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23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권좌에 올라선다. 전술했듯이 피렌체 시민들은 이 희소식을 일주일에 걸쳐 열린 성대한 축제로 환영했다. 피렌체의 군주 지오반니 메디치가 레오 10세로서 교황의 자리에 취임함으로써 피렌체는 형식상 교황청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됐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는 주종 관계에도 불구하고 피렌체인들에게 불만은 없었다. 그들은 서유럽 세계 내 현존하는 최고의 권위를 피렌체의 최고 가문이 거머쥐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을 자부심으로 벅차오르게 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피렌체인들은 레오 10세를 사랑했다.
교황청을 손에 넣은 레오 10세의 포부는 취임식을 마친 그가 동생 줄리아노에게 건넨 말로 축약될 수 있을 듯하다.
“신이 우리에게 교황청을 주셨다. 이제부터 즐기기로 하자”
대부분의 전임 교황들이 그러했듯 레오 10세에게 있어서도 가톨릭 교회와 교황청의 수장으로서의 책임감은 가문의 명예를 빛내야 한다는 의무에 비할 것이 못됐다(일 마그니피코 로렌초의 숙적이었던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사랑과 알렉산더 6세의 체사레 보르자를 향한 절대적 헌신을 떠올려 보자). 그는 교황의 권위를 활용해 동생 줄리아노와 조카 로렌초를 프랑스 왕가의 여인들과 혼인시켰고, 일반 피렌체 시민에 불과했던 로렌초(위대한 자 로렌초의 손자이자 불운한 자 피에로의 아들)를 우르비노 공작으로 만들기 위해 명분 없는 정복 전쟁을 벌임으로써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았다. 메디치가의 세력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교황의 확신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피렌체인들은 레오 10세가 피렌체의 통치자로 앞세운 로렌초(조카/우르비노 공작)의 오만한 품성에 불만을 품었지만, 토스카나와 교황청의 지배자인 레오 10세의 대리인에게 반기를 들 의사는 없었다. 큰 불상사만 없다면 레오 10세의 권위 아래서 메디치 가문은 평화롭게 그 치세를 이어갈 수 있었을 터였다(아버지 로렌초를 닮아서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헌신적이었던 레오 10세는 사실상 국가 운영보다는 이탈리아의 문화적 발전에 있어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던 인물이었다. 그에겐 교황청의 특권을 맘껏 ‘즐기기 위한’ 평화가 절실했을 테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의 운명은 열강이 일으키는 회오리 속에 휘날리는 일을 면할 수 없었다. 16세기 유럽 역사의 폭풍의 눈으로 등장하게 되는 두 영웅, 프랑수아 1세와 샤를 5세 사이의 라이벌전의 개전과 함께 이탈리아는 다시 격동의 시기에 돌입하게 된다.
총명하며, 특출 난 미남인 데다, 야망이 크고, 전쟁을 사랑하는 스물한 살의 프란시스 1세가 1515년 프랑스 왕위에 즉위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리라는 것은 기정사실과 다름없었다. 그는 왕위에 즉위한 해 곧장 알프스를 넘어 막시밀리언 스포르차를 굴복시키고 다시 밀라노를 프랑스령으로 복귀시켰다. 순식간에 반도의 세력 판도가 뒤바뀐 셈이었다. 에스파냐의 힘으로 피렌체를 탈환한 레오 10세였지만, 그는 과거 마키아벨리가 피에로 소데리니에게 호소한 ‘열강의 틈에 낀 약소국 피렌체는 역사의 흐름에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충고에 담긴 섭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곧장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했고, 순식간에 피렌체와 교황청의 외교 노선을 180도 회전시켰다.
그러나 그와 프란시스 1세 간의 동맹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521년, 유럽 대륙의 최강자, 프란시스 1세의 숙명의 라이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두 시칠리아(나폴리+시칠리아), 코르시카, 예루살렘의 국왕, 오스트리아, 부르고뉴, 룩셈부르크, 플랑드르 공작 카를 5세(그 외 타이틀은 생략)가 이탈리아를 향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당시 21세였던 그는 프란시스 1세(1494년생)보다도 6세 더 젊었다).
순전히 정략결혼과 막대한 부를 통해(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그가 선거전에 아낌없이 퍼부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대제국을 상속받은 카를 5세였지만,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능수능란했던 그였다.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하기 무섭게 그는 레오 10세에게 동맹을 제안했고, 다시금 유럽 대륙에 힘의 균형의 변화가 찾아올 것을 예감한 메디치가의 교황은 사돈 프랑스와의 신의를 내던지고 카를 5세의 밀라노 통치를 인정하는 대신 교황청의 영토 확장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에스파냐-교황청 조약을 체결한다.
