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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Sep 26. 2021

미켈란젤로 2

피렌체 28

미켈란젤로 2: 다비드



 1501년, 로마의 미켈란젤로는 고향의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낸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바쿠스와 피에타를 완성하며 완숙한 대가로 거듭난 그의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부에나로티 가문의 안전만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겐 고향에서 그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성공은 의미 없는 것과 같았다. 아들이 말하는 ‘불가능한 기적’이


“불이 물속에서 타는 것과 같은 것이냐?”


라 되묻는 루도비코 부에나로티는 아들에게 “영광은 고향에서 훨씬 더 값진 것”이란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쿠스와 피에타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는 피렌체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아들에게 조속히 피렌체로 돌아올 것을 권한다.



    사실인즉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4년을 로마에 머물며 희대의 걸작들을 탄생시켰음에도 그가 받은 돈은 150더켓에 불과했다. 이는 보통 조각가의 3년 치 급여에 불과했다. 새로운 일감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당장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의 어깨 위엔 이제 20대 초반인 동생들의 앞길을 살펴줘야 한다는 책임감마저 얹혀 있었다.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 벽장식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찾아내지 못한 미켈란젤로는 결국 같은 해 로마를 뒤로한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를 찾아온 새로운 의뢰인, 2년 후 비오 3세로서 교황직에 오르게 되는 프란체스코 피콜로미니 추기경이었다. 그가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 장식을 조각하는 일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1501년 6월에 이루어진 둘 사이의 계약은 각 조각의 크기까지 상세하게 명시할 정도로 세밀했고, 미켈란젤로는 곧 대성당 제단에 15개의 작은 조각품을 세우는 작업에 투입됐다. 후한 임금이 약속된 좋은 벌이였지만 이처럼 이미 설계가 결정된 조각들을 단지 기술자로서 완성하는 작업은 자존심이 강한 미켈란젤로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별다른 열정 없이 작업에 임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약속된 열다섯의 조각 중 단 하나의 조각만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시에나를 떠난다.



    한번 맡기로 한 작품을 내팽개친 그의 갑작스러운 일탈은 고집스러운 예술가의 투정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추기경과의 계약에 서명을 할 때부터 미켈란젤로의 온 신경은 이미 고향 피렌체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를 통해서 그가 오랜 세월 기다려온 전무후무한 작품이 곧 자신에게 맡겨질 것이란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추기경과의 계약을 위반하는 손해(이후 이 계약을 둘러싼 공방은 수십 년간 그를 괴롭히게 된다)를 무릅쓰고 급히 피렌체로 달려간 결정의 배경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리석 하나가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6미터의 대리석에서부터 피렌체의 상징, 다비드를  해방시키는 대업을 그의 것으로 확보한 것이었다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를 기다리고 있던 대형 대리석의 모형. 오른쪽으로 팔라초 베키오 입구 앞에 서 있는 다비드의 복사품이 보인다.


    피렌체 대성당 오페라이(건설 위원회)가 그에게 제시한 금액은 피콜로미니 추기경이 약속한 것보다 적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다비드는 무엇보다 고향에서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의미했다. 당시 피렌체에서 그의 명성은 미미했다. 억울한 노릇이었지만 피렌체인들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이룬 성공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의 귀환조차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도시 내 모든 관심은 같은 해에 피렌체로 돌아온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로 쏠려 있었다. 떠나기 전부터 이미 그 명성이 높았던 다빈치였다. 최후의 만찬, 스포르차 조각상 등 피렌체인들은 그의 밀라노에서의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에 피렌체를 찾아온 라파엘로 역시 가장 먼저 다빈치의 화풍을 모방하고 있었다. 다빈치는 26살의 미켈란젤로보다 두 배 가까이 나이가 많았던 선배 예술가였고(둘 사이에는 무려 23년의 터울이 있었다) 심지어 미켈란젤로의 첫 스승이었던 기를란다요와 동년배였다.  그러나  최고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미켈란젤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었다.

