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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un 30. 2021

르네상스 전성기(High Renaissance)

피렌체 24


    클레멘트 7세의 오판이 불러온 참사, 사코 디 로마는 헤아릴 수 없는 로마 시민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시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열강 앞에 완벽하게 굴복했음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카를 5세는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위해 잊지 못할 교훈을 선물하고자 했고, 보급과 급여 없이 오랜 시간 전장으로 내몰린 제국 휘하의 독일 병사들은 그들의 분노를 영원의 도시에 분출함으로써 황제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그것은 황제를 향한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만약 교황청-베네치아군이 최소한의 저항만이라도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들은 폭동 일보 직전이었던 황제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 테다)


   후세의 관점에서 처절한 인명 피해 이상으로 뼈아픈 것은 로마의 약탈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완벽한 종말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위대한 자 로렌초의 사망 이후 점차적으로 피렌체로부터 르네상스 예술적 중심지의 주도권을 가지고 온 로마는 율리우스 2세의 바티칸 성당 재건축 착공 이후로 르네상스 전성기(High Renaissance)라 불리는 전무후무한 예술사 최고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했을 때 교황 레오 10세는 팡테옹에 묻히고 싶다는 위대한 예술가의 소원을 들어줌으로써 그의 공헌에 보답했다)

 

시스티나 예배당 내부. 라파엘의 태피스트리와 최후의 심판 (라파엘의 태피스트리는 2020년에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귀환하게 됐다).


     1417년 교황청의 귀환 이후로 로마는 점차적으로 세계 각국의 외교 사절이 방문하는 외교 중심지로 부상하게 됐다. 자연스레 막대한 자본이 유입되는 거대 금융시장이 형성됐고(페트라르카가 오랜 세월을 보낸 아비뇽 교황청 역시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14세기 당시 아비뇽 교황청은 유럽 그 어느 곳에서보다 권위적인 궁중 문화를 발견할 수 있던 곳이었다), 르네상스 초기까지 르네상스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벌일 여건을 갖추지 못했던 로마는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재력에 있어서 북부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들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를 확보하게 됐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교황청은 16세기 초 바티칸을 중심으로 예술품에 과감하게 투자했고, 이를 통해 초기 르네상스까지 피렌체가 쥐고 있던 예술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르네상스 전성기(High Renaissance)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라는 두 거장의 작품들로 대표되는 위대한 양식(gran maniera)의 완성과 함께 바티칸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그 시발점은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취임이었다. 전임자 알렉산더 6세를 향한 혐오를 감추지 않았던 율리우스는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축출하고,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잔여 귀족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교황청의 영토를 추가적으로 확보한 후, 바티칸에 대대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한 데 이어서, (이전 포스트에서 다루었듯이) 범 이탈리아 동맹군(에스파냐가 합세한)을 손수 지휘하여 프랑스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낸(그의 활약은 1512년 메디치가의 피렌체 탈환으로 이어졌다) 일명 '전사 교황'이었다. 


사진:https://www.flickr.com/photos/gregweeksphotography/5107888026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향한 그의 의지는 남달랐다. 그는 교황청의 궁전, 성 베드로 성당을 완벽하게 재건축함으로써(그는 알렉산더 4세가 사용했던 방을 집무실로 사용하기조차 거부했다) 새로운 궁중 문화를 바티칸에 확립하고자 했고,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들이 로마로 호출됐다. 율리우스가 집권하던 초기에 8-10명 안팎이었던 로마 내 예술가의 숫자가 25년 후 125명(로마의 싼루카 길드에 가입한 화가의 수로 추산했을 때)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교황의 예술사업의 추진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을 명령하는 율리우스 2세. 19세기 프랑스 화가 Emile Jean Horace Vernet의 작품

    르네상스 전성기의 예술적 업적에 있어서 율리우스 2세는 예술품을 직접 창조해낸 예술가들에 버금가는 역할을 수행했던 존재였다. 그는 그가 꿈꾸던 가톨릭 교회의 이상을 새로운 바티칸과 성 베드로 성당의 장엄한 모습으로 구현하려 했고, 건축, 조각, 회화 작품, 그것을 맡게 될 인물, 작품의 주제와 양식, 완성품이 나타내야 할 기품에 있어서 전적으로 최종 발언권을 독점했으며, 예술가들을 닦달했고, 임의로 지휘했다(자세한 이야기는 미켈란젤로에 관한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르네상스 전성기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그리스 고전 예술에 있어서 페리클레스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난 지난 포스트에서 자연주의가 르네상스 미학에서 중심적인 영향을 행사했음을 설명한 바 있다. 화려한 세부 요소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한 고딕 양식과 달리 르네상스 양식은 총체적인 자연스러움, 즉 알베르티가 그의 건축론과 회화론에서 강조한 균형미와 조화를 추구해야 했다. 서로 간의 미적 일관성이 결여된 갖가지 요소들이 공존하는 고딕 양식의 세부 묘사를 지양하고, 건축, 회화, 조각에 있어서 통일된 인상을 강조하는 경향은 르네상스 예술 전체의 지배적인 움직임이었다. 