결과적으로 레오 10세의 판단은 옳았다. 카를 5세의 다국적 황제군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밀라노로부터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고작 6년 만에 프랑스는 다시 밀라노를 포기하고서 프랑스로 후퇴해야 했다. 이 승부의 결과를 기다리며 누구보다도 마음을 졸였던 레오 10세는 끝내 손에 쥔 승전보에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이를 기념하는 축제를 밤늦게까지 즐기다가 다음날부터 몸져누워 버렸고(겨울밤의 밤공기를 이겨내기에 그의 몸은 너무 허약했다),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면서 전쟁이 끝난 지 1달이 못된 1521년 12월 운명하고 말았다.
그에게서 메디치 가문 수장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파치가의 음모에 희생당한 (일 마그니피코)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의 서자 줄리오 메디치였다. 레오 10세 사망 당시 그는 요절한 로렌초(우르비노 공작)를 대신해서 임시적으로 피렌체의 통치를 맡고 있었다. 레오 10세 사망 후 열린 교황 선거에서는 친-메디치와 반-메디치 추기경들 간의 치열한 싸움 사이에서 어부지리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인 하드리아누스 6세가 당선되었지만,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중세적 원론을 되풀이하던 그는 2년 만에 사망/독살당했고, 줄리오 메디치가 그 뒤를 이어 클레멘트 7세로서 성 베드로의 티아라를 차지하게 됐다.
적통이 아닌 서자(줄리아노의)였지만 그는 사실상 알려져 있는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다. 얼마 전 요절한 로렌초(우르비노 공작)와 프랑스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카테리나가 있었지만 여성이 메디치 가문의 계보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지오반니 디 메디치의 차남 계열, 즉 국부 코시모 메디치의 남동생의 자손들이 존재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장남(국부 코시모) 계열과 차남 계열은 분쟁 끝에 결국 전혀 연고가 없는 남과 같은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이제 피렌체를 등지고 바티칸으로 떠나야 했던 클레멘스 7세는 궁여지책으로 피렌체 시민들에게는 전혀 노출되지 않았던 메디치가의 사생아, 줄리아노(레오 10세의 동생)의 서자, 이폴리토 메디치와 로렌초(우르비노 공작)의 서자 알레산드로 메디치(사실 클레멘스의 아들이라는 설도 유력하다)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파세리니 추기경을 고문 겸 중재자로 피렌체로 파견했다.
얼굴도 모르는 인물들을 얼떨결에 군주로 맞이하게 된 피렌체인들이 이러한 조치를 반길 리 없었다. 1512년 이후 줄리아노(지오반니 10세의 동생), 로렌초(우르비노 공작), 줄리오(클레멘트 7세)로 이어진 메디치 가문의 통치에 지속적으로 복종해 왔던 그들이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생아와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 파세리니 추기경 아래서 그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이 불안한 독재 체제는 전적으로 강력한 교황청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었고, 교황청의 힘이 건재하다는 가정 하에서만 유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청의 권위 역시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간의 라이벌 관계가 계속되는 한 안정적인 것일 수 없었다. 1521년의 패배는 프랑수아 1세로 하여금 이탈리아에 대한 집착을 거두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를 5세를 향한 적개심에 불타던 그는 다시금 롬바르드 평야로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전진했고, 머쓱하게도 1524년 또다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었던 프랑스군은 부르봉(프랑스에서 에스파냐로 귀화한 공작), 라노이, 페스카라 등의 우수한 통솔자를 갖춘 이탈리아 주군 에스파냐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기세를 몰아 프랑스 본국으로 진입해 들어간 황제군 역시 보급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프로방스 전역을 태워버리는 전략을 선택한 프랑수아 1세군의 손에 패배를 맛보게 됐다. 결국 프랑스군은 프랑스로, 황제국은 이탈리아로 철수함으로써 1524년의 전쟁 역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시점까지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방스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프랑수아가 또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와 1524년 12월 비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 전략의 배를 갈아타게 된다. 클레멘스의 이와 같은 박쥐 흉내는 몇 번 더 반복됐다. 프랑수아의 새로운 이탈리아 원정이 프랑스군 전체가 궤멸당하고, 프랑스아 1세는 포로로 포획되는 참패로 끝나자(파비아 전투 1525년 2월), 클레멘스는 패전의 소식이 들려오기 무섭게 카를 5세에게 다시금 손을 내밀어 조약을 체결했고, 13개월 후, 카를 5세의 손에서 풀려난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영국-교황청의 반 에스파냐 동맹을 제안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금 카를 5세를 버리고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고 창 끝을 카를 5세에게 돌린다.
