그림 상 왼쪽-> 오른쪽 방향)였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처음으로 작업한 장면은 좌측 끝의 만취한 노아가 아닌 '대홍수'였다 - 유일한 예외에 해당된다. 따라서 실제 차례는 대홍수 -> 만취한 노아-> 노아의 제사-> 추방-> 이브의 탄생....이었다. )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올려다보고 있는 요나
알베르티는 '관객의 감정을 유도하는 '관객'을 그림 속에 추가하는 일'을 권한 바 있었다. 창세기 장면들을 올려다보며 경외와 공포에 휩싸인 요나의 얼굴은 관람객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창세기의 장면들을 올려다보면서 손가락으로는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나무에 매달린 하만을 가리키는 요나의 모습은 창세기를 관조하며 예수의 도래를 예지 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가시화한다.





대홍수

 

델포이 무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중심적 존재였던 그녀를 앳된 소녀의 얼굴로 표현했다.


초기 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의 경험 부족과 피렌체 출신 조수들이 로마의 기후에 대한 무지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처음부터 눈에 잘 띄는 위치의 그림에 손을 대는 일을 피하려 했던 미켈란젤로는 입구에서 첫 장면인 '술 취한 노아'의 자리가 아닌 두 번째 장면인 ‘대홍수’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프레스코 작업을 시작했다. 첫 장면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일반적으로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은


1) 작은 스케치 -> 스케치를 실제 사이즈의 카툰으로 확대-> 카툰 내 그림의 경계선들을 따라  0.8cm마다 구멍을 뚫는 작업 -> 이렇게 완성된 밑그림을 벽면에 대고 목탄으로 경계선 주위를 두드려서 벽면에 목탄 자국으로 그림의 선을 표시하는 작업-> 밑그림을 참고하면서 경계선을 따라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더하는 작업- 으로 이루어지거나,

선을 따라서 구멍을 낸 밑그림을 벽면에 대어 보는 모습. 이 상태로 목탄으로 그림 위를 때려서 벽 위에 점선을 남기게 된다
목탄이 남긴 점선. 작가는 밑그림을 옆에 두고 참고하면서 점선을 길잡이 삼아 채색을 한다.


혹은


2) 작은 스케치 -> 스케치를 실제 사이즈의 카툰으로 확대-> 그림을 벽면에 대고 날카로운 물체로 벽에 흠집을 내는 작업 -> 흠집을 표시로 밑그림을 참고하며 그림을 완성


으로 대표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도구를 사용해서 밑그림의 경계선을 따라 석고에 선을 내고 있는 모습


 일반적으로 인물들을 묘사하는 정교한 작업, 특히 얼굴의 표현에는 스폴베르라고 불리는 첫 번째 방법(밑그림에 구멍을 뚫어서 목탄 자국을 남기는 방법)이, 배경 작업과 배경 인물 등에는 두 번째 방법이 사용됐다. 반면 ‘대홍수’ 그림을 정교한 근육질의 수많은 육체로 채워놓은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화 대부분을 스폴베르 방식으로 매우 정교하게 메꾸어 나갔다.



     인간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는 물세례를 피해 마지막 남은 두 바위(한쪽에는 생명의 나무, 다른 쪽에는 선악의 나무가 위치하고 있다)를 찾아 피신하는 사람들을 미세한 세부 요소들까지 세밀하게 작업한 그림이다. 익사한 아들을 안아 올리는 아버지의 근육질 몸과 어머니의 다리에 매달린 아이의 도톰한 손등, 방주 위에 올라서려는 남성들의 역동적인 동작들과 근육들의 정교한 묘사, 뒤집히는 보트에 올라타려는 남자들의 발목이 수면 아래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모습, 희망을 상징하는 방주 위 꼭대기의 하얀 비둘기까지, 작은 세부들을 20미터 아래에서 그림을 올려다보는 관람객의 눈에도 보일 수 있게 하나하나 정교하게 그려낸 미켈란젤로의 세심함은 놀라운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를 집어삼키는 해일이 더없이 고요한 수면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는 걸핏하면 인류를 벌하곤 했던 변덕스런 신이 관장하는 구약성서적 세계의 잔인함을 이처럼 조용한 폭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대홍수를 통해 "세계는 신이 언제든 지워버릴 수 있는 그림과도 같은 것이다"(앤드류 그래햄-딕슨)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해석 역시 그럴듯하다.


