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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un 15. 2021

군주론과 마키아벨리

피렌체 22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서 저는 현재 이탈리아의 상황이 새로운 군주에게 영광을 가져다줄 만큼 무르익었는가, 그리고 여기에서 발견되는 질료가 신중하고 역량 있는 군주에게는 영광을, 그리고 모든 인민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형태로 빚어질 기회를 과연 확실히 보장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제게는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군주에게 상서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곧 제가 아는 한, 과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시기가 결코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군주론, 26장)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임을 선언했다. 그의 정치사상이 이전까지 존재했던 정치학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군주론’이 세상에 나오기 무섭게 가톨릭 교회의 ‘금서’에 이름을 올렸으며,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사회 주류의 비판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치사상은 분명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키케로의 고전 작가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대접을 받아 왔다. 당신이 그에 대한 별다른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다른 사상가들과는 사뭇 다른 질감으로 메아리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다.


    공화정의 실각 이후 작은 집에서 집필에 전념한 마키아벨리의 대표적 사상서는 군주론(1513)과 로마사 논고(1517)다. 군주론에서는 절대 군주가 다스리는 왕정/공국을, Discourse에서는 로마의 공화정을 주로 다룸으로써 그가 왕정주의자인지 아니면 공화주의자인지에 대한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서술하게 될 것처럼 그의 사상에 있어서 단절은 없었다. 그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의 정치적 집필에 임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책의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정치 행동의 주체를 규명하지 않은 채로 보편 정치 이론을 전개하는 휴머니스트 전통의 정치학 저서가 아니었다. 그의 저서들은 마키아벨리의 조국 피렌체가 직면하고 있던 역사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에 새로운 민족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줄 새로운 군주의 탄생에 대한 간절한 소망 속에서 집필된 책이었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그의 꿈이 그의 사후에서야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평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처럼 그의 군주론은 이론서이기에 앞서 통일 이탈리아의 등장을 위한 때가 무르익었음을 알리는 '선언문'이었던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가 처해 있던 상황에 철저하게 집중했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오늘날까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은 직면한 특수한 상황에 충실했던 그의 노력이 되려 정치학의 보편적 진리에 가닿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분명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이탈리아인의 관점에서 16세기 이탈리아의 상황을 주시하며, (서문에 쓴 것처럼) 유래 없는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그의 저서들을 집필했다. 우리는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에서 고대의 예시를 언급하다가도  지속적으로 동시대의 인물들과, 현재 시국, 무엇보다 새로운 군주의 앞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마키아벨리를 발견한다. 


    따라서 그는 개별적인 사례를 통해 보편적인 법칙을 유추하기보다는 각각의 상황이 가지는 특수함을 강조하는 접근을 택했다. (군주론에서 그는 종종 강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를 위해 각각  다른 전략을 제안한다) 또한 가상의 인물, 가상의 사회, 고전적 예시가 아닌 현시대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활용하여 그의 논점을 이어나갔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예시들 역시 언급되고 있지만, 군주론의 거의 모든 장(챕터)에서 (특히 첫 12 장에서) 그는 자신이 비서관으로서 직접 상대해야 했던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를 주된 예시로 들고 있다(로마사 논고에서도 그는 피렌체 공화정의 헌법과 그 부족함, 그리고 그 때문에 피렌체가 겪어야 했던 고충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는 1512년 피렌체의 공화정이 실각하게 된 이유가 피렌체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공화정의 특성상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대대적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가 필요하고, 공화정의 특성상 이러한 대중적 지지는 전 국가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형성되기 어려우며, 많은 경우 공화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1512년 피렌체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동시에 그는 고대의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군주론  전체를 통틀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볍게 단 한 번 언급하는 것에 그쳤다) 16세기 이탈리아 정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윤리를 앞세우는 고전 정치학과 목적론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학의 실용성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역사에 있어서 필연적인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충분한 인구와 국력을 갖춘 중앙 집권 국가의 필요성) 이러한 필연적인 변화가 도래하는 과정은 우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통일 이탈리아가 도래하는 과정).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주도하는 16세기 유럽의 정세가 그에게 각인시켜 준 것은 거대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대규모 중앙집권 국가의 건설이 안정적인 체제의 확립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부상했다는 사실이었다(1512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 피렌체의 프랑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역시 부분적으로는 피렌체 상인들에게 프랑스 시장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의 경제력을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으나, 피렌체의 내정을 담당했었던 그는 대규모 중앙 집권 국가가 의미하는 거대 시장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마키아벨리는 대국이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같은 관습과 언어를 공유하는 민족 국가여야 함을 주장했다. 이는 16세기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무력함이 증명하고 있는 바였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민족국가의 탄생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의 절대군주였으며, 이러한 국가의 건설을 가장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기존 귀족 가문-왕족의 혈통을 타고난 인물들이 타국의 (같은 민족의) 영토를 통합하는 형태를 취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그는 로렌초 메디치에게 그의 희망을 어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마키아벨리가 정말 메디치 가문이 이탈리아 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탈리아가 이제 희망을 걸 만한 대상은 오직 영광스러운 전하의 가문 뿐입니다"(군주론 26장) 


