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21
1512년 에스파냐-교황청 연합군에게 백기를 든 피렌체는 협정에 따라 그들의 성문을 열어 메디치가의 귀환을 허락해야만 했다(형식적으로는 일반 시민의 신분으로 귀환한 것이었으나, 팔라초 메디치에서 에스파냐 군의 호위를 받으며 생활하는 그들이 ‘일반 시민’ 일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메디치의 복권은 피렌체 공화정 체제의 몰락을 의미했다. 베네치아식 대의회, 2개월에 한 번씩 선출되는 시뇨리아를 포함한 공화정의 모든 제도적 장치가 메디치와 같은 소수 가문의 득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개설된 제도였음을 고려했을 때, 메디치의 지도 아래 과두정이 부활했다는 사실은 공화제의 역사가 철저하게 부정됐다는 사실을 시사할 수밖에 없었다. 열강의 틈 사이에 낀 피렌체에겐 더 이상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었다.
공화정의 패배는 수많은 피렌체인들을 낙담케 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피렌체의 장관 니콜로 마키아벨리만큼 그 실패를 통탄한 이는 없었다. 그는 16세기 유럽의 그 누구보다도 국가 운영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탁월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메디치의 귀환과 함께 영원히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정치인 마키아벨리의 좌절은 열강의 틈새에서 기어코 자립의 길을 탐색해낼 수 없었던 16세기 피렌체가 직면한 비극의 상징과도 같았다.
변호사이자 휴머니스트였던 아버지 아래서 일찍부터 철저한 고전 교육을 받으며 자란 마키아벨리는 1498년 사보나롤라의 실각 직후 들어선 피렌체 공화국에서 제2장관 겸 10인 전쟁위원회 비서로 임명되면서 그의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오랫동안 실무적인 경험을 유감없이 만끽할 수 있는 자리를 꿈꿔왔던 그로서는 공화국 제2장관으로서는 내정을, 전쟁위원회 비서로서는 외교를 담당하는 이상적인 직책을 꿰찬 셈이었다(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그가 이러한 요직에 발탁된 데에는 아버지의 친구들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1500년에서 1503년 사이, 전쟁위원회의 비서로서 유럽 각국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는 행운은 그에게 있어서 유럽 각국의 군주들과 그들의 통치 체제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돼주었다. 1502년, 그가 체사레 보르자의 곁에서 보낸 4개월 남짓의 시간은 훗날 그의 ‘군주론’의 결정적 소재가 된다.
마키아벨리가 루이 12세, 체사레 보르자, 알렉산더 6세/줄리우스 2세의 곁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사이, 피렌체 정부는 나름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체사레 보르자의 교황군 앞에서 철저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굴욕을 경험한 피렌체는 2개월에 한 번씩 새로이 선출되는 시뇨리아 제도가 지나치게 불안정한 국가 운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어진 회의를 통해 종신 곤팔로니에레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의 개헌이 실행됐고, 1502년 피에로 소데리니가 종신 곤팔로니에레에 당선됐다. 유능한 관료였지만 국가 지도자의 자리가 요구하는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했던 소데리니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결정에 있어서 피렌체로 귀환한 제2 장관 겸 비서 마키아벨리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다.