 

미켈란젤로는 세계를 집어삼키는 해일이 상징하는 절대자의 힘을 고요한 무(無)로서 표현하고 있다. 분주한 피난민들의 아비규환과 그림 우측 상단 수면의 평온함이 대조되고 있다.


방주에 올라타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는 남자들의 근육까지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방주의 오른쪽 끝에는 붉은 옷을 입은 노아가, 꼭대기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가 눈에 띈다
수면 아래   발목과 몸통까지 정교하게 채색돼 있다.

다만 이 최종 작품에 도달하는 데까지 미켈란젤로와 조수들은 거듭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우선 처음 그려낸 구도와 구성을 전부 지워내고 다시 그리는 과정이 있었고(처음 시도가 미켈란젤로의 눈에 차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피렌체인들로 구성된 미켈란젤로의 팀이 습한 로마의 기후를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물을 많이 섞은 인토나토를 천장에 바르는 바람에 그림에 곰팡이가 슬어버리는 낭패도 겪어야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첫 장면을 완성하는 데 무려 수개월이라는 뼈아픈 시간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완성된 그림은 바로 입구에 가장 가까운 장면에 해당하는 '술 취한 노아'다. 술에 취해 나체로 잠들어버린 노아 옆에 선 노아의 아들들이 그의 몰골을 가리기 위해 천을 들고 접근하지만, 무너져 내린 아버지의 모습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얼굴을 돌리는 구약 성경의 구절을 묘사한 그림이다. 다만 성서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들들 역시 나체인 상태로 등장하고 있다. 모두가 동일한 선상에서 동일한 크기로, 매우 평면적인 구도를 연출하고 있다.

창세기의 아홉 장면은 작은 그림-큰 그림-작은 그림-큰 그림의 순서를 반복한다. 다섯 점의 작은 그림의 테두리에는 이그누디라 불리는 누드화가 네 점씩 추가됐다.
이그누디는 모두 그림 속으로 침범할 것만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미켈란젤로 특유의  힘을 감각할 수 있다. 이 '힘'은 질서 정연한 구조 안에서의 불협화음을 연출한다.  

    그림에서 확연하게 부각되는 것은 단연 노아와 아들들의 근육질 몸이다. 시스티나 예배당과 곧장 이웃하고 있는 서명의 방에서 라파엘로가 그려내고 있던 성체 분쟁, 또는 아테네 학당의 프레스코를 떠올렸을 때, 우리는 분명,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화의 구도에 있어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이 즐겨 지적하듯이 이 장면은 마치 만화의 한 장면처럼 구약성경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노아는 왼쪽 귀퉁이에서 밭을 일구고 있는 모습과 술에 취해 아들들 앞에서 나체의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하고, 아버지의 무너진 모습을 목격한 아들들의 고뇌를 얼굴에 전부 표현하는 선택 역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동일한 시기에 라파엘이 그려낸 성체 분쟁(1509-1510)이다.


    미켈란젤로는 일상생활의 '작은 물건들'을 표현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예술가였다. 그에게 있어서 시스티나 천장화의 주목적은 신의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서 가장 확실한 매개는 그 어떤 옷도 걸치지 않은 인간의 육체였다. 그에겐 작은 디테일들을 앞세우는 그림을 그려낼 의향이 없었다. 우리는 '대홍수'에서 피난민들이 짊어진 수많은 가정용품들을 발견하지만, 그 어떤 물건도 우리에게서 감정을 자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그래햄-딕슨(Andrew Graham Dixon)).