일 마그니피코 로렌초의 손자, 로렌초 메디치


   반면 이러한 필수적인 요소를 갖춘 중앙 집권 국가는 군주의 역량(virtu)과 운명(fortuna)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우발적인 사건으로서만 이탈리아에 도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강대국 사이에서 신음하던 피렌체 비서관으로서의 경험이 그에게 수차례 상기시켜준 국가 운영의 진리였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의 '한 줄기 빛'의 가능성이었던 체사레 보르자의 예시를 들면서 -  개인의 역량이 뛰어난 경우에도 (율리우스 2세의 당선을 막지 않는 치명적인 실수를 예외로 한다면) 만약 운명에 의해 외면받는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열병으로 쓰러져버린다면) 이러한 군주 역시 무력해질 수밖에 없음을 거듭 상기시키고 있다. 


“운명은 가변적인데, 인간은 유연성을 결여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인간의 처신 방법이 운명과 조화를 이루면 성공해서 행복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해서 불행하게 된다고 결론짓겠습니다."(군주론 25장)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즉 이탈리아를 통일시켜줄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군주의 도래를 위한 효과를 기대하며 그의 ‘선언문’인 군주론을 집필했으며, 불투명한 미래를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사상이 휴머니스트 전통의 윤리학적 정치학과도, 17세기 이후 도래하게 되는 루소, 합스, 로크의 사회 계약론과도 차별화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미 완성된 체제를 두고 가상의 '자연', 혹은 가상의 국가 건설의 역사를 주조하여, '사회 계약론'의 타당성을 피력했던 합스와 루소와 같은 사상가와 달리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자연의 혼돈을 피해, 개인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계약 하에 함께 세우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의 건설이란 필요한 역량을 갖춘 군주가 운명의 도움을 받을 때 가까스로 이루어질 수 있는, 수많은 고통과 때때로 더없이 지독한 잔인함이 요구되는 과업이었다. 알튀세르는 이런 면에서 마키아벨리는 첫 자본가의 '최초의 자본 축적'이 부지런히 일해서 자신의 수익을 저축한 노동자의 절약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부정하고, 사실 그것이 토지에서 자작농을 모조리 몰아내고 공장을 세워버린 영국 젠트리 계급의 잔인함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마르크스의 업적과 견주어질만한 것임을 지적한다. 


    마키아벨리가 후세의 학자, 정치가, 사제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비난을 받았던 이유 역시 그가 이와 같은 무거운 과업을 달성해야 하는 군주의 역량이 윤리 주의가 말하는 도덕적, 종교적 가치와는 무관함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일을 종교적 계율, 관습적 윤리 위에 두었고, 바로 여기서 결정적으로 스스로를 고전 정치학과 차별화했다. 정치적 목표를 위해 도덕을 희생시키고, 종교를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하고, 마지막으로 잔인함, 속임수, 배신을 정치적인 목적의 완수를 위해서 적절히 활용하기를 주문한 그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쟁'을  꿈꾸고 있었던 혁명가였다(그람시). 그는 이미 완성된 세계 정치적 지형을 평화롭게 관조하며, 체제의 안정을 바라는 사회적 주류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학자들에게 있어서 '불편한 사상가'일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군주론을 펼치고선,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의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주어야 합니다."(군주론, 3장) 