 

본래 다비드가 설치되기로 했던 자리에 세워진 유리 섬유 소재의 다비드 (2010 피렌체 포럼 행사)

    그에게 맡겨진 대리석의 크기는 6m에 육박했다. 하지만 높이에 비해 그 두께는 얇았고, 심지어 앞서 조각상을 위임받았던 조각가 아고스티노에 의해서 심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미켈란젤로는 구상하는 ‘거인’을 조각하기 위해서 20년 넘게 방치된 이 대리석의 거의 대부분을 활용하는 동시에 대리석 하단에 자리한 움푹 파인 부분을 현명하게 우회할 방도를 생각해내야 했다. 조각의 일부를 다른 대리석으로 작업한 뒤, 추후에 부착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미켈란젤로는 일찍이 도나텔로가 명시한  '하나의 조각상은 하나의 대리석 조각에서부터만 만들어져야 한다'는 규율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도나텔로는 "완벽한 조각은 언덕 위에서 굴리더라도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실제 다비드와 동일한 크기로 제작된 청동 모형. 다비드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사진이다.  (사진: getty images)

    실제 인체 크기의 세 배(당시의 단위였다) 이상의 다비드를 조각함은 여태껏 피렌체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고대식 조각상을 작업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접하고 온 고대의 이교도식 거대 조각상의 장엄함을 그리스도교 세계의 영웅 다비드를 통해 구현하려 했다. 당시 피렌체는 이 정도 크기의 고대식 ‘영웅상’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로마에서 본 고대의 유산을 피렌체에서 재현하는 시도에 착수했다.

이 정도 크기의 대리석상을 좁은 헛간 안에서 완성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사진: getty images)


 우선 다비드와 미켈란젤로가 단 둘이서 생활할 좁은 목재 헛간이 지어졌다. 미켈란젤로는 미완성의 작품을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밤이면 머리 위에 촛불을 꽂아두고서 작업을 이어갈 정도로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다비드에 혼신의 힘을 쏟았고, 옷을 갈아입는 일도 드물었다. 작업한 부분을 검토할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작은 나무 헛간 안에서 이 거대한 조각상을 단신으로 완성해낸 그의 능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목탄으로 깎아낼 부분이 표시된 대리석

    피에타, 바쿠스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는 특유의 방식으로 다비드를 대형 대리석으로부터 ‘꺼내’야’ 했다(미켈란젤로는 "조각은 쉬워. 그냥 피부까지 내려간 다음에 거기서 멈추면 되는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  미켈란젤로의 작업 방식은 우선 목탄으로 대리석에 필요한 표시를 마친 후, 오직 한 방향으로 대리석 안을 파고드는 것을 의미했다(지난 포스트에서 난 조르지오 바사리가 이러한 작업을 수면 아래에서부터 조각상을 꺼내는 일에 빗대었음을 언급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작업 방식은 조각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이 일정하게 제한된 relief 스타일의 조각상에 걸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작은 헛간 안에서 한 방향으로 뚫어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어느 각도에서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다비드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대리석이 매우 얇았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작업방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360도의  방향에서 감상할 수 있는 조각의 역사가 깊지 않았던 16세기 초에 오직 단 한 사람의 예술가가 이루어낸 쾌거였다.

 다비드 작업에 전념하고 있던 시기, 그는 스케치를 그리던 작은 종이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Davicte cholla fromba

e io choll’ archo

Michelagniolo


(다비드에게는 투석기가

내게는 나의 활이.

-미켈란젤로.)  


Anton Gill « Il Gigante. »


여기서 그가 말하는 활은 조각용 드릴을 작동하기 위해 사용되는 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용 연장을 들고서 ‘il gigante’라 불리던 거대한 조각상을 홀로 상대해야 하는 자신의 고초를 거인 골리앗에 맞서 싸운 소년 다비드의 전투와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릴로 대리석에 구멍을 내는 작업 (사진:http://www.artofmaking.ac.uk/)


