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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y 31. 2021

열강과 피렌체

피렌체 20

 ‘예언자’ 사보나롤라가 심어놓은 ‘선민사상’의 최면에서 깨어난 피렌체인들은 이제 암울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피렌체가 ‘심판의 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는 동안에도 서양사의 시계는 돌아가고 있었다. 사보나롤라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4년간의 혼란은 피렌체의 국제적 입지를 더더욱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샤를 8세의 대군이 뒤바꿔놓은 반도의 새로운 정치적 형국에 있어서 아르노 강변의 소도시는 더 이상 주도적인 배역을 꿈꿀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열강의 놀이터로 변모한 이탈리아에서 피렌체는 생존을 위해 강대국의 자비에 의존해야 하는, 여타 소도시들과 별다를 것 없는, 2등 국가의 처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추락한 피렌체의 위상은 노쇠의 길에 접어든 이탈리아 내 국가들의 국력을 방증하고 있었다. 알프스 남쪽의 그 어느 도시도 더 이상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과 정면대결을 꿈꿀 수  없었다. 다가온 16세기 역사에서 이탈리아는 오로지 열강의 전리품으로서만 그 이름을 올리게 될 터였다. 곧 살펴보게 될 제1차 이탈리아 전쟁과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은 분명 이탈리아 도시국가 모두가  참여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두고 있던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그 주역은 이탈리아 반도에 그들의 식민지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돼 있던 프랑스, 오스트리아, 에스파냐였다. 



    정복자 샤를 8세가 피렌체에 입성(1494)한 이후로 공화국 피렌체는 외교 정책에 있어서 만큼은 완벽하게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여기에는 샤를 8세를 신의 사자로 추켜세운 사보나롤라의 영향 역시 작용했다). 교황 알렉산더 6세의 범 이탈리아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샤를 8세의 퇴각로를 지켜주었던 피렌체는 그가 프랑스로 귀환한 후에도 모든 군사, 외교 활동에 있어서 프랑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시민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원하던 과제, 피사의 탈환 건에 있어서도 피렌체 정부는 오로지 샤를 8세가 피사인들에게 투쟁을 거둘 것을 명령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피렌체인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돌아올 것을 약속한 샤를 8세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고, 그들에겐 강력한 프랑스군에 도전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의사가 없었다. 결국 피렌체는 샤를 8세가 사망한 이후에서야 피사 탈환을 위한 군사적 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이 얼마나 프랑스에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예시가 아닐 수 없었다.  


 샤를 8세가 약속한 ‘빠른 귀환’의 약속은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좌에 오른 루이 12세에 의해서 현실화됐다. 이전의 이탈리아 원정과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번에는 그 목적지가 나폴리가 아닌 밀라노였다는 사실이었다. 올레앙 가문의 적자였던 루이 12세는 혈통 상 비스콘티 가문의 계승권 역시 소유하고 있었다. 밀라노를 찬탈한 스포르차 가문을 몰아내고, 본래의 영주 가문, 비스콘티를 밀라노의 권좌에 복귀시킨다는 명분은 그에게 있어선 더없이 훌륭한 구실이 돼주고 있었다.


루이 12세

    그는 충성스러운 피렌체가 그의 정복 사업을 지원할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중요한 위성 도시를 모두 잃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데다, 사보나롤라를 두고 벌어진 혼란으로부터 이제 겨우 회복한 피렌체가 제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은 제한적이었다. 결국 루이 12세는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이탈리아 내의 동맹국을 필요로 했던 그가 교황청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몰락한 피렌체의 위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반-프랑스 연맹의 맹주로서 샤를 8세의 귀환길을 막아서는 데 앞장섰던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이미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그 자세를 바꾸어두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하는 작은 일화를 넘겨짚고 가도록 하겠다.


  1498년, 막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그의 부인과 이혼하고 사망한 샤를 8세의 미망인 앤과 결혼하길 원했다. 그녀가 공작부인으로 있는 브리타니 주의 통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혼을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루이 12세는 알렉산더 6세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뜻을 밝혔고, 놀랍게도 루이 12세는 이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다. 물론 조건이 있었다. ‘대가 없이는 그 무엇도 건넨 적이 없는 남자’라는 평을 받던 알렉산더 6세였다(이 시기의 교황들의 인품은 가히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국왕과의 협상을 통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교황과 프랑스 국왕 사이에 이루어진 협상의 내용은 알렉산더 6세가 루이 12세의 이혼을 허락하고, 대신 그가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프랑스 왕가와의 혼인을 주선하고, 프랑스군 일부의 지휘를 체사레에게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장인 알렉산더의 최고 관심사는 그가 아끼는 아들의 앞길을 터주는 일이었던 것이다(그는 다수의 정부들 사이에서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두고 있었다). 


