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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ul 14. 2021

라파엘로 2/2

피렌체 26

    1508년, 교황의 부름을 받은 라파엘로가 로마에 도착한다. 교황의 건축가이자 같은 우르비노 출신이었던 브라만테의 추천을 통해 이루어진 등용이었다. 라파엘로의 화풍이 그가 구상하는 바티칸에 썩 잘 어울리리라 판단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곧장 그를 자신의 서재로 사용될 '서명의 방' 프레스코화 작업에 투입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서명의 방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고 있었던 소도마의 그림 앞으로 벽돌이 쌓아 올려졌고, 라파엘로가 그 위에 새로운 프레스코를 그리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2세가 구상한 서재 내부의 구조는 그의 남다른 포부를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서재가 르네상스가 이룩한 모든 학문적 성취가 내재하는 장소이길 원했다. 라파엘로에 의해 완성된 서명의 방은, 천장에는 시, 법학, 신학, 철학의 여신이 그려진 네 개의 메달이 위치하고, 각각의 메달이 가리키는 방향의 벽면에는 네 종류의 학문을 상징하는 프레스코화가 자리하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https://www.dreamstime.com/editorial-stock-photo-visitors-room-signatura-vatican-italy-november-stan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역시 신학과 철학을 상징하는 "성체 논쟁"과  "아테네 학당"(18세기에 와서야 붙여진 이름이다)이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완성한 첫 작품에 속하는 이 프레스코화들 속에서 우리는 영원의 도시의 장엄함과 교황청의 권위를 그림 속에 담아내려 했던 라파엘로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성체 논쟁 (1509)

        

    원형 돔이 천상으로까지 확장된 모습이다. 교리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지상의 인간들과 구름 위에 앉아 평온한 모습으로 예수를 보좌하는 성인들로 그림 전체가 이등분 돼 있다. 더 이상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선을 감안한 원근법은 활용되지 않고 있다. 르네상스의 전통 양식, 즉 그림이 그것의 주변 공간의 연장선으로서 존재하는 구조, 눈을 자연스레 소실점으로 인도하는 일관된 구도가 생략됐다. 대신, "성체 논쟁"은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완벽하게 다른 세계, 즉 그림 바깥의 관람객의 그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 (1495), 레오나르도 다빈치


http://e-arthistory5.blogspot.com/2016/09/the-missing-pope-in-raphaels-disputa.html


    색상의 사용에서도 이제까지 라파엘로에게서 볼 수 없었던 화려한 금색의 사용이 눈에 띈다. 교황청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라파엘로의 선택이었으리라 짐직할 수 있다 (단순히 금을 그림에 배치시키는 일은 그 어떤 기술도 요구하지 않았기에 예술가들 사이에서 멸시의 대상이었으나, 금을 색칠하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지상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그의 삼촌, 전임 교황 식스투스 4세를 비롯한 사제들의 금색 관복이 그들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면, 천상에는 신의 은총을 상징하는 금색 빛이 그림의 최상부와 예수의 뒤편에 자리한 원판에 집중되고 있다. 예수의 오른쪽 마리아의 얼굴이 금의 내부에 위치하는 반면, 반대편 세례 요한은 금 바깥에 위치한다(예수를 가리키는 손을 제외하고서는). 이는 성모가 예수의 권위를 공유하는 반면, 세례 요한은 오직 구원자 예수의 도래를 예고하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수를 감싸는 금색 원판 위에는 그의 아버지, 신이 구름 위 성자들과 지상 위 인간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가톨릭 세계 내 서열을 그의 작품 속에서 가시화하려 했던 라파엘로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테네 학당에서도 이 구도를 통한 권위의 암시는 재활용된다.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공간 속에서 고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대각선 형태로 배치된 채 티마이오스를 들고 있는 플라톤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왼손에 쥐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앞길을 열어주고 있다.  등장인물 중 다수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배경의 건축물은 그리스식이 아닌 도릭 기둥이 벽면을 지탱하는 로마식 구조다(라파엘로는 브라만테의 베드로 성당 도안을 따르고 있다-  후세에 붙여진 '아테네 학당'이라는 이름이 부자연스러운 이유 중 하나다). 이 역시 이상적인 세계를 그의 그림 속에서 구현하려 한 라파엘로의 로마 시기 초기의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다.