라파엘로의 태피스트리가 제자리로 복귀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모습


“르네상스 예술에서 드러나는 총체성의 인상, 다시 말하면 진실하고 그 자체로 이미 완결된 자율적 세계라는 인상과 중세에서보다 더 큰 박진감은 이 묘사의 통일성에 힘입은 것이었다. 예술적 현실 묘사의 진실성, 신빙성 그리고 설득력은 대개의 경우에 그렇듯 여기서도 묘사된 개개 부분이 외적 현실과 일치하는가 여부보다는 오히려 묘사된 전체의 내적 논리와 묘사된 부분들이 서로 일치하는가 여부에 더 많이 좌우되는 것이다.”(아르놀트 하우저)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의 탁월함은 이 시기가 이룩한 예술의 양식이 통일적인 인상과 균형미, 구성, 완성도의 자연스러운 구현에 있어서 이전의 그 어떤 시대의 것보다 더 훌륭했다는 데 있었다. 여전히 중세적 불균형을 완벽하게 극복해내지 못한 조토, 마사초 등의 초기 르네상스 회화와 원근법과 곡선, 대칭과 로마/그리스적 요소의 실험을 통해 고딕적 양식을 지양해내는 데 집중했던 도나텔로와 알베르티의 조각과 건축에 비해 “이미 완성된 완숙미”(아놀트 하우저)를 앞세운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는 그들의 미술적 세계에 대한 더없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라파엘로의 방들 중 하나인 헬리오도루스의 방 (Stanza di Eliodoro)


    르네상스 초기, 고딕 예술에서부터 르네상스 예술로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주된 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상업과 상업도시들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합리주의라는 시대적 방향이었다. 


“예술의 규범이 되는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 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프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은 이 합리주의 정신에 상응한다. 이 특징들은 동시대 경제에서 보이는 계획성, 목적성, 타산성처럼 계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일체의 것에 대한 혐오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의 이 원리들은 또한 그 당시 노동의 조직화, 교역 기술, 신용제도, 복식회계 그리고 국가 통치방식과 외교, 전쟁 수행에서 관철되고 있던 동일한 정신의 소산이었다"(아놀트 하우저). 


    이 시기(르네상스 초기) 예술의 등장이 길드 중심의 경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도입되고 있던 피렌체 경제의 양극화 현상, 즉 신흥 자본가라는 새로운 시민 세력의 부흥과 맞물려 있었고(14세기의 개벽부터 코시모(국부) 시대까지), 제2 르네상스의 예술이 로렌초 치하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소수 엘리트를 위한 귀족적 화려함의 경향을 보였다면, 르네상스 전성기의 '완숙미'는 그들의 체제가 완성됐으며, 그것이 지속될 것이라 확신했던 교황청 지도층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전까지의 르네상스 예술이 세속적 사고에 의한 예술이었다면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은 새로운 가톨릭의 이상을 암시하는 교회 예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여기서는 내면성이나 초세속성보다 장중, 위엄, 권력, 지배 등이 강조되었으며, 기독교적 감정의 내향성과 초세속성이 물러가고 그 대신 범접하기 힘든 냉철함과 정신적 육체적인 면에서의 우월감이 등장했다(아놀트 하우저). 길드의 자본을 동원하여 예술품을 주문했던 시민계급의 주도하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초기에서부터 사적 향유를 위해, 특히 그들의 대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예술을 주문하는 상속자 계급에 의해 주도됐던 제2 르네상스(보티첼리 등의 예술가들이 두각을 드러낸 시기)를 거쳐, 로마의 교황청에서 르네상스는 예술적 고전주의의 완성에 도달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의 탐색을 통해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인류사 최고의 작품들이란 평을 받는 당시의 예술품들이 기획 당시에는 종전의 어떤 예술보다 더 제한된 감상자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티칸의 지배 계급으로 한정된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의 감상자층은 그리스 고전기의 감상자층보다 더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아르놀트 하우저)) 



 16세기 당시 이미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 신이라 불리고 있었다.


     르네상스 예술이 바티칸에서 고전주의적 이상으로서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위대한 양식(gran maniera)이라는 정점에 다다르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보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라는 거장들의 등장이었다. 다만 조토에서부터 라파엘로까지 르네상스 예술 양식의 명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내려오고 있던 것이었다. 그 전통은 르네상스 초기 알베르티가 집대성한 르네상스적 자연주의를 뿌리로 두고 있었으며, 전성기의 예술가들 역시 이 전통을 포기하지 않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 완성해내고 있었다. 오늘날 관광객들을 매료시키는 바티칸의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예술사 전체의 압도적인 승리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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