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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y 24. 2021

사보나롤라

피렌체 19

 “오, 속죄하라 피렌체여! 더 늦기 전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르네상스 피렌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아마 사보나롤라와 ‘허영의 불꽃’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봤을 테다. 메디치 가문의 시대가 막을 내린 1494년에서부터 1498년까지, 이 페라라 출신의 도미니칸 수도원장은 피렌체의 상징과 다름없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 르네상스 인간 로렌초 메디치와 함께 아름다운 언어, 아름다운 예술, 아름다운 육체에 탐닉하던 피렌체의 시민들은 그가 숨을 거두기 무섭게 더없이 경건한 신정 국가의 독실한 신도로 변신한 것이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인들이 ‘촌구석’으로 치부하던 에밀리아 로마냐의 작은 도시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의사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여느 르네상스 이탈리아 소도시의 중산층 아이들과 별다를 것 없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던 궁중 의사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일을 권장하는 등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해진 기록으로 유추해본 그의 유년기는 그의 기도와 명상에 대한 유별난 집착을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여전히 사제들이 신성의 권위를 독점하고 있던 르네상스 이탈리아에는 이처럼 ‘천부적으로’ 독실한 아이들을 위한 진로가 마련돼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찌감치 사제의 길을 택한 사보나롤라는 기독교 교리와 성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쉼 없이 공부한 끝에, 스물셋의 나이에 도미니칸 탁발 수도승의 삶을 택하면서 속세를 등지게 된다.  


    수도승의 전통에 따라 육체적 고초와 정신적 수련이라는 통과 의례를 마친 사보나롤라는 1481년, 도미니칸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해 피렌체로 파견된다. 그러나 오랜 세월 품어온 열정을 앞세우며 그가  세세상  그 무엇보다 확신하던 교리를 대중 앞에서 설파하려 했했던 젊은 사보나롤라는 그의 인생 첫 실패를 맛보게 된다.  시민들에게서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악에 대한 부끄러움과 위대한 신에 대한 신앙심을 이끌어내려 한 그의 불호령은, 그가 스스로 고백했듯이, 피렌체의 닭 한 마리에게서도 감명을 이끌어내내지  못못했다. 이미 수많은 휴머니스트들이 웅변의 양식을 확립해놓은 피렌체에서 세련된 언어에 익숙해져 있던 시민들은 거친 고함 소리와 과장된 몸짓으로 신의 두려움을 말하는 시골 청년의 촌스러운 소란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도무지 그 어떤 반향도 일으킬 수 없었던 사보나롤라는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채 롬바르디아로 떠나야 했다.


    사보나롤라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된 것은 바로 이 롬바르디아의 작은 도시들에서였다. 피렌체와 달리 휴머니스트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던 롬바르디아의 고장들을 차례로 거치며 사보나롤라는 연설가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있었다. 늘 진지하게, 진실되게, 열정적으로 신의 말씀을 설파했던 그는 이제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활용하여 대중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었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죄악에 대한 회개를 강요하는 그의 호통 앞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무릎을 꿇었고,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가 피렌체를 떠난 지 9년이 지난 1490년,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 앞에서 스스로를 시험해볼 또 한 번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이번에 그를 피렌체로 초청한 이는 다름 아닌 로렌초 메디치였다.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가문이 후원하는 산 마르코 수도원의 수도원장 후보로서 다시금 피렌체로 초청된 것이었다. 로렌초가 무슨 연유로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불러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은 메디치 궁전의 휴머니스트들의 영향 아래서 지나치게 탐락가로 변해가던 그의 아들, (추기경) 지오반니에게 좋은 본보기가 돼줄 사제를 찾던 로렌초가 사보나롤라를 선택했다는 설이다.


    돌아온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는 완벽한 승리를 일궈낸다. 첫 설교에서부터 피렌체 전체는 그의 발밑에 굴복하고 만다.