    미켈란젤로의 이러한 미학적 관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는 그의 플랑드르 화풍에 대한 평가였다. 1540년 포르투갈의 화가 프란시스코 올란드는 미켈란젤로와의 만남에서 그가 플랑드르의 화가들을 두고


 "플랑드르 [유화]에서는 오직 눈속임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고, 그것에 대고 욕을   없는 것들만 그린단 말이지. 주제는 물건, 상점, 벌판의 잔디, 나무의 그림자, 강과 다리, 그들이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그리곤 작은 것들을 여기저기 채우는 거지.  모든 것은, 누군가의 눈에는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생각도 없이 그려진 것일 뿐이야, 균형도, 비율도 결여돼있지. 선택도 배제의 과정도 없어.... [오직] 젊은 여자, 승려, 수녀, 진정한 화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몇몇의 귀족들[기쁘게  뿐이야]”


라고 혹평했다고 고백했다.(그래햄-딕슨(Andrew Graham Dixon))


 세 번째로 완성된 그림인 '노아의 제사'에 오면 구도의 변화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가랑이 사이에 양을 두고서 몸을 비틀고 있는 두 아들, 아궁이 안의 불을 살피는 아들의 역동적인 동작이 그림의 상단에서 눈을 내리뜬 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사색에 잠겨 있는 노아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이는 흡사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서 완성한 <<도니 톤도>>의 구도를 연상시키는데, 홍수로부터 그들의 목숨을 지켜준 신을 위해 감사의 의식을 올리고 있는 가족의 배경에 위치한 사각형의 건물은 대홍수에 등장했던 방주로 추측된다. 이 ‘노아의 희생’의 주제의 진위를 두고 오랜 세월 논쟁이 이어졌는데,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노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세 장면을 서사의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고, 홍수로부터 그들을 지켜준 신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제사 장면을 홍수 앞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콘디비와 바사리는 이 장면을 카인과 아벨의 희생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 장면에서 모두 붉은 옷을 입고 등장하는 노아의 존재와 세 아들, 그리고 방주가 이 장면이 '노아의 제사'임을 확인시켜 준다.


    짐작건대 미켈란젤로는 작은 그림- 큰 그림- 작은 그림의 순서를 감안하여, 대홍수가 큰 그림으로 표현돼야 함을 인지하고서 그림의 배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다음으로 선택한 장면은 에덴에서 추방되고 있는 아담과 이브다. 추방, 이브의 탄생, 아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주 테마로 하는 세 장면 중 하나다 (노아가 등장하는 세 장면, 아담 또는 이브가 등장하는 세 장면, 신만이 홀로 등장하는 세 장면이 창세기의 아홉 장면의 구성이다). 이 작품 역시 추방의 서사와 교훈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악의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눠진 이 그림은 한쪽에는 뱀의 꼬리를 한 사탄에게 유혹당해 선악과를 따고 있는 이브와 직접 나서서 선악과를 향해 손을 뻗치고 있는 아담이, 반대쪽에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있는 아담과 이브가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명을 어긴 죄악을 이브의 탓으로 돌리는 전통적 해석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선악과를 향해 적극적으로 손을 뻗치는 아담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주장하는 사뭇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왼쪽 아담의 성기와 이브의 얼굴이 거의 닿기 직전까지 밀착돼 있는 구성 역시 그들의 ‘죄악’을 암시한다. 다만 이 장면 속 이브의 얼굴은 ‘미켈란젤로는 여성적 미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오명을 완벽하게 불식시킬 정도로 아름답다(델피의 무녀와 함께). 우리는 피에타의 성스러운 성모의 온화한 모성애로 가득한 얼굴뿐 아니라 싱그러운 소녀의 얼굴 역시 완벽하게 표현해내는 미켈란젤로의 역량을 실감하게 된다. 반면 선악의 나무 오른쪽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있는 이브는 단숨에 몇십 년은 더 나이를 먹은 것처럼 주름 투성이의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다. 검으로 강하게 아담을 내리치고 있는 천사의 엄중한 얼굴과 나뭇잎, 바위, 녹지로 채워진 그림의 좌편에 비해 허허벌판의 불모지로 표현된 우편의 배경 역시 ‘대홍수’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적 세계의 잔인함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


    그다음 장면(작은 그림)인 '이브의 탄생'이다. 위엄에 가득 찬 얼굴의 신이  땅을 밟고 선 채로 마치 이브를 손짓으로 소환하듯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이브는 이에 부름을 받고 일어서고 있다. 그림의 구도는 아담의 옆구리 뼈에서 태어난 이브의 창조 서사를 반영하고 있다. 반면 죽은 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그늘 속 아담의 서늘한 형상은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암시하고 있다. 서로 닿을 듯이 가까이 위치한 이브와 여호와가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고, 아담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직접 손짓으로 이브를 탄생시키는 적극적 창조주의 모습을 나타낸다.

