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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ul 08. 2021

라파엘로 1/2

피렌체 25

그의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움에 떨었던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그가 죽어가자
자연 또한 그와 함께
죽을 것을 두려워했노라.

(라파엘로의 묘비명. 피에트로 벰보)




    관 속에 누운 나이 지긋한 대가를 상상하게 하는 장엄함 묘비명이다. 하지만 1520년 당시 라파엘로의 나이는 고작 서른일곱이었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고려한다 해도 그는 요절한 편에 속했다. 예술가들 중 절대다수의 경우, 만약 그가 서른일곱에 사망했다면, 우리는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기 십상이었을 테다. 반면 라파엘로의 짧은 삶은 대작들로 가득 찬 상승 일변도의 질주와도 같았다. 출신적 한계, 인격적 하자, 환경적 어려움을 모두 비껴간 그의 삶은, 흔히 예상하게 되는 삶의 굴곡이 배제된, 후세의 우리들에게 스산함을 안겨주는 고공비행과도 같았다.


    라파엘로에 관한 평은 다소 엇갈린다. 그가 남긴 작품들의 훌륭함은 논쟁의 주제가 되지 못하지만, 그의 유산을 두고 이어지는 수다는 그가 닌자 거북이들 간의 서열에 있어서 어느 위치에 서야 하는가를 여태껏 다투고 있다. 혹자는 그가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영향을 그만의 방식으로 승화해냄으로써 르네상스 전성기 최고의 아름다움을 실현한 진정한 승자임을 주장하는가 하면, 그가 그 어떤 새로운 혁신도 창안하지 못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 비해 독창성과 집요함이 부족한 예술가라는 평 역시 존재한다.


« 자연은 미켈란젤로의 예술에 의해 정복당했고, 이후, 라파엘로를 배출했다. 이제 자연은 라파엘로의 손에서 인격에 의해 정복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조지오 바사리)


   엇갈리는 그에 관한 평가처럼 라파엘로의 삶 역시 장밋빛만으로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빼어난 실력과 타고난 기품, 온화한 성격을 모두 거머쥐는 천운에도 어두운 면이 존재했다. 그의 비상한 눈썰미와 민첩한 손가락은 스승의 기술을 완벽하게 흡수해내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효율성을 과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은 놀라운 흡수력은 종종 또다시 새로운 기술을 답습하려는 그에게 어려움으로 작용했다(라파엘로는 그의 첫 정식 스승 페루지노의 상투적인 기법까지도 모조리 흡수해 버린다). 또한 온화한 성격과 예의 바른 품행 덕분에 늘 교황과 귀족들에게서 각별한 대접을 받았던 그의 존재는 새파란 애송이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기존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더없는 잔인한 시련을 상징했고, 사교생활에 뜻이 없었던 다빈치와 경쟁자가 그의 기술을 표절할 것을 늘 염려했던 미켈란젤로와 달리 장례가 촉망되던 유망주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자신의 작품에 투입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라파엘로는 그의 아량 덕분에 스스로 완성한 작품이 없는 화가라는 오명을 써야만 했다.


Lamentation of the Dead Christ 지오반니 산티의 작품


    라파엘로는 1483년 마르케 주 우르비노의 궁중 화가 지오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그의 라이벌로 일컬어지는 미켈란젤로보다 8살, 레오나르도(다빈치)보다 무려 31살 아래였던 그는 후발주자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 그러나 곧 시작되는 추격의 속도는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라파엘로의 성공에 있어서 그의 아버지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했던 인물은 없었다. 유일한 자식(라파엘로의 형제들은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라파엘로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지오반니 산티는 일찌감치 라파엘로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화실에서 화가 수업을 마치게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르비노 바깥의 세상을 경험시켜주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페루자의 피에트로 페루지노에게 라파엘로를 제자로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했고, 우르비노 공작의 궁중화가였던 지오반니의 혈통과 인품을 존중했던 페루지노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주었다.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자화상



 라파엘로는 곧장 페루지노의 화실에서 그의 역량을 과시하게 된다. 그는 스승을 모방하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제자였다. 바사리는 그의 라파엘로 전기에서 페루지노의 작품에서 라파엘로가 완성한 부분을 가려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마찬가지로 라파엘로가 완성한 작품들이 페루지노의 작품으로 혼동되는 일 역시 다반사였음을 주장한다.