손에 쥔 책을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체를 정확하게 명시한 후, 관람객의 시선을 그들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두 철학자가 고대 최고의 권위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신학의 권위는 각자의 해석을 가지고 자웅을 겨루는 논쟁이 아닌, 천상의 권좌(빛/신/진리)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성체 논쟁의 구도.



헤라클레이토스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하고 있는 그림 속 헤라클레이토스는 본래의 밑그림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11년, 로마 시민들과 함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최초로 마주한 라파엘로가 미켈란제로를 향해 품게 된 격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해 임의로 추가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시스티나 천장화가 라파엘로에게 준 충격을 추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라파엘로의 화풍은 1511년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피렌체 시절 라파엘로의 화풍은 그가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에 비해 인체의 심층적 연구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화가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미켈란젤로, 다빈치와 달리 라파엘로는 직접 시체를 해부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511년을 기점으로 라파엘로는 본격적으로 미켈란젤로가 누누이 설파하던 그의 '인체의 신비'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라파엘로의 그림 속 인물들은 한결 더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또한 이전까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미켈란젤로 특유의 근육질 육체가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511년에 완성된 서명의 방, 법학의 벽면, 창문 위 반달꼴을 장식하고 있는  "세 가지 덕"이다. 공간이 비교적 제한적이라는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수많은 인물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는 "성체 논쟁"과 "아테네 학당" 에 비해 등장인물의 수가 최소화됐고, 그들의 크기가 획기적으로 확장됐으며, 움직임에 확연한 생동감이 부여됐다. 세 여신 중 좌측 믿음의 여신의 치마와 다리 모양은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의 토가를, 우측에서 라파엘로 특유의 나선형 회전을 보여주고 있는 자비의 여신의 자태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델피의 여자 예언가(sibyl)를 연상시킨다.

 

자비의 여신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델피의 여성 예언가 (Delphic Sybil)
믿음의 여신
율리우스 2세의 묘를 장식할 예정이었던 모세상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의 압도적인 힘을 직관한 라파엘로는 자신의 그림에도 강한 생명력이 부여돼야 함을 실감한 듯하다. 1512년 율리우스 2세는 교황청과 에스파냐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라파엘로에게 바티칸 엘리오도르의 방을 장식할 프레스코화를 주문하고,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답습을 통해 그가 이루어낸 새로운 스타일을 이 그림들에 담아내고 있다. 


    예루살렘의 성물을 약탈하러 온 엘리오도르를 신이 보낸 백마의 장군이 퇴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신전에서 추방되는 엘리오도르"다. 백발의 수염을 기른 채 수행원들의 어깨 위 탈것에 앉아있는 율리우스 2세의 존재가 이 그림이 그의 1512년 프랑스군 격파를 기념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테네 학당, 성체 논쟁과 비교했을 때 묘사되고 있는 장면의 규모가 축소된 반면 인물들의 움직임이 더 생생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찾아보기 힘들었던 근육질 몸 역시 그림 표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라파엘로의 '나선형' 회전 또한 훨씬 더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 우측 전투 장면의 초기 도안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라파엘로가 구현하고자 했던 '역동성'의 모티프를 살펴볼 수 있다.

 

시스틴 천장화, 리비아 여자 예언가. 한 층 격해진 라파엘로 특유의 나선형 회전 역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속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전사 교황'의 별명에 어울리는 덥수룩한 백발의 수염을 자랑하는 율리우스 2세와 라파엘로의 모습(좌측 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그림에서 라파엘로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색의 연출 역시 발견할 수 있다. 붉은색 사제복의 교황과 대체로 옅은 색상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인들 사이의 대조, 깊은 금색의 아치형 천장의 사실적 질감을 통해 라파엘로는 이제까지 지향하던 이상적 세계의 우아함이 아닌 장엄한 울림과 긴장감을 추구하는 새로운 화풍을 구현하고 있다.  