피렌체의 모든 행정권을 독점하게 된 종신 곤팔로니에레 소데리니와 그의 오른팔 마키아벨리가 도입한 개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시민군의 창설이었다(타고난 관료였던 소데리니는 주로 재정 상황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훗날 용병대장들이야말로 국가의 혈세를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은 존재라 비난하게 되는 마키아벨리는 실제로 피렌체의 국방을 무능한 용병이 아닌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민군에 맡기는 변화를 꾀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정규군 개설의 아이디어를 준 것은 체사레 보르자였다- 그는 휘하 장군들의 반란을 겪은 이후(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일화), 용병이 아닌 스스로 지휘하는 정규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준비한 바 있었다) 물론 시민군의 개설을 위해서는 징병제의 도입이 필요했고, 이는 의회를 통한 법안의 통과를 필요로 하는 사안이었다. 안타깝지만 시민들에게 무기를 안겨주는 일을 망설였던 대의회 의원들의 반대 속에서 소데리니와 마키아벨리는 1506년, 피렌체 시민이 제외된 콘타도(지방) 농민 구성의 ‘시민군’이라는 소기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에 만족할 수밖에는 없었다. 애국심으로 뭉친 시민군을 구현해내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피렌체 시민이 제외된, 거기다 규모마저 1만 명 정도로 축소된 '피렌체 시민군'은 탐탁지 못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마키아벨리는 낙심하지 않았다. 전장 경험이 없었음에도 그는 시민군의 운영을 직접 지휘했다(1506년 통과된 법안은 9인 구성의 위원회에게 시민군 운영을 위임했으나, 위원회의 비서를 맡고 있던 것이 마키아벨리였기에, 사실상 그 운영은 마키아벨리의 관리 아래 이루어졌다). 농민들에게 무기와 갑옷이 주어졌고, 속성 군사 훈련이 실행됐다. 농민들로 구성된 시민군의 숙련도는 실전으로 단련된 용병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재빠른 동원이 가능한 정규군이 가진 이점이 그들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배신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용병들과 달리 그들의 고향을 스스로의 손으로 지키는 일에 동원된 정규군의 애국심 역시 실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해 줄 터였다. 창설 초기 제한적 규모의 시민군에 국방의 임무를 모두 맡길 수 없었던 피렌체는 여전히 용병을 고용해야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용병의 비율은 시민군에 비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부족한 훈련과 제한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가 시민군을 통해 이루어낸 단기의 성과는 놀라웠다. 그의 시민군은 1509년 피렌체 시민 모두의 절실한 바람이었던 피사 탈환을 이루어낸 것이었다. 1494년(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이후로 피렌체를 상대로 무려 15년을 저항해온 피사를 마침내 굴복시킨 성과는 훗날 ‘마키아벨리안’이란 단어의 어원이 되는(지나치게 왜곡되고 말지만) 그의 탁월한 전략적 혜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신성 로마 제국, 교황청, 에스파냐, 프랑스가 모두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는 1509년 봄, 피렌체에게 오랜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상적인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아보았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전쟁에 휘말린 열강은 피사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없었고, 소국 피사는 타국의 지원 없이 피렌체와 1대 1의 정면대결을 벌일 수 없었다. 끈질기게 저항했던 피사였지만, 마키아벨리의 지휘 아래 도시를 단단히 포위하고선 목줄을 죄어오는 시민군은 빈틈을 허락하지 않았고(전쟁이 유리하게 흘러갈 즈음에 전투를 임의로 중단하고선 더 많은 돈을 확보하기 위해 고용주와 새로운 협상을 꾀하는 용병 특유의 악습에 대한 걱정 없이 전쟁을 운영할 수 있다는 이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피사는 1509년 6월 8일 피렌체군에 투항하게 된다. 우리는 피렌체에 주둔하고 있던 정부 비서가 피사의 마키아벨리(그가 ‘위대한 니콜로’라 칭하던)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그가 올린 성과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피렌체인들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환희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낮인데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에는 축제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밤에는 어떤 광경이 연출될 것인지 상상해보십시오!... 당신을 지나치게 자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없었더라면 난 당신이 피렌체의 군대를 너무나 훌륭하게 지휘했음을, 피렌체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라 말할 것입니다.” (Frederick Schevill의 History of Florence에서 발췌)
피사 함락과 함께 마키아벨리는 그의 정치 커리어에 있어서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시민군이 이뤄낸 성과는 곧 찾아온 에스파냐-교황청의 위협 앞에서 피렌체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고 프랑스에 대한 지지를 고집하는 만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1510년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한 교황 율리우스 2세(영미식: 줄리우스 2세)와 에스파냐 연합군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수차례 피렌체에게 제안해 왔다. 메시지에는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피렌체를 '적'으로 치부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시 존명의 위기 앞에서 마키아벨리와 소데리니의 의견이 처음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에게 외교 전략을 바꾸어 교황청-에스파냐 연합과 손을 잡을 것을 제안했다. 소국 피렌체로서는 국제 정세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며, 그들에겐 교황청-에스파냐 군에 맞설 군사력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소데리니에게는 프랑스와 유지하고 있던 우애의 전통을 깰 용기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도 승리할 것이며, 동맹국을 저버리는 행동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역설했다. 그러나 루이 12세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던 마키아벨리는 루이 12세가 별다른 군사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또한 프랑스에게 있어서 피렌체는 존중할만한 동맹국이 아닌, 유용성이 고갈되면 금세 버려질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루이 12세의 궁중에 머물던 시기 프랑스 관료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한 바 있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에게 그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었고, 결국 피렌체는 프랑스를 지지하는 전략을 택하게 된다.