“하느님은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 그는 내게 "내가 널 이탈리아의 중심에, 그곳의 파수꾼으로 보내노라. 나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지어다"라고 말하셨다” (사보나롤라)


    사보나롤라가 전하는 '하느님의 목소리' 속에 피렌체인들이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기독교 사회 개혁가들이 그의 시대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누누이 강조하던 ‘금욕’과 ‘참회’를 앞세운 기본적인 원론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구약 성경을 주로 인용했고, 모두가 알고 있는 성자들과 예언자들의 권고들을 통해 그의 설교를 이어갔다. 다만 오랜 고행과 금식의 과정 속에서 앙상해져 버린 그의 얼굴과 손가락이 내뿜는 엄하기 그지없는 불호령은 가히 성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혹독한 수행이 동반하는 육체의 고통 속에서 그는 지속적으로 환영에 시달렸고, 그 환상들은 점차적으로 그의 정신을 잠식시켜 버렸다. 처음에는 이러한 몽환적 망상들을 부정했던 그가 특유의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이 신이 보내신 '예언자'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심판의 날'을 이야기하는 그의 성스러운 모습 앞에서 피렌체인들은 경탄과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부차적인 요소이지만, 그의 예언들이 모두 맞아떨어졌다는 사실 역시 그의 존재를 휘감고 있던 아우라에 일조하고 있었다. 그는 로렌초 메디치,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죽음을 예언했고, “가장 성스러운 왕”이 죄악으로 뒤덮인 이탈리아를 개혁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라 예언했다.  물론 그는 메디치 가문, 교황청, 이탈리아와 유럽의 정세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이들 모두가 넘겨짚고 있던 사실을 반복한 것에 불과했다. 특히 드디어 피렌체 시내에 모습을 드러낸 작은 원숭이를 닮은 난폭한 난쟁이 샤를 8세 앞에서 “오 가장 성스러운 왕이시여”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그의 예언자로서의 역량이 그가 주장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로렌초의 통치 아래서 르네상스 피렌체 사회에 남아 있던 중세의 잔재가 예술에서의 화려한 귀족적 고전주의로의 귀환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면(제2 르네상스/보티첼리 포스트), 사보나롤라가 가시화한 것은 민중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던 중세적 신앙심과 교회에 대한 애착이었다. 절대자에게 스스로를 전부 던져버림으로써 현세의 고됨을 잊고자 했던 민중의 나약함에 '신의 예언자'를 자청하며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수도승이 접속했던 것이었다.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드는 사람들의 수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 전부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사보나롤라는 두오모에서 그의 신들린 불호령을 정규적으로 이어가게 됐다.



     예언자로서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것은 피렌체 시민들의 악덕을 바로잡는 일과 악덕의 원산과도 같았던 부패한 교회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오로지 권력과 사적 쾌락에만 몰두하는 보르자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더 6세를 격렬하게 비난했던 사보나롤라에게는 분명 사적 물욕과 권력욕(정치인으로선)이 결여돼 있었다. 그는 공공연히 그가 '순교'를 꿈꾸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실각 이후 나타난 정치적 혼란 속에서 피렌체인들은 그들이 영적 지도자 사보나롤라가 길을 제시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처음엔 개입을 망설였던 그였으나,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메디치 가문으로 대표되는 딜레탕트 세력이 다시금 피렌체 시민들의 도덕성을 시험에 들게 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사보나롤라는 두오모에서 열린 몇 차례 연설로 피렌체의 민심을 민주정 쪽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가 확립해준 절대적 지지에 힘입어 300명의 대의회로 대표되는 베네치아식 민주정의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도미니칸 수도원장이 피렌체인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격정적인 신앙심에 빠져 있습니다... 일주일 중 삼일을 빵과 물만으로 버티고 이틀을 와인과 빵만으로 절식합니다. 소녀들과 부인들은 모두 수녀원으로 도피했습니다. 거리에는 남성들, 어린아이들, 나이 든 여성들 밖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만추아 외교관의 보고서)



