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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y 17. 2021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피렌체 18

    1492년, 일 마그니피코, 로렌초 메디치가 운명한다. 피렌체 역사의 명암이 단숨에 어두워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마흔셋.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아르노의 도시국가가 해쳐나가야 할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강대국 프랑스를 견제해야 하는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교황청의 범 이탈리아 동맹의 결속은 위태로웠고, 도미니칸 수사 사보나롤라를 위시한 반 메디치 세력의 도전은 거셌으며, 로렌초의 후계자, 장남 피에로의 무능함은 도시의 어두운 앞날을 예시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렌체는 로렌초의 죽음과 함께 닥쳐온 난관들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역사의 흐름은 소국 피렌체를 서양사의 무대 변두리로 끌어내릴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서양의 시대정신이 아르노 강변의 작은 공화국 피렌체에 머물렀던 르네상스의 기적은 ‘위대한 자’의 죽음과 함께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피렌체 르네상스의 수명은 조금 더 연장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어느새 근대식 국가 건설을 마무리 짓고 있던 서유럽의 강대국들의 야욕을 작은 도시 공화국이 무기한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제 서유럽 역사의 주도권은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서부터 군대, 세금, 행정의 중앙 집권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494년 아펜니노 산맥 위로 모습을 드러낸 샤를 8세의 대군은 이탈리아를 근대사에 편입시키기 위해 나타난 역사의 손과 다를 바 없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불러온 사건은 밀라노에서 시작됐다. 스포르차 가문의 지안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드디어 성년을 맞이했다. 섭정의 자리에서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삼촌 로도비코에게 이는 별다를 것 없는 변화였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권력을 내려놓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바 있었다. 그러나 갈레아초의 아내이자 나폴리 국왕 페란테의 손녀인 이자벨라가 로도비코에게 권력의 양도를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밀라노의 권좌를 두고 벌어진 ‘정당성’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불거져 나오게 됐다.


    그녀는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로도비코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친정 나폴리 왕국에 도움을 청했다. 밀라노의 권좌를 두고 벌어진 갈등이 국제 분쟁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나폴리 국왕 페란테는 로도비코를 규탄하고 나섰고, 검은 피부 덕에 일 모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로도비코는 권좌에서 내려오는 일과 나폴리 왕국과 전면전을 불사하는 일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됐다.


    로도비코는 그에게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타국의 계승권 문제를 두고 으름장을 늘어놓는 눈엣가시 남쪽 이웃에게 나폴리의 왕위에 있어서도 분쟁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로 결심한다. 적의 적은 우방이라는 점에서 그의 발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그가 반도 내 분쟁에 끌어들인 인물이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라는 점에서 그의 계획은 극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샤를 8세에게 나폴리 왕위의 정통 계승권은 프랑스 왕가에 있으며, 마땅히 그의 것인 나폴리를 정복하는 일에 그가 힘을 보탤 것을 알리고, 정복전쟁이 더없이 손쉬운 승리로 이어질 것임을 어필했다.


 로렌초의 부재가 뼈아픈 순간이었다. 큰 분쟁 없이 수십 년간 이탈리아의 평화를 지키는 데 가장 크게 공헌했던 그의 뛰어난 점은 그가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웃의 라이벌들을 음해하는 데 급급하던 이탈리아 국가들을 지휘하여, 프랑스의 대군이 알프스를 넘어 횡군하는 일만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그의 선견지명은 이제 그의 사망 후 증명될 터였다. 반면 그의 아들 피에로는 이 둘 사이의 분쟁에서 전적으로 나폴리의 손을 들어버리면서  전통적으로 메디치 가문에게 부여된 중재자 역할을 외면해 버리며, 교황청, 피렌체, 나폴리로 구성된 반 밀라노-프랑스 연맹을 구축하는 데 앞장서 버린다. 이는 밀라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 동시에 샤를 8세의 진군의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 누구도 제동을 걸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반도 내 갈등은 고조되고 있었다. 결국 밀라노의 부추김은 로렌초의 악몽을 현실화시키고 말았다. 1494년 9월, 프랑스의 6만 대군이 나폴리 왕국 ‘탈환’이라는 명목 하에 이탈리아를 향하여 알프스를 횡단하기 시작했다. 샤를 8세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대군의 위용은 전쟁이라면 신물 나게 겪어왔다고 자신했던 이탈리아 국가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완전 무장을 갖춘 기병대를 중심으로 당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스위스 창병들을 앞세운 보병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금시초문이었던  대형 포환을 쏘아대는 포병대를 갖춘 샤를 8세의 대군은 가벼운 기병전 끝에 일찌감치 새로운 협상을 조율하기에 바빴던 이탈리아의 용병들이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었다. 이탈리아군은 적군이 전멸하거나 투항하기 전까지 전진을 멈추지 않는 프랑스의 정규군에 완벽하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끝끝내 현실화되고 만 프랑스의 침공이 동원한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찬란했던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이처럼 무자비한 힘의 논리에 의해 그 끝을 맞이하게 됐다. 여느 때처럼 일찌감치 중립을 선언하며 분쟁에서 손을 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주요 국가들이 프랑스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피렌체와 로마가 성문을 열고 정복자 샤를 8세의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해야 했고, 나폴리는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복자 샤를 8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맞이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샤를 8세