1512년, 프랑스를 알프스 너머로 몰아낸 후, 에스파냐군은 기수를 돌려 피렌체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전쟁 앞에서 초기 피렌체 시민은 결연한 모습으로 그들의 단결을 과시했다. 피렌체인들은 피사를 함락시킨 시민군의 위력을 믿고 있었다. 만약 초기의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피렌체가 에스파냐 군과 공성전에 돌입했더라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에스파냐 군과 피렌체 시민군 사이 Prato를 두고 벌어진 전초전에서 피렌체가 자랑하는 시민군이 졸전 끝에 철저하게 궤멸당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만다. 이 소식은 곧장 피렌체로 전해졌고, 피렌체 시민들을 패닉 상태에 빠뜨려버렸다. 얼마 후 프라토에서 행해진 약탈, 강간 방화의 참상의 소식이 낙심하고 있는 피렌체인들에게 도착하면서 그들은 남은 전의를 완벽하게 상실해 버린다.
결국 공포에 휩싸인 피렌체는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백기를 들어버렸다. 피에로 솔데리니는 에스파냐 군의 모습을 보기도 전에 피난해버렸고, 결국 피렌체의 통치권은 300명의 에스파냐 창병과 함께 입성한 추기경 지오반니 메디치에게로 헌납됐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이 허탈한 패배는 연약한 지도자를 둔 국가가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안겨준 아픈 경험이었다.
훗날 마키아벨리가 그의 저서에서 서술하게 되듯이 민중의 마음은 변덕스러웠다. 에스파냐 군의 호위와 함께 돌아온 메디치가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피렌체인들이었으나, 그들은 이러한 침묵의 저항조차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1513년, 교황 줄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추기경 지오반니 메디치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새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됐다는 소식이 피렌체로 전해지는 순간, 환희에 찬 피렌체 시민들은 다시금 불꽃을 피어 올리며 일주일간 밤낮으로 이어진 연회를 열어 ‘도시의 경사’를 기념했다. 그의 금의환향을 위해 오벨리스크와 개선문이 세워졌고, 교황의 '행진'길을 내기 위해서 건물들이 허물어져 내렸으며, 산타 트리니타 광장에는 거대한 성이 건설됐다. 보석으로 빛나는 티아라와 망토를 두른 지오반니가 무수한 경호원들과 함께 등장하여 피렌체 시민들을 축복하자, 구름처럼 모여든 인파는 모두 희열에 휩싸였다. 그의 수행원들은 인파를 향해 은화를 던졌고, 지오반니는 그의 백성들에게 신의 축복을 연거푸 선사했다. 행렬이 산 펠리체 성당을 지나갈 때, 지오반니는 그의 아버지 로렌초의 흉상을 발견하고, 쌍안경을 들어 흉상 밑에 새겨진 글을 확인한다 "여기 내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라 적힌 내용을 확인한 교황은 순간 그의 눈시울을 붉히고 만다.
바티칸으로 복귀해야 했던 지오반니를 대신해 피렌체의 통치를 맡게 된 것은 지오반니의 형,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 메디치였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던 로렌초였지만, 지오반니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그에겐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을 책임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는 일이 필수적이었음은 당연했다. 그는 로렌초와 프랑스 왕실과의 혼인을 성사시켰고, 이는 레오 10세의 취임과 함께 메디치 가문의 권위가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도 높아졌음을 시사하고 있었다(로렌초와 프랑스 왕가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그 유명한 카테린느 메디치다. 세 명의 왕의 어머니이자 유럽 역사의 폭풍의 눈으로 등장하게 되는 그녀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대한 이야기 역시 추후의 포스트에서 다루게 될 테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공화정의 몰락과 레오 10세에게 쏟아진 대중적 지지는 그의 공적 커리어의 끝을 의미했다. 정치 외의 삶을 알지 못했던 그는 메디치 정부 아래서 복무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되려 무고하게 로렌초 메디치의 암살 계획에 휘말리는 바람에 극심한 고문을 당하는 고초까지 겪어야 했다. 무죄가 증명된 후에도 그는 메디치가의 부름을 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군주론>>을 로렌초 메디치에게 헌정한 것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그가 사랑했던 그의 '천직'에 복귀할 기회를 탐색해내지 못했다. 낙담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조그만 오두막에 머물며 그의 정치에 대한 열정을 집필로 승화시키기로 결심한다. 그의 정치적 좌절이 후세의 우리를 그 슬픔의 절대적 수혜자로 만들어준 셈이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