    피렌체 사람들은 사보나롤라의 엄명 아래서 교리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를 스스로 검열했다. 특히 도시 전역에 퍼진 그를 향한 영웅 숭배는 도시의 어린이들을 사보나롤라의 작은 전사들로 변모시켰다. 피렌체의 아이들은 거리를 순찰하며 술을 마시는 남자들이나 지나치게 화려하게 옷을 입은 여자들에게 ‘신의 뜻'을 따를 것을 강요했고, 사보나롤라의 신정 아래서 로렌초가 사랑하던 모든 휴머니스트 예술과 축제는 자취를 감췄으며, 거리에서는 오로지 성가와 말씀만이 울려 퍼졌다. 이러한 종교적 열성은 1497년 ‘허영의 불꽃’에서 그 정점에 달하게 됐다.



    로렌초는 매년 사순절을 앞두고 열리는 전통 축제 카니발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군주였다. 그의 지배 아래서 피렌체 카니발 특유의 난교와 방탕이 한층 더 그 색이 짙어졌던 이유였다. 피렌체 시민들은 폭력과 방사를 갈망하는 그들의 본능을 마음껏 개방하는 그들의 카니발 풍습을 아꼈다. 그러나 이러한 사보나롤라가 이런 죄악적 풍습을 가만히 둘 리 없었다. 그는 카니발에 – '속죄의 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선, 카니발 기간 동안 어린아이들을 앞세워 골목골목을 찬송가로 가득 채움으로써, 광란의 축제 대신, '속죄의 의식'이 열리도록 주선했다.


    사보나롤라 역시 방사와 폭력의 축제를 원하는 민중에게 카니발에 상응하는 축제가 제공돼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뜨거운 피의 소유자 피렌체인들은 그들의 공격성을 분출할 향락을 필요로 했다. 1497년 2월, 그는 그를 따르는 아이들에게 커다란 캔버스를 준비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피렌체 시내의 집을 하나씩 방문하여 그들에게서 각각 올바르지 못한 그들의 애장품을 헌납할 것을 요구했고, 물건들을 준비한 캔버스에 싸서 운반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어마어마한 양의 피렌체인들의 ‘허영’이 중앙 광장 한 복판에 커다란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올려졌고(보티첼리가 그의 그림들을 자진해서 이 ‘허영’ 더미에 던져 넣고 있었다), 그것은 2월 7일, 피렌체의 하늘까지 치솟는 불꽃 속에 타올랐다. 사보나롤라는 피를 원하는 피렌체 시민들을 위해 ‘신의 폭력’의 축제를 연출해준 것이었다.

 