    언급했듯이 스물두 살의 피에로 메디치는 조급한 혈기 이외에 특출 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혜안을 보여줘야 할 시기에 그는 만용을 부리며 교황청, 나폴리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프랑스에 도전장을 던졌던 것이었다. 아버지 로렌초의 전철을 따라 호기롭게 출사표까지 작성하고서 전장으로 출전한 피에로는 허망하게도 프랑스군의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선, 자진해서 피렌체 성 밖으로 나가 캠프에 주둔하고 있는 샤를 8세가 내민 조약에 서명하고 만다. 사실상의 투항과 다름없었다. 전투 한 번 없이 모든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피렌체의 젖줄과도 같았던 피사를 포함한 물론 전략적 요충지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거기다 보상금까지 약속했던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혈통을 타고난 남자가 행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망발이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에 친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피렌체 시민들은 처음부터 피에로의 만용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고집한 전쟁에서 전투 한 번 없이 모든 요충지를 스스로 헌납한 피에로를 향한 격렬한 혐오를 느꼈다. 평화의 수호자로서 개선하려는 피에로를 향해 분노한 시민들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고, 팔라초 델 시뇨리아의 시민 정부는 협상 결과를 보고하러 나타난 피에로에게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피에로는 하루아침에  그가 가진 모든 권력을 상실해버린 것이었다. 결국 그는 야밤을 틈타 가져갈 수 있는 최대양의 금을 챙겨서 도주해 버렸고, 다음날 폭도로 변모한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궁전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화려했던 메디치 가문의 60년 치세의 끝은 초라한 것이었다..


 1494년 11월 17일, 샤를 8세는 피렌체 시민들의 “Viva Francia”의 환호 속에서 피렌체에 입성한다. 도미니칸 수도사 사보나롤라는 그를 두고 그리스도적 삶을 저버린 피렌체인들을 벌하기 위해 나타난 “신의 사자”라 칭했으나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샤를 8세는 “신의 사자”가 아닌 창을 거머쥔 ‘정복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은 스위스, 독일, 스코틀랜드, 프랑스, 스칸디나비안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이처럼 다국적  인종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커다란 풍채의 북유럽인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이기보다는 괴수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은 대군과 함께 나타난 정복자 샤를 8세의 모습에 또 한 차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갑옷 차림의 샤를 8세는 난쟁이에, 추남인 데다, 혐오스러운 틱 증상의 괴상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그의 외모는 마치 작은 원숭이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프랑스 왕가의 근친상간의 패혜였다.


 샤를 8세는 급히 재정비된 메디치 궁전을 거처로 삼고서 거만한 자세로 피렌체 정부와 협상을 재개했다. 이미 한차례 피에로의 굴욕적인 자세를 경험한 그는 강압적으로 피렌체가 “함락된 도시”이며, 그의 모든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만 함을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피렌체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피에로 카포니는 샤를 8세가 들고 있던 조약서를 낚아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선, 피렌체는 이러한 일방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호통을 쳤다. 발끈한 샤를 8세가

“그렇다면 우리는 전투의 나팔을 불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이에 지지 않고 카포니 역시

“나팔을 불도록 하라! 우리는 우리의 종을 울릴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위풍당당한 대군의 위용에 힘입어 서유럽의 패자 행세를 하던 샤를 8세였지만, 그는 실상 어린 아이만도 못한 지적 수준의 겁쟁이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대군을 앞세우고서도 전진을 결정하지 못하는 샤를 8세를 격려하기 위해 로도비코는 직접 아스티를 찾아 그를 독려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본래의 목적인 나폴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전 피렌체 시민을 상대로 골목골목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할 배짱은 없었다. 그는 결국 전쟁이 끝나는 동시에 피렌체 휘하의 요새들을 피렌체에 귀환시키겠다는 시뇨리아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다만 피렌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피사의 소유권에 있어서 쌍방은 협의를 보지 못한다), 본래의 목표였던 나폴리로 향한다.


 샤를 8세는 일사천리로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고 만다.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설 군대는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의 교황청 역시 프랑스군 앞에서 성문을 열고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했고, 나폴리 역시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샤를 8세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국왕 알포소 2세(페란테의 아들)는 시칠리아의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 진입한 지 수개월 만에 드넓은 나폴리 왕국이라는 전리품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상징적인 성과일 뿐이었지만).


    바다 건너 남부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확보하는 승리로부터 프랑스가 얻은 실질적인 이득은 미미한 것이었다. 반면 이탈리아가 이 굴욕적인 짧은 전쟁에서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피렌체에게 있어서 샤를 8세의 침공은 그 무엇보다 메디치 가문 통치의 끝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큰 분수령을 의미했다. 샤를 8세가 떠난 후, 피렌체의 시민 정부는 다시는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전면적인 헌법의 개헌을 발표했고, 단 한 차례도 독재자를 배출하지 않은 베네치아의 모델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평의회가 베네치아식 Grand Council과 협치를 이루는 새로운 구성의 민주정이 선포됐다. 물론 그 권위와 입지는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피에로 메디치의 지지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민주정을 반대하는 기존 상류층은 과거 치옴피 반란 당시에도 그러했듯이, 오직 반정의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만 이번 민주정 실험과 과거의 민주정 실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했다. 바로 민주정의 가장 확실한 지지자가 당시 피렌체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도미니칸 수도사 사보나롤라였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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