    활을 이용해 작동하는 드릴은 고대부터 조각가들이 대리석을 깎기 위해 애용하던 도구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르네상스 조각가로서 가장 먼저 이 드릴의 사용을 포기한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였다는 것이다. 조각에 구멍 또는 깊은 홈을 파는 데 사용하는 드릴은 매우 정교하고 잘 닦인 조각을 연출하는 데 제격인 도구였다. 우리는 피에타의 매끈하고 정교한 모습에서 미켈란젤로의 드릴 사용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다비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표현에서도 제한적으로 드릴이 사용됐다). 그러나 다비드를 제작하게 된 시기부터 미켈란젤로는 드릴의 사용을 최소화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는 드릴보다는 톱니 모양의 정을 주로 사용하여 조각 표면을 거칠게 연출하는 방식으로 다비드를 깎아 나아갔다. 고대 조각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또 다른 도구인 곧은 일자 모양의 정 역시 미켈란젤로가 구현하고자 했던 유연한 조각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다비드에 맞서는 미켈란젤로의 주 무기는 절대적으로 이 톱니 정이었고, 역사상 그보다 톱니 정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조각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펜과 잉크를 다루듯 이 톱니 정으로 대리석 위에서 데생을 해 나아갔고, 다비드의 힘줄과 피부, 근육을 톱니 정으로 세밀하게 깎아냈다.


톱니 모양의 정으로 대리석을 깎아내고 있는 모습. (사진:https://meighanmaley.com)
미켈란젤로는 연필로 데생을 하듯 다비드를 깎아나갔다.

        잘 닦여진 홈을 통해 연출하는 정교함 대신 데생식으로 그려낸 거친 표면을 드러내는 조각 방식은 한눈에 전체 구조와 선들의 조화를 이해할 수 있는 조각을 선호하는 토스카나 특유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il gigante>>). 화려한 디테일보다는 조각 전체가 구현하는 선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연출하는 작업 방식은 미켈란젤로가 알베르티가 정립한 피렌체식 르네상스 미학(균형미와 미학적 일관성을 중시하는)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매우 혁신적인 조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등장과 함께 곧장 피렌체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데에는 이 거대한 조각상이 절대적으로 ‘피렌체 미학’을 따르고 있었다는 점이 크게 기여하고 있었을. 테다.  


 깊은 홈을 필요로 하는 동공과 머리카락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드릴이 사용됐다.


    언급한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이전까지의 다비드와는 완벽하게 새로운 모습의 다비드를 탄생시켰다. 우선 골리앗의 모습이 배제됐다. 골리앗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여부는 구상 초반 미켈란젤로에게 많은 고심을 선사했던 문제였다. 골리앗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결정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는데,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다비드 조각상에서처럼 골리앗의 존재는 조각상의 인물이 다비드임을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다비드만을 조각하는 결정 역시 "등장인물은 적을수록 좋다 알베트티식 미학을 반영하고 있었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기존 전통따라 골리앗의 머리를 다비드의  주위에 위치시켰다면 (전투 전의 다비드가 아니라 승리 후의 다비드를 묘사했다면) 완성된 조각품이 완벽하게 다른 인상을 주었을 것임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도나텔로(좌)와 베로키오(우)의 청동 다비드

    미켈란젤로가 시도한  다른 혁신은 바로 나체상으로서의 다비드였다. 성경에는 다비드가 그에게 하사된 갑옷을 거절한  골리앗을 맞으러 전장으로 나아갔다고 명시돼 있으나, 그가 나체로 전장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다비드를 나체로 조각하는 선택(도나텔로의 소년 다비드도 부츠와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전설에 고대/이교도적 양식을 적용하기로  미켈란젤로의 결정이었다. 다비드는 당시로서 분명 이교도적 성격이 짙은 조각상이었고(왼발을 오른발보다 앞에 내세운 전형적인 콘트라포스토 역시 고대적 요소  하나였다), 사보나롤라의 마수에서  벗어난 피렌체 공화국에서 이러한 시도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피렌체인들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다비드라는 이름보다는 ‘거인 il gigante’ 불렀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작품으로부터 다비드를 연상시키는 디테일들을 거의 모두 생략해버린 것이었다.)