    사보나롤라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피에로 메디치가 떠난 피렌체 내에서 그의 말은 법과 다름없었다. 그의 비호 아래서 피렌체 내 민주 세력은 대형 상인 세력인 Arrabbiati와 친 메디치 세력인 Bigi를 성공적으로 견제하며 대의회 시스템을 지켜나갔고, 전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등을 돌리며 그의 귀국길을 막아설 때에도 “신의 사자”인 프랑스 국왕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사보나롤라의 뜻에 따라 피렌체는 그에게 프랑스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의 말씀 아래 하나로 단결한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모든 대표 도시국가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는 반-프랑스 연맹의 맹주였던 교황 알렉산더 6세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도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교황에게 있어서 사보나롤라의 반기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강력한 우방을 절실하게 찾고 있던 피렌체의 Arrabbiati 세력은 이러한 교황의 심중을 눈치챘고, 로마의 그를 찾아가 피렌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가톨릭적 참상을 알리며, 개입을 요청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교황의 심기를 언짢게 한 것이 사보나롤라의 도덕적 메시지와 부패한 교회를 겨냥한 비판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사보나롤라가 프랑스의 샤를 8세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교황의 반-프랑스 연맹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에  훨씬 더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가톨릭의 수장이라기보다는 교황청의 영주 역할에 더 열심이었던 그는 사보나롤라가 열을 올리고 있는 ‘도덕적 개혁’ 따위는 늘 오고 가는 것일 뿐이며, 곧 다시 도래할 ‘관성’ 앞에서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영토를 교황청의 것으로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그는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수도승이 피렌체의 권좌에 앉아있는 일이 그의 야망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리란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교황은 우선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소환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내가 피렌체에 머물기를 명하고 있다”라는  답으로 일관하며 사보나롤라가 이러한 명을  거부하자, 그는 1496년 7월, 사보나롤라를 파문한다는 뜻의 친서를 피렌체로 보낸다.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교황의 파문장이 엄숙한 목소리로 발표됐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렌체 시민의 지지를 확신하던 그는 되려 비밀리에 교황을 몰아낼  가톨릭 공의회를 추진한다. 그는 교황이 아닌 자신이 ‘신의 예언자’이며, 그가 이끄는 피렌체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선민'이라는 그의 주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민중의 사보나롤라를 향한 절대적인 지지는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비범한 매력 이외의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대의회(Grand Counci), 시뇨리, 외 그 어떤 공직에도 몸을 담은 적 없이 오직 산 마르코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서 4년간 피렌체의 민심을 독점했다. 그러나 교황이 그에게서 가톨릭의 정당성을 앗아가고, 피렌체를 성무 금지령 (Interdict)로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피렌체의 민중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를 향한 지지의 기반이었던 그들의 교회에 대한 애착은 그들로 하여금 교황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보나롤라의 행동에 의문점을 품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피렌체 시내에서 사보나롤라를 지지하는 세력과 교황을 지지하는 반-사보나롤라 세력이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심심찮게 발견되기 시작했다. Arrabbiati와 Bigi 역시 대의회와 시뇨리 정부 내에서 점점 그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피렌체가 선택받은 도시이며, 사보나롤라가 진정 선택받은 예언자라면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소리가 프란시스칸 수도원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 역시 이 즈음이었다. (또 다른 설은 사보나롤라가 예언자임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던 그의 추종자들이 사보나롤라는 그 어떤 시험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며, 신이 그를 위해서 기적을 행해주실 것이라 공공연히 선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라이벌 수도원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들 끝에 사보나롤라의 가장 열성적인 심복 중 하나였던  도메니코는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사보나롤라가 예언자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자청하기에 이르렀다


 도미니칸 수도승들이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은 프란시스칸 수도원의 수도승들과 Arrabbiati 세력 사이에  비밀리에 결탁이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예언자’를 자청하며 신도들의 추양을 독차지하는 도미니칸 수도사의 존재가 라이벌 프란시스칸 수도승들에게 있어서 못마땅했음은 당연했다. 시기심에 휩싸인 그들은 Arrabbiati세력과 머리를 맞대고 이 ‘불 위를 걷는 시험’을 이용하여 사보나롤라를 확실하게 몰락시킨 묘책을 마련했다. 사보나롤라는 처음부터 이러한 ‘쇼’에 반대했지만, 확신에 가득 찬 그의 추종자들의 열서 앞에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결국 사보나롤라와 도미니칸 수도사들은 반대 세력의 함정에 완벽하게 빠져들고 말았다.


    1498년 4월 7일 정오, 광장에는 드디어 이 어린애 장난 같았던 내기가 현실화되고 말았다. 피렌체 시민들은 모두 기적을, 혹은 참상을 목격하기 위해 피아자 델 시뇨리아로 모여들었고,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흙다리가 그리고 그 양 옆으로는 기름에 흠뻑 적셔진 나무 기둥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이러한 야만적 방법을 택할 바에는 차라리 물 위를 걷게 하라! 는 이견 역시 제시됐으나, 묵살됐다. 반-사보나롤라 세력과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은 피렌체인들이 피를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피렌체가 여전히 수 세기 동안 휴머니스트들이 공격해온 신성에 대한 중세적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는 데에 이보다 더 명확한 확증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반-사보나롤라 세력은 ‘기적’에 의한 패배를 무릅쓸 의향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승리의 방책이 준비돼 있었다. 의식이 시작하기 위해 도메니코 수사가 앞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은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은 그가 십자가를 들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입은 로브 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트집을 잡으며 진행을 지연시켰다. 시민들이 기다리는 와중에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은 거듭해서 시청으로 퇴장하여 지루한 논쟁을 계속했고, 이러한 옥식각신은 저녁이 찾아올 때까지 지속됐다.