    성공적으로 페루지노의 스타일을 흡수한 라파엘로는 페루자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쌓게 된다. 당시의 문서는 열일곱 살의 라파엘로가 이미 수습생이 아닌 화실을 책임지는 ‘마스터’로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우리는 페루자 시절 라파엘로의 작품, <<스포살리지오(마리아의 결혼식)(1504)>>를 살펴봄으로써 라파엘로가 얼마나 그의 스승의 기법을 완벽하게 흡수해냈으며, 그것을 얼마나 훌륭하게 스스로의 방식으로 소화해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손에 든 나뭇가지에 꽃이 피어난다면 마리아와 혼인을 올릴 수 있다는 조건 하에 벌어진 남성들 간의 경연 끝에 결국 승리한 요셉이 마리아와 혼인식을 올리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페루지노의 스포살리지오. 라파엘로의 스포살리지오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선 이 그림은 상단에 위치한 건물의 창문이 소실점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페루지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사초의 원근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완벽한 좌우 대칭의 구성과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의 질감 처리와 그들 사이의 명확한 경계선, 맑은 톤으로 통일된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녹색 등의 다소 단순한 색상 활용 역시 라파엘로가 스승에게 받은 영향을 가시화하고 있다.




인물들의 얼굴과 몸의 표현에 있어서 다소 분명한 선을 통해 배경과 사물의 경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와 마찬가지로 15세기 보티첼리식 회화에 가까운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선의 처리의 문제에 있어서 라파엘로는 훗날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라파엘로의 <<스포살리지오>>에서 페루지노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성모와 그녀 곁에 선 여성들의 얼굴에는 라파엘로 특유의 더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표현되고 있다. 아직 다빈치식 스푸마토의 기법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온화로운 색상의 사용을 통해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스포살리지오>>의 우아함은 그림의 구성이 빚어내는 조화로움에서 비롯하고 있다. 인물들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나열해 놓은 페루지노의 작품에 비해 라파엘로가 그린 등장인물들은 마치 하나의 움직임을 함께 만들어내고 있는 듯한 통일성을 보여준다. 인물들로 하여금 정적인 느낌의 올곧은 자세가 아니라 한 발을 앞으로 내민 콘트라포스토를 취하게 함으로써 라파엘로는 훨씬 생동감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전면에 선 인물들 모두가 한 발을 앞으로 내민 채 몸을 한쪽으로 기울인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통해 라파엘로가 이미 페루자 시절부터 움직임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역동성'은 피렌체 예술가들이 집중했던 주제였다) 페루지노의 그림과 비교했을 때, 마리아, 요셉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모두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살의 라파엘로에게서 어떠한 조짐으로서만 발견되던 이러한 화풍은 훗날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영향 아래서 함 본격적으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루벤스가 카피한 다빈치의 앙기아리의 전투


  라파엘로가 페루자에 계속해서 머물렀더라면 그는 페루지노에게서 배운 스타일만을 지속적으로 고수하는 화가로 남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면 인류는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 라파엘로를 만나지 못하는 손실을 입고 말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1504 라파엘로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사이 벌어지고 있던 경연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피렌체를 찾게 되고, 아르노의 도시에서 맞닥뜨린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작품들은 그의 삶의 이정표를 송두리째 뒤바꿔버린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그가 페루자에서 배운 회화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술했듯이 페루지노와 이 시기의 라파엘로의 작품들에는 여전히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의 화풍이 짙게 묻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한 발 앞서 르네상스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피렌체의 예술은 그가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일깨워주었다. 1504년 (150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피렌체에 자리를 잡게 되는 라파엘로는 그의 예술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녹색의 마돈나(Madonna of the Meadows) (1505)

    라파엘로는 1504(혹은 1505년)년부터 1508년 까지 3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피렌체에서 무려 열일곱 (현재까지 보존된 것)의 마돈나와 성가족의 그림을 그려낸다. 1502년, 페루자 시기의 마돈나와 피렌체에서 완성된 마돈나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접하게 된 새로운 예술 양식을 어떻게 그의 작품 세계에 접합시켰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우선 우리는 녹색의 마돈나에서 마돈나, 아기 예수, 아기 세례 요한의 몸과 얼굴의 경계가 명확한 선이 아닌 은은한 색채의 대조를 통해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이 라파엘로에게 준 영향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푸마토는 선이 아닌 은은한 색상의 활용을 통해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강조시키면서, 동시에 그림 속 인물의 입체감과 사실성을 연출하는 기법이다. 그것은 회화 속 인물들을 조각상과 완벽하게 차별화시키고자 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발상이었다 (그는 조각은 그림에 비해 열등한 예술임을 피력한 바 있었다)