 

볼세나의 미사


    이러한 새로운 화풍의 경향이 더 확연하게 나타나는 그림은 같은 방에 위치한 1512년에 완성된 "볼세나의 미사"다. 금색과 검은색이 교차하는 교황의 로브와 오른쪽 하단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적을 지켜보고 있는 스위스 용병들의 군복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엄숙함을 목격한다. 이러한 장엄한 색상의 대조는 사뭇 바로크 화풍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Frederick Hartt). 라파엘로가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조화보다(피렌체 시기 마돈나들을 떠올려 보자) 색상의 강한 대조를 통해 인물들의 입체감을 부각하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균형미와 온화함을 강조하는 르네상스적 예술에서 격한 육체적 힘과 확연한 색상의 대조가 그림 전면에 나타나는 새로운 방식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작품들은 분명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기법을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 바로크 예술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 있다(그것이 미술의 수준을 높이는 길일 것인지 아니면 퇴화시키는 길일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알바의 성모 (1511) https://medium.com/thinksheet/how-raphael-composed-his-paintings-724a7208b60
갈라테아 (1512)


      명확한 경계선이 아닌 밝은 색상들의 그라데이션을 활용하여 인물들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우니오네,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키는 역동성과 디테일한 인체의 묘사, 라파엘로 특유의 우아함과 나선형 구도가 하나의 프레스코화 안에서 잘 표현돼 있는 작품, 갈라테아다. 균형이 잘 잡힌 장면(르네상스 예술의 특징- 보티첼리의 그림과 라파엘로의 피렌체 시기 마돈나 속 평온함을 상상해 보자)이 아닌 극적으로 포착된 찰나의 격정적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 속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라파엘로는 분명 그의 새로운 화풍을 통해 바로크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알바의 성모와 갈라테아는 피라미드 구도, 나선형 회전/콘트라 포스토의 요소를 공유하지만, 그림이 주는 인상은 확연하게 다르다) 


 

    그의 생 말기에 들어서 이러한 조짐들은 더더욱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시스티나 마돈나 (1514)의 아기 예수, 마돈나,  그림 하단의 아기 천사들의 커다란 눈이 주는 강력한 사실감/존재감 역시 우아한 조화를 강조하는 르네상스 화풍과는 불화하고 있다. 녹색 커튼. 금색 로브 등의 화려한 배색 또한 라파엘로가 16세기 베네치아 화풍을 그의 그림에 적용시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르네상스 최고의 학생/모방가였던 라파엘로가 말년에도 부지런히 새로운 양식의 그림들을 답습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시다.


그리스도의 변용 (1520) 


  1513년,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메디치가의 레오 10세가 새롭게 로마 교황에 취임한다. 소싯적 친구 미켈란젤로보다 라파엘로를 중용했던 새 교황의 비호 아래서(그는 미켈란젤로를 두고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라 불평한 바 있다) 라파엘로는 예술가로서 전례가 없는 권위와 부를 독점하게 된다.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말년의 그는 더더욱 확연하게 피렌체 시기의 조화미를 등지고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양식의 길을 밝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보여주는 라파엘로의 어두움과 빛의 대조는 다빈치의 키아로스쿠로(어둠과 빛을 대조시키는 기법)를 넘어서 루벤스의 십자가 그림들을 연상시킬 정도다. 더 이상 교황청의 권위에 어울리는 사제, 혹은 철학자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고통받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가 더 이상 과거 자신이 추구하던 '우아한 이상적 세계의 구현'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가시화한다.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림 (1614)
시스티나 예배당에 걸린 라파엘로의 태피스트리다. 그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인물들의 크기를 한 층 확대시킨 모습이다
오늘날 영국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서 '대여' 중인 라파엘로의 태피스트리 밑그림(cartoon)


    

    라파엘로가 생전 보여준 수많은 변신은 후세의 우리로 하여금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떤 그림을 보여주었을지를 궁금케 한다. 로마에서 커리어의 정점에 이르렀던 그는 (바사리의 전기에 따르면) 1520년 4월의 어느 날 애인과 유난히 격한 밤을 치른 후 열병으로 쓰러지고, 결국 그의 생일이었던 성 금요일에 37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조지오 바사리는 라파엘로를 두고 '중용의 길'을 창시한 예술가라 평한다. 신에 의해 간택된 예술가, 천부적 재능을 독점했던 인간, 모든 예술가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했던 존재, 미켈란젤로라는 극복하지 못할 '상처' 앞에서 끝끝내 좌절하지 않고, '그에게도 그만의 길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수많은 스타일적 실험을 통해 그만의 '중용의 양식'을 개척해낸 라파엘로의 용기가 모든 젊은 예술가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바사리는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지지 못한 재능을 탐하지 말라'는 충고이자 '라파엘로조차 열등감에 신음해야만 했다'는 후세의 예술가들을 위한 더없는 격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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