 루이 12세에게 있어서 이것은 손해 볼 것 없는 조건이었다. 만약 체사레 보르자가 강력한 영주로 성장한다 한들 프랑스의 입장에선 알프스 남쪽에 또 하나의 우방을 얻는 셈이었다. 곧 프랑스 왕가의 샬롯 알브레와 체사레 보르자 사이의 혼인이 이루어졌고, 보르자에게 발렌티노 공작의 귀족 작위가 하사됐으며, 마지막으로 프랑스군 일부가 그의 휘하로 편입됐다. 훗날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군주의 모델”이라 칭송해 마지않았던 전설의 군벌 체사레 보르자가 이탈리아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체사레 보르자


  이와 같은 까닭에 1499년 이탈리아로 진군을 시작한 루이 12세는 새로운  동맹국 교황청으로부터 그의 밀라노 점령에 대한 지지를 손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 피렌체와 교황청이 등을 돌린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에 무혈입성한 프랑스군에게 있어서 무주공산과 다름없었다. 홀로 남겨진 밀라노가 프랑스군 앞에서 백기를 들었음은 물론이었다. 5년 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주도한 대가로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되는 밀라노의 군주 로도비코 스포르차는 결국 프랑스 소속 스위스 용병의 손에 압류돼 프랑스의 어느 지하실에서 여생을 마감하게 된다.  


    밀라노 정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루이 12세는 내친김에 나폴리 왕국 점령까지 넘보게 된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아라곤 왕조의 지원을 받고 있던 나폴리 왕국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에스파냐의 통일을 완수한 영웅 페르디난드에게 연락을 취한 루이 12세는 협상 끝에 나폴리의 북부는 프랑스가, 남부는 에스파냐가 다스리는 방식으로 나폴리를 2등분 하는 데 합의를 보게 된다. 이로써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루이 12세는 만족감에 젖어 알프스를 넘어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프랑스 군의 일부를 거느리고 있던 교황의 아들 발렌티노 공작을 여전히 반도에 남겨둔 채였다. 


에스파냐 국왕, 아라공 가문의 페르디난트 


    프랑스군은 떠나갔지만, 이탈리아는 또 한 차례의 피바람을 앞두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중 다수는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의 말발굽 아래서 신음하게 될 것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역사에 있어서 체사레 보르자가 보여준 활약은 짧지만 강력한 것이었다. 전설로 남은 그의 무자비한 정복 사업은 이탈리아 내 영주들 모두를 공포로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선 교황청 영토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던 봉건 영주(vicar)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체사레는 단숨에 중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그의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다(알렉산더 6세가 그의 아들에게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새로운 종류의 콘도티에레를 맞닥뜨린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그의 군대의 강력함  못지않게 야망의 실현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잔인함과(그는 그의 형을 직접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담대한 성품,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최고의 미남'이라는 평을 받고 있던 수려한 외모에 압도되고 있었다(마키아벨리가 더욱 강력한, 더 저명한 가문의 영주가 아닌 그를 “완벽한 군주”라 평했다는 사실 역시 그가 직접 만나본 그의 ‘카리스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기로 유명했던 군주이기도 했다).