과 같은 구절에서 접하게 되는 그의 '솔직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이러한 그의 신념 뒤에는


“전쟁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에게 불리하게 지연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화근이 자라는 것을 허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군주론, 3장)


라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세에 입각한 현실주의적 확신이 도사리고 있음을 곧 발견하게 된다.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던 그에게 있어서 국가 운영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회와 시민을 보호해줄 '승리'이지, 도덕적 가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16세기 유럽, 강대국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 낀 이탈리아의 운명은 비참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말미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참혹한 상황을 묘사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인들보다 더 예속되어 있고, 페르시아인들보다 더 억압받고 있음, 아테네 인들보다 더 지리멸렬해 있는 데다가 인정받는 지도자도 없고, 질서나 안정도 없으며,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갈기갈기 찢기고, 유린당하여, 한마디로 완전히 황폐한 상황에 있습니다."(군주론 26장)


그러나 동시에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이탈리아 반도에 새로운 군주가 등장할 적시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음을 설파한다.


"모세의 출중한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 예속되어야 했고, 키로스의 위대한 정신이 드러나기 위해서 페르시아인들은 메디아인들에게 억눌려 있어야 했으며, 테세우스의 탁월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테네인들은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출중한 이탈리아인들의 역량이 드러나기 위해서, 이탈리아는 현재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해야 했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탈리아를 위한 혈로를 모색했던 마키아벨리의 낙관주의야말로 어쩌면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일지 모른다. 그는 당시 피렌체의 국력으로는 도무지 꿈꿀 수 없었던 에스파냐와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준비할 것을 로렌초 메디치에게 주문하며, 그에게 분명 승산이 있음을 필사적으로 피력했던 것이다. 


“ 이탈리아인들의 용맹으로 우리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하 자신의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비록 스위스와 스페인의 보병은 매우 위협적이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둘 다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3의 보병 형태로 그들을 능히 대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격파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스페인 보병은 기병에 약하고, 스위스 보병은 자신들처럼 완강하게 싸우는 보병에는 지레 겁을 집어먹기 때문입니다.” (군주론, 26장)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오랜 지론인 '용병이 아닌 정규군을 활용한다면',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약소국에게도 승산이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100년 전쟁에서 정규군을 활용하여 프랑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영국의 예시를 들면서 정규군의 활약이 전세의 불리함을 극복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반면, 열강 앞에서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그들의 칼날 앞에 그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한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스스로의 국방을 위해 정규군을 구성하지 못한 오늘날의 군주들과 근대의 공화국들은 부끄러워할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는 병역에 복무할 남자들의 숫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남성들을 병사로 변모시킬 방법을 몰랐던 그들의 잘못입니다."(로마사 논고) 

 

    거듭 서술했듯이 마키아벨리는 매우 특정한 효과를 기대하며 그의 군주론을 펴냈다. 그가 스스로 거듭 강조했듯이, 운명은 가변적인 것이기에, 그는 그가 꿈꾸는 새로운 군주가 언제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통일이 그의 죽음 이후로도 무려 300년 이후에나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고트족의 지배 이래로 유래 없는 수모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인들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일전에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에게서 이탈리아 통일로 향하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국가란 탁월한 역량의 인물의 힘으로 건설되는 것이라는 것. 그것이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개인의 역량과 운명이 만날 때, 이탈리아에도 새로운 민족 국가가 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한 마키아벨리는 진정한 정치사상이란 “이미 확립된 체제”를 관조하며 보편적인 이론을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당면한 최대 과제를 해결하는 위험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군주의 길을 제시하며, 그것을 읽는 독자의 피가 뜨거워지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독자들을 젊게 만들고자 했다. 역량이 있는 이들에게 신중함보다는 과감함을 주문했던 그는 분명 혁명가였다. 


"저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은 여성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성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운명은 여성이므로 그녀는 항상 청년들에게 이끌립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고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군주론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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