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27
"천상의 자비로운 지배자가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부산스럽기만 한 철저하게 덧없는 노력과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잘못된 억측을 목격했다. 그는 우리의 부족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기로 결심했다. 모든 공예에 완벽한 기술을 갖춘 예술가를 우리에게 보내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제 회화의 완벽한 디자인, 조각의 올바른 구상, 건축에 있어서 편안하고 안전하며, 건전한 동시에 보기 좋고, 올바른 균형과 세련된 장식을 갖춘 건물을 구현하는 방법은 오로지 그의 작품을 통해서만 학습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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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신]는 고상한 예술의 영역, 즉 회화, 조각, 건축에 있어서 토스카나인들이 이탈리아의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노력과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그들의 천재성이 언제나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따라서 그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인으로서 태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피렌체에게 명성을 안겨준 그들의 예술적 성과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조르지오 바사리, <<미술가 열전>> 미켈란젤로 편, 첫 문단)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Le Vite)이 출판된 1550년, 수많은 등장인물 중 생존 중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가 유일했다. 친구 바사리의 진심 어린 찬사는 미켈란젤로를 흐뭇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는 왜곡된 내용들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곧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에게 전기 집필에 착수하도록 지시했고, 1553년, 콘디비의 미켈란젤로 전기가 출판됐다(따라서 콘디비의 전기는 미켈란젤로의 자서전에 가깝다).
콘디비는 첫 문장에서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카노사 공작의 후손, 레지오 지역의 고귀하고 영예로운 가문, 부에나로티였음을 명시하며 그의 전기를 시작한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소개하는 첫 문장이 ‘신이 보낸 천재’가 아닌 피렌체의 명문가 부에나로티 집안의 자손, 카노사 공작의 후예, 즉 귀족임을 명시하길 바랬다. 이와 같은 미켈란젤로의 고집은 그의 역량이 신이 주신 것이 아닌 그의 귀족 혈통과 그의 고향에서 온 것이라는, 르네상스 피렌체에서 흔히 찾을 수 있었던 출신 성분에 대한 보편적 편견을 고백하고 있었다. 조국에 대해 냉담했던 다빈치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인이라는 사실, 특히 피렌체의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던, 그의 조국과 가문을 사랑했던 예술가였다.
"조르지오, 내 뇌가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다면, 그건 내가 아레초 시골의 맑은 공기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야. 내가 훗날 조각들에 사용하게 될 망치와 정을 어머니의 젖에서 빨았던 것처럼 말이야." (미켈란젤로- 바사리에게)
훗날 신성한 자(Il divino)라 불리게 되는 미켈란젤로는 1475년, 아레초의 카프레제에서 태어난다. 그가 즐겨 고백했듯이 그가 자라난 피렌체 교외 세티냐노는 석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채석장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고, 그의 보모 역시 아버지와 남편이 석공이었던 여성이었다. 그녀의 젖에서 정, 망치, 대리석을 맛보며 자라났다는 미켈란젤로의 회상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셈이었다.
예술가로서의 여정에 있어서 가족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보다 불행했다. 카사노 공작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부에나로티 가문의 남자들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현대의 정설이다) 미켈란젤로의 예술가를 향한 꿈을 멸시했고, 결국 마지못해 그것을 허락해주었으되, 훗날 그가 성공을 이룬 후에도 미켈란젤로의 돈과 권위만을 탐하는 흡혈귀 같은 존재로서만 그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
반면 예술가를 꿈꾸는 소년에게 있어서 르네상스 피렌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메디치 치하의 피렌체 성벽 내에는 이름 높은 예술가의 공방들이 무수히 산재했다. 열세 살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친구, 그라나치가 1488년 붓조차 잡아본 적이 없는 미켈란제로를 처음 데려간 화실이 바로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꼽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그는 1482년에 시스티나 예배당에 걸린 그의 프레스코를 완성한 바 있었다)의 공방이었다는 사실은 르네상스 피렌체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요의 화실에서 그의 첫 회화 수업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천직, 조각가의 길을 걷기 위해 도나텔로의 조수였던 베르톨도 디 지오반니의 조각가 양성 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의 기획자는 다름 아닌 로렌초 메디치(일 마그니피코)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곧장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그의 아버지 로도비코 부에나로티의 허락 하에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궁전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는 동시에, 메디치 가족의 일원으로서, 오직 조각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로렌초의 후계자 피에로와 훗날 레오 10세가 되는 지오반니 메디치 역시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와 친분을 쌓게 된다)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도, 베르톨도의 학교에서도, 미켈란젤로의 기량은 금세 스승을 능가해버릴 정도로(그들에게서 질투심을 살 정도로) 엄청난 속도의 성장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훗날 콘디비의 전기를 통해 그가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독학으로 성장한 예술가였음을 주장한다. 물론 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그는 스승들과는 확연하게 상반되는 스타일을 내세우게 된다.