    군주로서 그의 역량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1502-3년에 전개된 그의 3차 로마냐 정복 전쟁이었다. 기습적인 속공으로 무방비 상태였던 우르비노와 카메리노를 단숨에 함락시킨 체사레 보르자는 당시 연전연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때, 지나치게 커져버린 그의 세력에 두려움을 느낀 휘하 장군들이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군사 중 대부분을 잃고 수세에 몰린 보르자는 로마냐에서 과거 부하들을 상대로 악전고투하게 됐다. 예상외의 타격을 입었지만 그의 반응은 재빨랐다. 교황청의 경제적 지원을 활용해 재빠르게 군대를 재구성한 체사레는 외교전을 활용하여 장군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켰고, 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구실 삼아 1502년 12월, 전투를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Senigallia에 회의를 마련하고 그의 적들을 초대했다. 장군들은 모두 휘하 병사들을 남겨둔 채 회의장에 나타났다. 이를 기다렸던 체사레 보르자의 병사들은 이들을 모조리 체포했고, 보르자는 그들을 남김없이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탈리아인들이 일 발렌티노라 불렀던 체사레 보르자의 교활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였다. 검은 피부에 위풍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던 ‘이탈리아 최고의 미남’ 체사레 보르자는 이처럼 이탈리아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방식으로 그의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이처럼 악명 높았던 그가 토스카나로 그의 창을 돌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보르자였으나, 교황의 앞마당인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에 영구적인 독립 공국을 확립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 뻔했다. 그는 일찍부터 토스카나에 그만의 독립 국가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테다) 강력한 군벌 보르자의 등장과 함께 피렌체의 수난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르자와 그의 병사들은 토스카나 주의 경계를 넘어 피렌체 방향으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같은 친-프랑스 진영에 속한 피렌체를 향해 그는 그의 군대가 교황청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피옴보를 향해 전진하고 있을 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분명 그의 이동 경로는 피옴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르자의 의중은 명확했다. 그의 군대는 지나치는 토스카나의 콘타도(장원/마을)를 모조리 초토화시키며 피렌체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런 노골적인 무력시위 앞에서 약소국 피렌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보르자를 돈으로 달래는 것뿐이었다. 보르자는 피렌체의 영토에서 물러나는 대신 그를 콘도티에레(용병대장)로 고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고, 피렌체는 그가 요구하는 금액을 보르자에게 헌납해야 했다. 약속된 돈을 받아 든 보르자는 다행히 토스카나를 떠나 주었지만, 그 후로도 피렌체의 위성 도시/요새들이 피렌체를 향해 반기를 들 때마다 그들을 지원하며, 피렌체에 대한 야욕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악랄했고, 동시에 가장 영리했던 용병대장의 위협 앞에서 돈으로 평화를 사는 가능성까지 고갈시킨 피렌체에게 남은 길은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피렌체의 다급한 서신을 받은 루이 12세는 자비롭게도 그의 신하 발렌티노 공작에게 동맹국 피렌체를 위협하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프랑스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체사레 보르자는 잠시나마 피렌체를 겨누던 그의 창을 거두었으나, 이러한 평화가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중부 이탈리아를 단숨에 그의 손아귀에 넣은 신흥 강자 체사레 보르자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더라면 이탈리아의 역사는 바뀌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운명의 여신은 보르자를 외면했다. 1503년 그의 세력적 기반인 교황 알렉산더 6세가 말라리아 열병으로 사망한다. 아직 그의 세력권을 안정화시키지 못한 체사레 보르자에게 있어서 아버지 알렉산더 6세를 잃는 일은 재앙과도 같았다. 게다가 같은 시기 그 역시 열병에 걸려 쓰러지는 불운이 겹치면서, 그는 영주로서의 입지를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 새로 교황에 취임한 줄리우스 2세에게는 경멸해 마지않던 전임자의 아들과 교황청의 권력을 공유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보르자에게서 교황청의 모든 영토를 몰수했다. 열병에서 회복한 보르자는 뒤늦게나마 혈로를 뚫어내려 결사적으로 투쟁했지만 결국 모든 세력을 줄리우스 2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를 넘나들며 재기의 길을 필사적으로 모색했던 그였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1507년 에스파냐, 피레네 산맥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 중 전사하고 말았다.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은 피렌체에게 있어서 더 없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교황 줄리우스 2세의 존재가 그들에게 있어서 더 큰 골칫거리를 몰고 올 것이란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보르자만큼 야심이 크고, 그 못지않은 실리주의자였지만, 보르자의 영리함을 갖추지 못했던 줄리우스 2세는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자신의 야심을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던 용맹 무쌍한 교황이었다. 이탈리아 전역을 그의 손아귀 안에 넣는 원대한(비현실적인) 꿈을 품고 있던 그는 보르자를 교황령으로부터 몰아낸 후, 다음 상대로 대담하게도 해상강국 베네치아를 선택했다. 