<<성가족 1502>> 라파엘로. 페루자 시절의 라파엘로는 어머니 마리아보다는 성모로서의 마리아를 그리고 있었다. 아기 예수 역시 이미 어른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마돈나와 아기 예수, 아기 세례 요한의 피라미드형 구성 역시 다빈치의 마돈나를 연상시킨다. 특히 <<초원의 성모>>의 마돈나의 치마와 다리의 표현은 다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자>>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하다. 마돈나와 아이들의 배치 역시 다빈치가 고안한 피라미드 구조를 따르고 있다.

https://medium.com/thinksheet/how-raphael-composed-his-paintings-724a7208b600
성 안나와 성모자(1503)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빈치의 스케치. 특히 마돈나의 발과 치마의 형태는 오마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성모의 다리 모양에 주목하자.


 

    그림에서 정확히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모가 토스카나의 전경을 뒤로하고 있다.  모성애로 가득한 성모의 얼굴은 페루자 시기 라파엘로가 그려낸 근엄한 성상으로서의 성모가 아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다빈치의 마돈나를 연상시키는 인간 마리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대자연에 둘러싸인 채 미소를 머금고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을 내려다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자태는 라파엘로가 우상화의 흔적을 점차적으로 생략시켜가는 16세기의 경향에 동참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아이들의 머리 위에 위치한 금색 원광 역시 매우 희미하게만 표현되고 있다(다빈치는 같은 시기 이미 이와 같은 ‘신성’의 흔적을 생략하고 있었다)

<<동굴의 성모>> 다빈치 (1483-6)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라파엘로는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집중했었던 ‘운동/역동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포살리지오>>에 비해서도 훨씬 더 긴장감이 깃든 움직임을 보여주는 라파엘로의 작품 속 인물들은 지금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되고 있다.


<<성가족>>(1506) https://medium.com/thinksheet/how-raphael-composed-his-paintings-724a7208b60

    

    마치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듯한 모양새를 띤 <<성가족>> 속 인물들의 역동성은 미켈란젤로의 톤도 도니를 연상시킨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스케치를 통해서 우리는 그림에 깃든 힘이 나선 꼴로 움직이는 원형을 그려내면서 스케치를 시작하는 라파엘로의 스케치 기법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언제나 치솟는 힘으로 가득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그에게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톤도 도니 (1504-6)




라파엘로의 스케치
제자가 카피한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이처럼 르네상스 전성기의 대표적 예술가들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던 그였지만, 이 시기 라파엘로는 점차적으로 그만의 색깔을 더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우선 그는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활용했지만, 다빈치만큼 ‘어두움’, 혹은 빛과 어둠이 구현하는 대조의 명암을 활용하는 기법을 선호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신비’를 사랑했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에서 구현해내려 한 다빈치와 달리 라파엘로는 어두움보다는 그의 그림을 화사하게 밝히는 길을 택했다. 따라서 밝은 색상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부드러움과 입체감을 잃지 않는 그의 채색 기법은 ‘스푸마토’가 아닌 ‘우니오네’라 불리게 된다.   


<<동굴의 성모>> 다빈치
<<녹색의 마돈나>> 라파엘로

    


    라파엘로 그림 특유의 우아함 역시 마돈나와 성가족 회화에서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빈치가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그림 속 인물들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과 같은) 효과를 모색했다면, 라파엘로는 인물들과 배경 간의 ‘조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마돈나에서 우리는 지평선 위로 솟아 있는 마돈나의 어깨선이 은은한 푸른색/녹색의 토스카나 산골짜기와 함께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하강하는 것을 본다. 마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은 아기 예수의 콘트라포스토(<<녹색의 마돈나>>와 <<검은 방울새의 마돈나>> 우측 하단에 위치한 아기 예수를 살펴보자) 역시 라파엘로가 페루자에서부터 고집하고 있는 디테일이다. 무엇보다 마돈나와 아기들에게서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물들 간의 우아한 조화가 현현하고 있다.  모든 긴장감이 완벽하게 배제된, 대자연, 어머니, 아이들이 평화로운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조화의 테마 아래 모든 요소가 우아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 시기 그가 추구했던 예술적 이상향을 감각하게 된다.



<<검은 방울새의 마돈나>>(1506)



 다음 포스트에서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정점을 이룩한 도시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와의 경쟁구도 아래 또 한 번의 변화를 시도하는 라파엘로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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