우선 조각가로서 그가 보여준 접근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1549년 휴머니스트 베네데토 바르키가 당시 저명한 예술가들에게 유통시킨 문답지를 통해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관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회화와 조각의 가치를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미켈란젤로는
“조각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회화는 훌륭해집니다. 반대로 조각은 회화에 근접할수록 형편없어지죠. 그렇기에 전 언제나 조각이 회화에게 있어서 등불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해와 달의 관계와 같은 것이죠”라 답했다. 미켈란젤로는 그에게 있어서 ‘조각’이란 ‘덜어내는 과정, 즉 깎아내는 작업을 의미함을 설명했다. “더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각, [진흙 조각을 부분 부분씩 덧붙임으로써 완성하는 조각]은 회화와 유사한 제작 방식을 의미합니다.” (Frederick Hartt, History of Renaissance Art에서 발췌)
따라서 그는 조각가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통용되던 기법, 먼저 진흙 또는 밀랍으로 모델을 만들고서 그것을 따라 대리석 위에 깎아낼 부분을 표시한 후 작업을 시작하는 방법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훗날 바사리가 묘사하듯, 마치 수면 아래 자리한 완성된 조각상을 물 위로 꺼내 올리듯, 조각의 얼굴과 윗면을 먼저 작업한 후 옆면으로 파고 들어가는 방식을 활용했다. 청동을 즐겨 다루었던 피렌체 출신의 선배들, 기베르티, 도나텔로와 같은 조각가와 스스로를 완벽하게 차별시킨 셈이었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그의 시에서 그의 작업 방식을 창조자가 인간을 물질에서부터 탄생/해방시키는 과정에 비유했다.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메디치 궁전에서 보낸 시간은 미켈란젤로의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베르톨도의 수하에서 조각을 배우며 별다른 의무 없이 로렌초가 제공하는 교양 수업(휴머니스트와 함께하는 식사/토론, 메디치 궁전 내 즐비했던 고대의 조각품들의 학습)을 즐기는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1492년 로렌초의 사망과 함께 열일곱 살 미켈란젤로는 그의 후원자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제대로 된 일감 없이 메디치 궁전과 아버지의 집을 오가던 미켈란젤로는 (이 시기 그는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장의 허락 하에 시체들을 해부하며, 해부학 연구에 열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94년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추방과 함께 피렌체를 떠나게 된다. 우선 추방된 메디치 가문을 따라 북쪽으로 떠난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와 볼로나에서 잠시 머물며 그의 진로를 모색했지만 결국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피렌체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2년 간의 방랑 끝에 그는 1496년 로마에 정착한다. 1496년에서 1501년 사이, 미켈란젤로는 그의 커리어 초기 대표작들을 로마에서 완성하게 된다.
스물한 살의 미켈란젤로를 맞이한 로마는 백만 인구를 자랑하던 고대의 로마가 아니었다. 세속적 쾌락에 사로잡힌 교황 알렉산더 6세의 통치 아래서 로마는 폐허와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15세기 후기 로마는 고작 오만 명의 인구에, 제대로 닦인 길조차 찾아보기 힘든, 고대부터 내려오는 성벽 내로 황폐한 벌판들이 무한정 펼쳐져 있던 몰락한 도시였다.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그곳에 고대의 조각상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미켈란젤로가 어떤 조각을 직관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이 불가능하나, 우리는 그가 로마에서 제작해낸 조각들을 살펴봄으로써 로마의 고대 예술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추기경 라파엘 리아리오(교황 식스투스 4세의 '조카')를 위해 제작한 바쿠스 상이다. 놀랍게도 조각을 주문한 리아리오는 이 작품을 거절한다. 추측건대 사제인 그의 눈에 미켈란젤로가 재현한 바쿠스는 지나치게 이교도적으로 느껴졌을 테다. 술잔을 들고서, 취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긴장이 풀어져버린 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쿠스는 분명 더없이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상징과도 같은 근육질 몸이 아닌 볼륨감이 넘치면서도 부드러운 술주정뱅이의 몸이다. 자신의 창조물인 술의 매혹에 빠져 지나치게 취해버린 바쿠스/디오니소스 신이 상징하는 '인간적 어리석음' 역시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답습하고 있던 고대의 조각들을 연상시킨다.