전사 교황, 줄리우스 2세


 줄리우스 2세에게 있어서 교황청의 영토인 중부 이탈리아로 야금야금 그들의 식민지를 확장시키고 있던 베네치아는 성가신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호기롭게 전쟁을 선포한 교황에게 지중해 전통의 강국 베네치아를 굴복시킬 군사력은 없었다. 초기 전투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교황은 욕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밀라노의 로도비코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바로 베네치아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스페인,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모두를 동원하여 반-베네치아 연합을 결성한 것이었다(1508년 12월). 다시 한번 초강대국들의 시선을 이탈리아로 집중시킨 줄리우스의 섣부른 결정은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 국가들에게 또 한 차례의 커다란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에게 빼앗긴 교황령을 회수한다는 줄리우스의 초기 목적은 프랑스군의 등장과 함께 단숨에 실현됐다. 힘의 열세를 직감한 베네치아군은 황급히 그들의 석호로 피신했고, 본래의 욕심을 채운 교황과 교황군은 이 시점에서부터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군과 베네치아 사이의 전투를 구경하는 관중으로 변모하게 됐다. 욕심을 채우고 나서야 정신이 든 것일까. 줄리우스는 그제야 자신이 야기한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만약 베네치아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손에 함락된다면, 강력한 프랑스군 앞에서 이탈리아 반도가 무방비 상태로 놓여질 것임을 감지했다(이미 두 차례의 프랑스 침공을 경험한 그가 자신이 벌인 일이 큰 실수였다는 사실을 여태껏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기이하기 짝이 없다)


 뒤늦게나마 줄리우스는 그의 외교 전략을 180도 회전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회수한 교황령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줄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와 비밀 군사 협정을 체결한 후(1510),   “야만인들을 몰아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선 범 이탈리아적 투쟁을 외치며, 베네치아와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 뛰어든다. 


    안타깝게도 생존을 위해 프랑스와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베네치아 이외에 줄리우스의 ‘자주 이탈리아’의 깃발 아래로 달려와줄 영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에 소속감을 느끼는 도시 국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줄리우스가 꿈꾸었던 범 이탈리아적 투쟁은 교황청-베네치아와 프랑스 간의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국력에 있어서 프랑스에 크게 못 미치는 교황청과 베네치아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기서 줄리우스 특유의 병이 다시 한번 도지고 말았다. 그는 프랑스군을 무찌르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자주 이탈리아를 위한 투쟁'에 에스파냐 군을 끌어들이고 말았다(1511). 


    훗날을 생각했을 때 분명 섣부른 판단이었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에스파냐군은  라벤나에서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이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군들이 전략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이탈리아 바깥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줄리우스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 과정에서 수차례 피렌체에게 동맹에 가입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친-프랑스 노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피렌체는 에스파냐군의 개입 이후로도 루이 12세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연합국 측에서부터 피렌체에게 가해진 위압은 미미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떠나가고,  에스파냐가  반도의 패자로 등극하게 되면서, 이제 피렌체는 프랑스에 대한 의리를 지킨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1512년, 에스파냐의 군대가 피렌체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승부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다음 포스트에서 피렌체 함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결과적으로 피렌체는 에스파냐 군대에게 성문을 열어줄 수밖에는 없었다. 사실 피렌체의 입장에선 연합군이 굳이 피렌체 공략을 고집한 것은 야속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에스파냐 최고의 전쟁 영웅 레이몬드 카도나 장군을 피렌체 원정에 동원한 선택은 그들에게 있어서 과유 불급이 따로 없었다. 


    피렌체는 곧 에스파냐-교황청 연합군이 어째서 그토록 피렌체에 집착했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백기를 들고 자발적으로 성문을 연 피렌체 시민들은 정복자로서 입성하는 교황청의 추기경이 바로 위대한 자, 로렌초 메디치의 아들 지오반니 메디치임을  알아보게  된다. 어느새 줄리우스 2세의 심복으로 변모한 그가 교황군과 에스파냐군을 이끌고 정복자로서 피렌체로  귀환한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1512년 이루어진 만추아 협상에서 피렌체를 메디치 가문의 통치령으로 되돌리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후, 직접 에스파냐군을 이끌고 피렌체를 향해 진군해온 것이었다.


    돌아온 왕을 맞이하듯 피렌체는 지오반니 메디치를 환영했다. 곧 도시 전역에서는 \메디치 가문의 문양을 다시 새겨 넣는 대장장이들의 망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외세의 힘을 등에 입은 '부활'은  메디치 가문의 미래가 코시모와 로렌초의 영광의 귀환을 의미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자의 유지를 이어받은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 지오반니는(형 피에로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가문의 영광을 지켜내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을 이어갈 채비를 마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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