 

다비드의 남다른 머리와 손의 크기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이처럼 고대적 요소를 다수 갖추고 있던 다비드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바쿠스처럼 완벽하게 고대식 양식을 따른 작품은 아니었다. 아폴로 벨베데레상에서   있듯이, 대형 '영웅상'들은 대체로 완벽한 균형을 갖춘 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근엄한 표정을  신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반면 실제 인체 비율에서 벗어날 정도록 확연하게 커져버린 다비드의 머리와 손은 고대 양식의 비율에서 벗어나 있었고, 한껏 인상을 쓰고 있는 다비드의 표정 역시 근엄한 영웅상의 이상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학자들은 다비드의 머리와 손의 비정상적인 크기가 성당의 버트레스 위에 놓이게  다비드의 본래 계획된 위치를 감안해서 내려진 결정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다비드의 얇은 허리와 다리가 땅에서부터 조각상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뿐 아니라 다비드의 찡그린 표정 역시 전혀 보이지 않게  터였. 오직 조각의 완성도를 위해 미켈란젤로가 고초를 무릅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종종 제시되는 반대 주장,  미켈란젤로가 6톤이 넘는 무게의 대리석 조각상을 성당의 버트레스 위에까지 올리는 작업이 불가능하리라는 사실을 짐짓 예상하고 있었다는 추측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다비드의 표정을 이처럼 자세히 살펴보는  일 역시 카메라 기술의 발전과 함께 최근에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다비드의 자세 역시 역동성을 나타내고 있다. 우선 왼쪽 팔을 접어 올리고 오른팔을 내려둔 자세는 조각상이 단순히 우뚝  기둥처럼 보이게  가능성을 제거해 버렸다. 반면 하체에 있어서 왼쪽 다리는 그저 땅을 딛고 있을  몸의 무게를 지탱하는 쪽은 반대 오른쪽 다리다. 잔뜩 찌푸린 다비드의 표정과 일어선 목의 핏줄, 오른손의 힘줄과 확장된 동공(한쪽이 다른 쪽보다 크다) 또한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긴장 속에 고뇌하고 있는 ‘인간 모습을 연출한다. 하체보다 상체가  왼쪽으로 틀어져 있고, 목은 상체보다도  왼쪽으로 틀어져 있으며, 동시에 눈동자는 목보다도  왼쪽을 향하고 있는  '회전'의 연출 역시 다비드가 골리앗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는 찰나의 순간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다비드를 누드로 구현하는 결정과 마찬가지로, ‘고뇌하는 다비드’는 순전히 미켈란젤로의 상상에서부터 기원한 것이었다(성경 속에서 다비드는 자신감에 가득한 모습으로 골리앗을 향해 당차게 나아간다).

손등 위 힘줄
목에 선 핏줄

 

    2년이 넘는 격정적인 작업 끝에 다비드는 1504 9 8, 피렌체 시민들 앞에 공개됐다. 5미터가 넘는 대리석 조각상의 위용은 즉각 피렌체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비드는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사랑받아 왔다). 그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조각상을 성당의 부벽 끝에 올리는 것을 거부했다. 다비드를 둘러싼 열광 속에서 피렌체 시정부는 다비드가 대성당 건축 위원회가 아닌 피렌체 정부의 것임을 선포했다.

팔라초 베키오 앞, 다비드가 19세기까지 자리했던 이곳에 이제는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다비드의 거처가 새로이 마련돼야 했다. 새로운 위치는 그를 곁에 두고서 향유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망을 반영하는 동시에, 본래 버트레스 위에서 돌을 쥐고서 피렌체의 결의를 과시하던 다비드의 위엄과 어울릴만한 곳이어야 했다. 위원회가 소집됐고, 다빈치, 보티첼리 등이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 끝에, 피렌체의 '거인'은 피렌체의 정부 청사 앞인 시뇨리아 광장 앞에 세워지게 됐다. 신의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소년 다비드는 공화국 피렌체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당시 피렌체 최대의 적이었던 로마를 노려보는)'일 기간테'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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