쿠마에 무녀



 1509년 9월, 미켈란젤로는 천장의 중앙에 도달했다. 비계가 철거되고, 절반이 완성된 천장이 교황, 추기경, 교황청의 임원들(율리우스에게서 명예직을 하사 받은 라파엘로를 포함한), 로마의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절반만 완성된 시스티나 예배당을 상상하기는 어려우나, 창세기의 다섯 장면을 둘러싼 예언자/무녀들과 (예배당의 입구에 위치한 스가랴는 율리우스 교황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노아의 만취, 노아의 희생, 이브의 탄생을 장식하고 있는 네 명의 이그누디(누드화), 창문 위 스팬드럴을 수놓은 예수의 조상들이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고뇌와 수난, 그 어떤 각도에서도 한눈에 그림 전체를 섭렵할 수 없는, 동시에 역동하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적나라하게 다각도에서 쏟아내고 있는 이 천장화가 행사에 참관한 모두를 압도시켰음은 당연했다. 콘디비에 따르면 이 천장화의 위엄에 비해 사인의 방 벽면 자신의 프레스코화가 상대적으로 철저하게 초라해져 버린 것을 실감한 라파엘로가 그를 총애하던 교황에게 천장의 나머지 절반을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요구했다고 하는데(미켈란젤로의 회상이지만, 이는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제 아무리 변덕스러운 교황인들 천장화에 가득 담긴 미켈란젤로 특유의 비장미(김준산)를 눈앞에 두고서 천장의 나머지 절반을 다른 예술가에게 맡기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테다.(라파엘로가 천장의 절반을 요구했다는 일화는 우르비노 출신의 브라만테와 라파엘로가 늘 그를 모함하고 있다고 믿었던 미켈란젤로의 회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자료에서도 이 사실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로마를 떠나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데 열성을 부리던 ‘전사 교황’ 덕분에 절반이 완성된 천장화의 공개는 1년이 지체됐고, 천장화 작업 역시 14개월이나 중단됐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이 기간 내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계를 철거한 후 20미터 아래의 바닥에서 자신의 그림을 올려다볼 기회를 가지게 된 미켈란젤로는 나머지 작업에 있어서 훨씬 더 철저한 준비와 프레스코화에 대한 자신감으로 임하게 된다.

 


 작업 재개  처음으로 완성된 장면인 ‘아담의 창조. 미켈란젤로는 작업이 중단된 시간  수개월을  장면의 밑그림에 쏟은 끝에, 작업이 시작한   16 조르나타 만에 전체 그림을 완성시켰고, 아담을 그리는 데는  4 조르나타 밖에는 소비하지 않았다( 시점에서부터 미켈란젤로는 밑그림을 스폴베르가 아닌 밑그림의 선을 간단하게 표시만 하는 간단한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 (로스 )). 절반이 완성된 자신의 그림을 올려다본 미켈란젤로가, 나머지 절반의 그림에는 인물들이 확대될 필요를 느꼈다고 하는 주장하는 학자들에게도 타당성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분명 후반에 작업된 장면들은 이전의 그것들에 비해 훨씬  크게 확대된 모습을 보여준다. (예언자와 무녀들의 크기 역시, 처음에 비해서 1.2m  확대됐고, 스팬드럴  예수의 가족의 그림들 역시 그림  등장인물의 수는 감소반면,  크기는 확돼됐다)


    수염을 휘날리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신의 형상은  어떤 전례찾을  없는 것이었다. 이브의 탄생에서 이미 이브를 소환하는 신의 적극적인 손짓을 표현한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탄생에서 신의 역동성을 극단으로 증폭시킨다. 인체의 사나운 생동감을 사랑했던 미켈란젤로가 상상하는 전능한 존재의 모습은 하늘을 가르며 직접 손을 뻗어 그의 창조물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다. 스스로를 신의 도구로 여겼던 '신성한 ' 그의 그림을 통해서 신의 형상을 그의 방식대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미켈란젤로 이후로 우리는 하늘을 나는 근엄한 노인이 아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성화를 상상할  없게 돼버렸다.