    그새 하늘에는 먹구름이 찾아와 광장에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가 '스펙타클'을 기대하고 있던 시민들의 옷을 흠뻑 적셨다. 시민들은 “시험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나무가 다 젖어버렸다”는 정부 측의 발표에 격하게 분노했다. 자초지종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그들은 자연스레 이것이 불 속으로 걸어나서기를 망설인 도미니칸들 탓이라 여겼고, 프란시스칸과 아라비아티 역시 이러한 식으로 여론이 휩쓸리게끔 민중을 부추겼다. 사보나롤라의 정적들이 마련한 이 우스꽝스러운 쇼는 결국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사보나롤라와 도미니칸 수도원의 인기는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아라비아티는 이 약간의 기후 변화를 감지하기가 무섭게 그들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아라비아티 세력이 이끄는 정부군과 프란시스칸 수도원의 지지자들이 도미니칸 수도원을 대대적으로 습격했다. 수도승들은 미리 준비해둔 무기를 꺼내 들고 선 저항했지만, 수적 열세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유혈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사보나롤라가 수도승들에게 무기를 거두게 한 후, 스스로 체포되는 길을 택했다.  


    체포된 사보나롤라는 그가 버릇처럼 말하던 ‘순교’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확신했을 테다. 그러나 그전에 그의 적들은 그에게서 받아낼 것이 있었다. 바로 그가 ‘가짜 예언자’ 행세를 의도적으로 해오며 피렌체 시민을 속여 왔다는 자백이었다. 혹독한 고문 끝에 사보나롤라의 어깨는 부서지고, 팔은 완벽하게 그 능력을 잃었다. 몇 날 며칠 지속된 고문은 결국 사보나롤라의 의지를 꺾어냈다. 그는 결국 그가 사기꾼이었음을 시인했고, (팔을 쓸 수 없었기에 직접 서명은 할 수 없었다),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사보나롤라의 체포 소식을 접한 교황은 피렌체 정부에게 즉각 그를 로마로 이송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피렌체인들을 이해하고 있던 거대 상인 세력은 그를 로마로 보내는 즉시 사람들이 그를 ‘피렌체를 위해 희생된 영웅’으로 추양 할 것임을 확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에서 ‘협잡꾼’으로서 처형돼야 했다. 피렌체 정부의 완강한 반대 앞에서 교황은 그의 뜻을 굽혔고, 대신 그의 사자를 보내 그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요구했다. 로마에서부터 교황의 사자가 피렌체로 도착했고, 또 한 차례의 고문이 반복됐다. 결국 교황은 스스로 ‘이단아’ 임을 승인한 가짜 사제의 처형을 승인했다.



 다시 한번 피렌체 광장에는 기름칠을 한 나무더미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번 ‘쇼’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그의 심복 도메니코 수도사, 실베스트로 수도사의 뒤를 따라 사보나롤라가 목에 밧줄이 감긴 채 불속으로 던져졌다. 거센 바람이 불어왔고, 축 늘어진 그의 팔이 바람에 휘날리며 마치 축복을 하듯이 하늘을 가리켰다. 현장에 있던 모두의 가슴에 얼음장이 들어선 순간이었다. 그들은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예언자’ 일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너무 오랜 시간 그의 마법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재가 아르노에 뿌려졌을 때, 그들은 예언자는 이탈리아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피렌체 시민이 ‘선민’이라는 믿음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는 데에 대한 '씁쓸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피렌체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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