미켈란젤로의 바쿠스는 분명 그리스식 콘트라포스토를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형적인 콘트라포스토가 아닌 마치 술에 취해 비틀거리듯, 발이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당시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볼 수 있었던 고대 조각상 중 이 정도로 극단적인 콘트라포스토를 보여주는 조각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비스듬히 기운 바쿠스의 자세는 고대적 테마를 연출함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조차 앞질러내겠다는 미켈란젤로의 포부를 고백하고 있다.
바쿠스의 발아래 위치한 대리석의 크기를 통해 우리는 바쿠스의 볼륨감 넘치는 몸을 구현해 내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조금의 대리석도 낭비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에 잠긴 조각상을 꺼내올리는 작업이라는 표현이 더없이 잘 어울릴 만큼 미켈란젤로의 바쿠스는 앞에서도, 옆에서도, 뒤에서도,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놀라우리만큼 완벽한 생동감을 전달하고 있다. 바쿠스가 고대의 조각상들처럼 보일 수 있도록 미켈란젤로가 직접 바쿠스의 잔을 든 손과 성기를 일부러 훼손시켰다는 설도 있다(잔을 든 손은 추후에 복원됐다 - 사진 속의 손이 원작의 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바쿠스는 미켈란젤로의 친구, 로마의 은행가 야코포 갈리의 정원에 그 자리를 찾게 된다. 리아리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바쿠스는 미켈란젤로에게 조각가로서 어느정도의 명성을 안겨줬고, 이는 새 작품의 의뢰로 이어졌다.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가 그의 묘비석으로 피에타를 주문한 것이었다('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사망한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성모의 테마를 가리킨다). 다만 그는 그의 묘비석이 “로마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이어야 할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20대의 조각가에게 있어서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존재하는 최고의 조각상'을 약속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었지만, 무모한 도전을 즐겼던 미켈란젤로는 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는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을 찾기 위해 직접 카라라의 채석장을 방문하여, 그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찾지 못한 최고의 대리석을 발견해내고,(그는 훗날 이 대리석을 발견한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그러나 결코 같은 품질의 대리석을 다시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을 로마로 운반한 후, 곧장 피에타 제작에 돌입한다.
2년이 채 되지 않은 작업 기간 끝에 완성된 피에타는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바쿠스의 부드러움과도, 몇 년 후에 탄생하게 될 다비드의 늠름함과도 전혀 상반되는 메마른 몸의 성자와 그를 내려다보는 성모의 모습은 바쿠스의 조각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 엄숙성으로 가득하다. 인체의 아름다움을 숭배했기에 ‘그의 그림은 옷을 입어도 누드화다’라는 평을 받는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에서 유감없이 드레이퍼리의 수려함을 과시하고 있다.
예수보다 훨씬 크게 설계된 성모의 몸과 인위적으로 넓혀진 앞섶은 슬픔 속에 아들을 품고 있는 성모의 우아한 자태를 가능케 하고 있다. 작품의 이름 피에타(성모의 동정) 역시 이 작품의 주인공이 성모 마리아임을 암시한다. 높은 주각 위에 자리한 마리아를 유리창 밖에서 올려다봐야 하는 오늘의 관광객의 입장에서 이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미켈란젤로가 의도했던 바와는 어긋나는 결과다. 본래 추기경의 묘비로 쓰이기 위해 제작된 이 조각상은 주각 없이 바닥 위에 설치되기로 계획돼 있었다.
피에타는 본래 아래에서 위로 쏘아져 올리는 인공조명이 아닌 창문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자연광을 감안해서 제작됐다.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리아가 두 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서 희생된 그녀의 아들을 조각상을 바라보는 관람객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슬픔을 통감하게 하는 동시에, 인류를 위해 스스로를 바친 예수의 죽음의 종교적 메시지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