<<메디치 가문 이야기>>의 G.F. Young은 클레멘스 7세의 교활한 계략이 프랑수아와 카를 5세 간의 충돌을 부추겼으며, 이것은 모두 클레멘스 7세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국가 운영과 외교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던(도덕적 귀감이 될 인물은 아니었지만) 클레멘스 7세가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유럽 최강자들 사이에서 ‘불장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난 그보다는 역사가 Frederick Schevill의 주장, 즉 클레멘스 7세는 그가 처해 있던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해서 교황청과 피렌체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유약함 덕분에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채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서 저울질만을 반복하고 말았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건 간에 그 어떤 확실한 행동 없이 지속적으로 행동을 벌일 것처럼 위협을 취하며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오간 그의 행동은 결국 확실하게 한쪽을 택한 선택이 불러올 수 있는 그 어떤 결과보다다 훨씬 더 끔찍한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클레멘스 7세는 분명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쪽이 너무 강력해지는 일을 막아서고자 나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격동하는 유럽의 정세는 그가 헤아리기에는 너무 혼잡했고, 교황청, 피렌체,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 1526년, 반도 내에서 에스파냐의 힘이 지나치게 커졌으며, 그들의 세력 아래서 교황청 또한 식민국과 같은 처지로 전락해버렸다고 느낀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의 지지를 확신하며 1526년 율리우스 2세의 전철을 따라 범-이탈리아 동맹 결성을 선언했다. 교황청-피렌체의 군대에 베네치아의 힘을 합해 카를 5세를 상대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그로서는 회심의 카드였을 테지만, 그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었다. 교황청에 먼저 동맹을 제안한 것은 프랑수아 1세였지만, 포로의 몸에서 막 풀려난 그에겐 곧장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 여력이 없었다. 이제 베네치아-교황청 연합군은 클레멘스 7세의 교활함에 크게 분노한 카를 5세의 제국군을 상대로 홀로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을 직면하게 됐다.
황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에스파냐 주둔군을 나폴리 사령관 라노이에게, 독일 주둔군을 이탈리아 북부의 부르봉에게 보내면서 나폴리의 라노이에게 “교황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새겨주도록 하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상 가능하듯 교황청-베네치아 연합군은 서로 간의 자잘한 의심과 질투 속에서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남진하는 부르봉의 황제군 앞에서 로디로 도망쳐 버렸고, 제대로 급여와 보급을 받지 못한 채 폭도로 변모한 독일군, 특히 루터교도로서 가톨릭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혈안이 돼 있던 그들이 로마를 무려 수개월간 피로 물들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1527년의 사코 디 로마 (Sacco di Roma/Sack of Rome/로마 약탈)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비참하고 참혹한 정경은 차마 표현할 수가 없다. 지휘 계통의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 격노한 군대가 무슨 짓을 하든, 독일인들의 광포와 플랑드르인들의 탐욕과 스페인인들의 방종이 아무리 무제한 분출되든 불쌍한 로마 주민들은 고스란히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교회와 궁전과 집을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추기경들, 귀족들, 사제들 부인들, 처녀들이 모두 군인들의 노리개가 되었고... 부르봉이 죽은 뒤부터 어느 장군도 통제할 수 없게 된 황제국은 여러 달 그 도시를 차지한 채 야만적인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로마는 5,6세기에 북부 민족들에게 여러 번 점령을 당한 적이 있지만, 야만적인 이교도들인 훈족, 반달족, 또는 고트족에 의해서도 현재의 이 끔찍한 적군에게 당한 것처럼 모질게 당한 적이 없었다.”(W. Robertson. <<메디치 가문 이야기>>에서 발췌)
클레멘스 7세는 성 안젤로 성으로 피신하여, 무려 일곱 달 동안 황제군에게 포위돼 생활해야 했지만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 그 무엇도 루터교들의 광란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었다. 레오 10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이 그들의 손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가톨릭 세계가 애지중지해 오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데서 기쁨을 얻었다.” (G.F. Young)
참혹하게 약탈당하고 있는 로마와 궁지에 처한 교황의 소식은 피렌체 시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눈엣가시였던 파세리니 추기경과 애송이 이폴리토와 알레산드로 메디치를 도시에서 몰아냈고, 다시금 공화정의 설립을 선포했다. 메디치가가 그들의 도시로부터 세 번째로 추방당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