 서양 예술사에 존재하는 그 어떤 그림보다 더 잘 알려진 장면이다. 이 그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점이다. 아담의 창조라는 이름이 없어도 우리는 이 장면을 아담을 향해 비행하고 있는 신과 아담, 두 인물로 구성된 그림으로서 인식하게 되고, 둘 중에서도 천사들과 자색 베일로 둘러싸인 신보다는 나체의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아담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자주 언급되는 바처럼 아담은 ‘생기가 없는 빈 육체’로서 흙색-녹색-하늘색으로 변해가는 땅 위에 몸을 기대고 있다.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줄 신의 손가락을 향한 갈망이 그의 몸짓에서 드러난다. 인류의 조상, 미켈란젤로의 아담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인 미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위엄이 넘치는 신의 모습이 ‘정신적 메시지’로서의 역동성을 의미했다면, 미켈란젤로가 생각하는 인간은 (다비드에서 가시화됐듯이) 모든 비율적 아름다움을 갖춘 근육질의 몸이었던 것이다. 볼록한 형상으로 돌진하는 신과 오목하게 수동적인 모습으로 동경하는 절대자를 향해 땅에 기댄 채(그의 이름, 아담은 ‘땅’을 의미한다) 손을 뻗고 있는 아담의 대조가 눈에 띈다. 15세기 르네상스가 한 세기 전체를 소진하여 일구어낸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가 미켈란젤로의 아담에 이르러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을 두고 "인간의 붓과 도안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 우주의 최고 창조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것 같다"라고 극찬했다.




 시선을 돌려서 하늘을 가르고 있는 신을 살펴볼 때, 우리는 날개 없는 천사들이 온 힘을 다해서 그의 몸을 떠받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담을 가리키고 있는 오른팔의 반대쪽, 여호와의 왼팔을 어깨 위로 감고 있는, 성모 마리아, 혹은 이브로 추측되는 여성이 아담을 뚜렷이 응시하고 있고, 신의 왼쪽 손가락은 금발의 아기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이 구도가 신이 오른손으로는 아담을 탄생시키는 동시에 왼손으로 예수의 탄생을 암시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기에 우리에겐 미켈란젤로가 이룬 혁신이 실감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베일과 수많은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신은 동시대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일반적으로 우상화 동반되는 수많은 화려한 장식을 생략한 모습이다. 얇은 로브만을 걸친 위엄 있는 노인으로서의 신의 모습은 갖가지 색채와 치장을 걸친 신의 모습만을 보아온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시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줬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켈란젤로는 아담과 이브의 세 장면을 마치게 된다. 이후로 남은 세 장면에서 그림의 구도는 더욱 확대된다. 이를 두고 이야기되는 것은 ‘바닥에서 그림을 올려다본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단순화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지만, 창세기의 서사에 있어서 오직 신만이 등장하게 되는 첫 장면들에서 등장인물의 숫자가 줄어들고, 구도가 확대되는 것은 당연한 변화였다.  


미켈란젤로가 약 1: 1.618의 황금비율의 구도로 각 그림들과 장면들의 크기를 배치했다는 분석 역시 존재한다. (www.goldennumber.net)


 반면 여호와를 자세하게 묘사해야 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남겨둔 미켈란젤로의 결정은 의도적이었을 수 있다. 즉 프레스코화에 자신이 생겼을 때 절대자의 인물화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는 가설 역시 그럴듯하다. 어찌됐건 작업 후반기,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화에 확실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남은 세 장면을 무서운 속도로 끝마치게 된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창세기 서사 순서에서는 첫 장면)인 빛과 어둠을 석고에 새겨진 밑그림을 완전히 무시한 채 단 하루 만에 즉흥적으로 완성해냈다(로스 킹)) (작은 장면의 면적은 5 평방미터였다)



 다음 장면은 물과 땅을 분리하는 신이다. 20미터 아래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신을 올려다보는 일은 매우 기묘한 경험을 선사한다. 예배당의 어느 위치에서도 신이 관람객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 절대자는 팔을 활짝 벌려서 우리 위를 압도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의 단축법이 빛을 발하고 있다.


 

단축법의 예시


리비아 무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리비아 무녀의 스케치. 회전하고 있는 몸의 생동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손과 발가락의 연출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큰 그림/장면인 해와 달, 땅을 창조하는 신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시금 창세기의 서사를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미켈란젤로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등을 돌린 신의 엉덩이와 발바닥을 감히 노출시킨 결정 역시 획기적이다. 이전까지의 정교한 선보다는 붓을 강하게 휘갈김으로써, 바람에 날아가고 있는 머리, 수염, 옷감의 입체감을 연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새로운 테크닉을 발견하게 된다.



    양 팔을 활짝 벌린 채로 한 팔로는 해를, 한 팔로는 달을 창조하고 있는 신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세 시간 동안 해가 빛을 잃었다"는 신약성경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에 헌정한 십자가의 예수상(나무)


      


    왼쪽에서는 우리에게 등을 돌린 신이 오른손으로 땅과 풀을 창조하고 있다. 두 인물화 모두 신의 역동적인 손짓을 생생하게 연출하고 있지만, 그 생동감은 절대적으로 축소술에 의해 구현되고 있다. 해를 창조하고 있는 신의 오른손과 달을 창조하고 있는 왼손, 그리고 땅을 만들어내는 왼쪽 그림의 오른팔 모두 입체감을 사용하여 각각의 팔이 그림의 면적보다 훨씬 더 큰 공간을 횡단하고 있는 것과 같은 착시 현상을 유발한다. 그 깊이가 암시하는 두 인물화의 크기 역시 만약 그림의 표면으로 두 그림을 당겨온다면, 전체 공간을 훨씬 넘어설 것이라는 추측을 유발한다.(프레데릭 하트(Frederick Hartt))


  


    같은 기술(축소술)이 마지막 장면, 빛과 어둠을 분리하는 신에게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홉 장면 중 유일하게 빛과 어둠을 분리하는 신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로 구현된 그림이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은 신의 모습은 성체를 봉헌하는 사제를 연상시킨다.


    전술했듯이 프레스코화와 축소술의 사용에 완벽한 자신감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이 마지막 장면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벽에 옮긴 밑그림을 완전히 무시하고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신의 모습을 더 역동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신의 상체를 사선으로 더 격하게 비틀었다(이 사실은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석고 표면에 남아있는 밑그림의 흔적을 통해 확인됐다). 평면의 천장에서도 하늘로 솟아오르는 입체 조각상을 쌓아 올릴 수 있을 정도로(그래햄-딕슨) 프레스코화의 대가로 거듭난 미켈란젤로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1512년 10월 31일 드디어 완성된 천장화가 교황과 추기경들에게 공개됐다.  동시대인 그 누구도 더 이상 '신성한 자'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할 터였다. 바사리는 "천장화가 공개되자 각지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려고 달려오는 소리가 귀에 울릴 정도였다. 그것은 과연 사람들이 보고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위대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로스 킹)에서 발췌) '다비드'의 관한 포스트에서 전술했듯이,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은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쉼 없이 만인의 사랑을 받아 왔다. 무지한 대중을 향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던 미켈란젤로였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그의 작품들이 주는 숭고함 아래서 숨이 멎는 경험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4년간 그의 모든 정성을 바친 천장화를 완성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우울했다.  전 로마의 경외심 역시 그를 달래주지 못했다. 그는 교황이 폐기한 영묘의 계획, 평생의 야망을 실현할 기회를 놓친 좌절을 여전히 애도하고 있었다. 그는 천장화 완성 후 아버지에게 “그림은 완성됐고, 교황은 만족했습니다”라는 단문으로 짧게 소식을 전한다.



이제 피렌체 역사로 돌아가서 그 흐름을 톺아보려 한다. 건축을 포함한 미켈란젤로 말년의 작업물에 대한 포스트는 16세기 피렌체 역사를 마무리 지은 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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